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아영은 경지가 오른 사람 치고는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몸의 노폐물이 빠져나가 한층 물오른 외모와 겹쳐 묘하게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냥 편지나 써 주세요.. 독 연구 재료가 떨어져 가니까 새로 보내 달라는 거랑.. 경지 올랐으니까 새로운 책도 좀 보내 달라고 하죠.."
"아니, 새로 받아가신지 얼마 안되신 것 같은데 벌써 다 쓰셨단 말씀입니까?"
"만들고 싶은 약이 있는데 제조법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직접 시도하다 보니까 금방 썼네요.."
여인은 미간을 짚으며 피곤한 기색을 보이는 당아영을 보며 그녀가 얼마나 수련에 열중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정도 열정이 있으니 저 나이에 절정의 경지에 올랐겠지.'
"알겠습니다. 그 이외에 요청하실 만한 일은 없습니까?"
"아, 그리고 이건 그냥 당신에게 가문에겐 비밀로 하고 개인적으로 구해다 줬으면 하는 것들인데요.."
약관을 막 넘은 천재라는 말도 모자랄 여인이 개인적으로 구해달라고 하는 물건이라니.
여인은 미약한 두려움과 기대감을 품으며 당아영이 건넨 쪽지를 열어봤다.
"............아가씨?"
쪽지에는 방중술 교본과 온갖 종류의 미약과 춘약이 써져 있었다.
당아영을 떨리는 눈으로 바라본 그녀였지만
"구할 수 있죠?"
"네, 넵! 구할 수 있습니다!"
당아영의 눈과 마주치자 급하게 눈을 내리 깔았다.
"..."
"에이, 상상하시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미래 대비죠. 즐거운 생활을 위한."
"하하.. 그렇죠?"
"부부간의 금실에는 이런 것도 중요하니까.."
그런 수준은 한참 넘어선 약들이었지만 괜히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여인이 본 당아영의 모습은 조금 어둡기는 했지만 명백히 사랑에 빠진 여인의 모습이었다.
한창 무공 수련에 열중해야 할 나이에 만일 그녀가 사랑을 위해 무공 수련을 포기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 앞을 필사적으로 막아야겠지만
"..아가씨. 혹시 모를까봐 말씀드리는 건데 이런 약은 조심해서 써야 합니다. 너무 과도하게 사용하면 불상사가.."
"알아요. 설마 그 정도도 모를까."
차마 막을 자신이 없었다.
대체 어느 놈팽이가 순진한(?) 아가씨를 꼬셨을까 라는 생각도 접은 지 오래였다.
'..무사하시길.'
이 정도면 오히려 상대 쪽을 걱정해야 하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녀는 당아영이 과부가 되지 않도록 그 사내의 양기가 충만하기 만을 빌 수밖에 없었다.
"믿는다고 했으니까.. 저도 믿어야죠.. 설마 그렇게 까지 말해 놓고 배신을 하겠어요.."
당아영이 졸린 표정으로 탁자에 고개를 묻었다.
"아.. 그러고 보니 혹시 성욕을 좀 줄이는 약도 있어요?"
"이 약의 해독제 용도라면 남성용의.."
"아뇨, 제가 좀 필요해서."
"..."
여인은 혹시 당아영이 졸려 보이는 이유가 수련에 열중해서 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소저, 이 장식은 어떻습니까? 꽤 어울려 보이는데."
"..아니, 나는 아까 그거면 충분.."
"본판이 워낙 좋으니까 뭐든 괜찮아 보이는 겁니다. 자, 이것도 껴보시죠."
하남에 도착한 뒤, 나는 그 여인과 시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착
"보세요. 어울리지 않습니까. 이렇게 조금만 더 꾸미면 훨씬 예쁜데 왜 그렇게 거부하십니까."
"어, 어울리는 게 맞나? 나는 면경을 봐도 잘.."
"제가 그동안 본 여인 중 가장 예쁘시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으읏.."
솔직히 말하자면 여전히 스승님이 우위이긴 하지만 여기서 두번째로 예쁘다고 할 멍청이는 아니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미래를 피하려면 스스로에게 신경 써야 한다고. 무공의 단련만이 수양이 아니라 이런 쪽도 스스로를 가꾸는 일입니다."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없는 건 아니긴 하지만.."
"원래 천지신명께서는 뻔한 답을 주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정 기분이 나쁘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런 불길한 미래를 막으려면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알겠네! 알겠으니까!"
여인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금방 두 손을 들었다.
좀 더 자신에게 신경 써야 한다는 게 외모를 가꾸는 말도 포함될 수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동안의 경험에서 미루어 봤을 때 하늘은 정말 배배 꼬여있는 분이라 이런 말장난도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올 수 있다.
그리고 본디 외모란 대인 관계에서 다른 이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는 것으로 외모를 가꾸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정신 또한 건강해진다.
'내가 할 말은 아닐려나.'
이렇게 얼굴과 체형을 전부 가리고 다니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이건 내가 특수한 경우다.
