소설리스트

31화 (31/250)

순간 입 밖으로 멍청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머리가 새하얘지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심장이 주인의 의지를 무시하고 두근거리며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오, 여자 쪽도 얼굴 빨개졌는데?"

""오오오오!!!!""

그 순간 술꾼들의 잡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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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술자리의 약속이라지만 다른 이에게 실례가 될 수 있는 내기는 하는 게 아니네!"

"죄송합니다.."

"손 더 번쩍 들게!"

아무리 장난이라도, 가짜라도 할 일이 있고 못 할 일이 있지 어떻게 이런 짓을 저지르고 그냥 넘어가려 한단 말인가.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술꾼들도 따끔히 훈계하고 그도 위층의 방 안으로 데려와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나야 그대가 장난인 걸 알고 있었지만 만약에 그걸 다른 여인이 오해하고 그 다음에야 장난이었다고 말하면 그게 여인에게 얼마나 큰 실례가 될 수 있음을 모르는가!"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아는 자가 왜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전에도 그러더니 정말 지조 없는 남자였다.

그것이 사내든 여인이든 남녀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지고지순해야하는 법이거늘..

-부들부들

"저, 저기.. 이제 진짜 팔에 힘이.."

"엄살 피우지 말게!"

"엄살이 아니라 진짭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근육이라곤 하나도 없는 몸이란 말입니다."

"..."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번 한번만 이만 선처해 주기로 했다.

비록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반성하는 기색은 보이긴 했으니까.

"앞으론 주의하게."

직접 다가가 떨리고 있는 그의 팔을 내려주었다.

겨우 그게 뭐가 그렇게 힘들었는지 가느다란 팔에 땀이 흥건하게 묻어있었다.

어느새 좁은 방 안에 그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차있었다.

아무래도 자기 전에는 환기를 해야겠다.

이제 훈육도 끝났겠다 그를 그의 방으로 보내려고 하던 중

"..저기 소저."

"또 왜 그러나."

"실례가 안된다면 좀 일으켜 세워주실 수 있겠습니까..? 다리에도 쥐가 난 것 같아서.."

"후우.."

정말 연약한 몸이었다.

한숨을 쉬며 이쪽을 향해 뻗어있는 그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우자 생각보다 가벼운 무게가 느껴졌다.

그를 일으켜 세우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몸과 몸이 밀착했고 그의 체취가 더 강하게 다가왔다.

"..."

"가, 감사합니다.."

"빨리 방으로 돌아가게. 밤이 늦었으니."

그가 힘겹게 벽을 짚으며 방 밖으로 나간 뒤 창문을 열어 방에 가득 차있던 향ㄱ..아니 냄새를 내보냈다.

"...하아..."

-두근두근

정말 검보다 사람의 마음이 더 어렵다는 스승님의 말씀에는

틀린 것이 하나 없었다.

검화 한소연.

그 '검후'에게 제자가 있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진 지는 오래되었지만 대외적으로 나선 일이 거의 없었기에 거의 소문으로만 존재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녀를 향한 소문도 쌓여 그녀가 그녀의 스승과 닮은, 매우 아름답고 상냥한 인물이라는 사실이 금방 퍼져나갔다.

점점 그녀가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길 바라는 사람들이 많아질 무렵, 그녀는 끝내 용봉지회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그녀가 정식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사람들은 그녀에게 검화(劍花)라는 별호를 붙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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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올해의 후학들도 가능성이 아주 밝군."

비무장이 가장 잘 보이는 장소.

무림맹주는 비어있는 의자 두 개를 옆에 두고 한참 다음 경기 때문에 시끄러운 비무장을 바라보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10년 전 혈교의 혈겁을 막은 영웅 중 한명이라고 알려진 그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혈교와의 전쟁에서 당대의 무림맹주가 목숨을 잃었고 그가 급하게 공석을 메우기 위해 오른 자리를 지킨지 어느덧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용봉지회를 포함한 수많은 비무대회가 열렸었지만 그의 비어있는 옆자리는 채워지기는 커녕 점점 그 숫자가 줄어들었고 어느덧 두 개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과 달리 그의 기분은 제법 좋아 보였다.

"제자가 출전했는데 결승까지 와서야 겨우 오다니. 너무 매정한 것 아닙니까?"

드디어 비어있는 자리 중 하나의 주인이 왔으니까.

"결승 이전에 떨어질 정도로 부족하게 가르치지 않았으니까."

"허허, 유월 낭자는 오랜만인데도 그 성격은 여전하군요. 그래도 10년 동안 보낸 초대장을 전부 거절한 결과물이 저렇게 있으니 어떻게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낭자라고 불릴 나이는 한참 전에 지났다만."

감히 무림맹주에게 무례한 태도를 보이는 젊은 외모의 여성이었지만 여인의 정체를 안다면 아무도 그녀를 나무랄 수 없으리라.

10년 전 그와 혈겁을 막아냈던 영웅 중 한 명인 그녀였으니.

"그나저나 나는 올 줄 알았다고 하더라도 다른 하나는 뭔가?"

"원래 10년 전에는 빈 자리를 7개 준비했는데 점점 줄어들더니 이제 2개밖에 남지 않았지 뭡니까."

"..원래 8개 아닌가?"

"그 친구라면 공적으로 지정돼서.."

"..아."

그들은 동시에 한 인물을 떠올렸다.

전쟁 도중에는 든든한 동료였지만 무사히 혈겁을 막은 뒤에는 동료들이 아끼던 무기를 훔쳐 달아난 신투(神偸)를.

"대체 제자를 얼마나 열중해서 키웠으면 그 친구까지 까먹으셨습니까. 유월 낭자도 그 친구한테 빼앗긴 물건이 있는 걸로 기억하는데."

"..나야 검에 그렇게 까지 연연하지 않았으니까. 다른 한 명이 길길이 날뛰었었을 뿐."

"하하, 소천 낭자는 그랬었죠. 잡아서 사지를 분해시킨다거나.. 정말 도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입담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와 사이가 별로 안 좋았지."

"이렇게 오랜만에 인연을 다시 만나니까 옛날 기억도 나고 좋군요. 그래서 저 빈자리의 주인이 궁금하다고 하셨습니까? 그 소천 낭자의 것입니다."

"쯧."

검후는 한 얼굴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아직 건강 하더군요. 소천 낭자도 유월 낭자도 그동안 나이를 먹기는 커녕 더 어려진 것 같습니다. 저와는 다르게 말입니다."

"..."

10년.

그녀들과 달리 무림맹주를 포함한 다른 이들은 반로환동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그 세월을 고스란히 맞이했다.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다 한들 세월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

"..그대도 이제 수련에 열중 해야 하지 않겠나."

"허허, 다들 저에게 무림맹주직을 떠넘겨 놓고 그렇게 말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얼마나 바쁜 일인지 모르시는 것도 아니면서."

"..."

"안 그래도 슬슬 내려놓으려 하긴 했습니다. 아무래도 저도 나이가 나이다 보니 이제 비교적 젊은 친구들에게 물려줄 때가 온 것 같더군요."

"..후에도 만날 수 있기를 빌지."

"허허, 다음에도 초대장은 보낼 테니 그때도 제자를 데리고 오시죠."

잠시 후 결승전이 시작되며 두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궁세가의 검룡과 화산파의 검화.

남궁세가와 화산파 모두 검으로 유명한 만큼 많은 관객들이 이 경기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누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답할 가치가 있는 질문인가?"

"그렇게 대답할 거라고 예상 했습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비무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울린 뒤

매화향이 경기장 전체로 퍼져나갔다.

.

.

.

"스승님! 제가 이겼습니다! 제가 스승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았.."

"그래 그래. 수고했다."

검후는 그녀의 제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앗. 머리가 헝클어진단 말입니다! 저도 이제 어엿한 성인인데 이제 이런 행동은.."

"풀어진 입이나 감추고 말하거라."

"핫!"

검화는 급하게 손으로 그녀의 입가를 가렸다.

"들어보니 대회 내내 경기를 일찍 끝낼 수 있으면서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고 들었는데 왜 그랬느냐?"

"앗. 티가.. 났습니까?"

"소연이 네가 그 나이에서는 적수를 찾아볼 수 없다지만 이곳에는 그보다 더한 고수도 많다. 네가 그들의 눈을 전부 속일 수 있을 것 같았느냐?"

"아앗.."

만일 그녀가 제 실력을 전부 발휘했다면 결승은 물론이고 모든 경기를 10초식 안에 끝낼 수 있었다.

그 정도로 그녀의 실력은 그녀의 나이대에서는 적수를 찾기 힘든 것이었다.

"기만이었느냐?"

"아, 아닙니다! 저는 그저 저 때문에 경기가 너무 빨리 끝나면 상대의 평판이 안 좋아질까봐.. 비록 제가 이기더라도 상대의 실력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게 배려하려는 마음으로.."

"오히려 그 행동 때문에 상대의 기분이 상한다면? 그건 생각해보지 않았느냐?"

"그, 그건.."

검화가 울상을 지었다.

그녀의 맑은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기 일보 직전이었다.

-포옥

"아니다. 괜찮다. 네 마음씨가 고와서 그런 것인데 내가 왜 너를 탓하겠느냐."

검후는 그녀를 닮은 제자를 품속에 끌어안았다.

"그냥 이번 일을 계기로 알아두면 된다. 무작정 배려만 하는 것 또한 마냥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세상에는 얽힌 것들이 많으니까 말이다."

"흐윽..알겠습니다.. 흑.."

"울지 말거라. 경사스러운 날 아니냐. 네가 중원의 수많은 후기지수중 최고라는 것을 증명한 날 아니더냐."

"그치만.. 제가 처음부터 그런 알량한 배려를 하지 않았다면.. 저 때문에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을 테고.. 검화라는 별호가 아니라 봉황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꽃과 봉황.

모두 여인에게 붙는 것이었지만 앞은 그 아름다움에 초점을 둔 것이고 뒤는 그 무(武)에 초점을 둔 것이다.

-토닥 토닥

"그게 그렇게 마음에 걸렸더냐?"

"흑.. 제가 스승님의 이름에 먹칠을.."

"내가 네 나이였을 때 나의 별호도 검화였다."

"..예?"

지금의 검화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의 스승을 바라보았다.

"궁금하느냐? 내가 왜 검봉이 아니라 검화라는 별호를 얻었었는지?"

과거의 검화가 그녀의 제자에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와 같은 이유였느니라."

* * *

"허억.. 허억.."

기분 나쁜 꿈을 꿨다.

심마가 다시 찾아왔다.

[아아.. 그러고 보니 혹시 스승님도 관심 있으시던 겁니까? 저에게 유독 그 아이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하던 것도 그 이유였던 겁니까? 미리 말을 하시지 그랬습니까. 스승님이라면 한번 쯤은 나누어 드릴 수도 있는 것이었는데.]

"후우.."

내공을 순환시켜 머리를 맑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심마가 옅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커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다.'

그 어린 아이에게 정욕을 느끼는 것은 물론이고

원하지 않는 상대를 상대로 억지로 겁탈하려는 것 또한 인간으로서 도저히 저질러선 안될 죄악이었다.

물론 그것보다 더한 것이 따로 있었다.

[그래도 그가 앞으로 어떤 여인을 만나더라도 저를 잊는 일은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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