나는 납치 당해서 팔려나가기 싫다.
외모가 아무리 예쁘고 잘생기면 무엇 하나. 지킬 힘이 있어야지.
'상점창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이것도 없었으면 아마 산 밖으로 나올 생각도 못했을 거다.
평범한 망토로는 외모를 감추는 데도 한계가 있으니까.
"..아직 안 끝났나?"
아직 썡쌩한 기색의 나와 다르게 여인이 지친 모습으로 질문했다.
"벌써 지치셨습니까?"
"..이런 쪽에 익숙하지 않을 뿐이네."
그동안 이 여인과 다니면서 한 가지 사실을 알았는데 놀랍게도 이 여인은 따로 외모를 관리한 다거나 하지 않는다고 한다.
'신경을 안 쓴 외모가 저 정도라니.'
몸무게 0.1kg, 주름 하나에 목숨 거는 여자들이 듣는다면 살의가 피어오를 발언이었다.
하다못해 우리 스승님도 외모 관리를 하기는 하셨다.
[스승님, 이건 무엇입니까?]
[얼마 전에 캐온 약초이니라. 보름달의 빛만 먹고 자라는 식물이라 구하기 쉽지 않은 것인데 곱게 빻은 뒤 물에 섞으면 점성을 띈다. 그것을 피부에 바르면 노폐물이 빠져나가 미용에 좋다고 하더구나.]
[오.. 그러면 가져다 팔아서 고기..]
[내가 쓸 것이니라.]
[..혹시 빻는 건 제가 해야 합니까?]
[잘 알고 있구나.]
빻느라 근육통이 온 팔을 주무르며 완성품을 스승님에게 건넨 뒤의 말이 더 가관이었다.
[네가 발라주거라.]
[..예?]
[스스로 바를 수 있는 곳에는 한계가 있다. 모처럼 얻은 귀한 약초인데 골고루 써야 하지 않겠느냐.]
'..음.'
괜히 회상하지 않기로 했다.
이 외에도 일어나기 귀찮다면서 엉겨 붙는 바람에 내가 직접 씻기기도 하는 등 많은 일이 있었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조금만 더 꾸며도 훨씬 예쁘신데 아깝지도 않습니까."
아주 약간의 화장과 장신구 만으로도 외모가 훨씬 물올랐다.
이런 결과물(?)을 만들었다는 게 사내로서 뿌듯한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여인이 주변의 시선이 부끄러운지 다시 피풍의를 눌러 쓰기 전에는 주변에서 사람들이 계속 쳐다볼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소매에 그려진 매화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면 멋 모르고 접근하는 남자들도 분명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 아무튼 나는 이제 돌아갈 걸세. 오늘은 이만.."
"슬슬 식사하러 가려고 했는데 벌써 가시렵니까?"
"..식사?"
"예. 아까 상인에게 물어보니 여기서 일각만 걸어가면 꽤 좋은 객잔이 있다고 하더군요. 정 피곤하시면 오늘은 여기서 헤어.."
"..그대의 목소리에서 벌써 들뜬 기분이 느껴지네만."
"..."
"술로 유명하다는 소리인가?"
"..넵."
"하아.."
여인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치만 하남의 술은 얼마나 맛있는지 궁금하단 말이다.
도사가 한입으로 두말하면 안되지!
술값 내준다면서! 마음껏 먹으라면서!
"..자제하면서 마실 테니까 어떻게 안되겠습니까?"
저쪽에서 한 말이 맞긴 하지만 새벽의 무위가 머릿속에 맴돌아 함부로 입을 놀리기 힘들었다.
"알겠으니까 안내하게. 내가 사과의 의미로 약속한 것이니 한 입으로 두말할 리 있겠나. 원하는 만큼 마셔도 신경 쓰지 않겠네."
"가, 감사합니다!"
순식간에 관계가 역전된 것 같지만 원래부터 사실상 갑은 저쪽이었다.
'하남의 술은 어떤 맛일까.'
입맛을 다시며 아까 알아둔 객잔으로 향했다.
* * *
"..."
"크흐-! 어떻습니까. 소문대로 입니까?"
"이야 역시 듣던 대로구만. 그걸 한번에 다 해치울 줄이야. 설마 섬서의 그 유명인이 여기까지 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툭.. 툭..
나는 손끝으로 탁자를 건드리고 있었다.
무면금귀는 그 사이에 다른 술꾼들과 친해져서 놀고 있었다.
"..."
기껏 따라왔더니 이런 취급일 줄이야.
좀 더 이쪽에 집중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
-움찔
'내,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주책도 이런 주책이 없었다.
아무리 몸은 젊은 시절의 그것이라지만 이 나이를 먹고 이런 생각이라니.
"하아.."
너무 오랜만에 바깥 세상에 나온 탓에 가슴이 너무 들뜬 모양이다.
도사 된 몸으로 여인으로서의 행복을 느끼려 하다니, 만일 젊은 시절 스승님이 아셨다면 크게 혼내셨을 일이다.
하물며 아직 그 아이를 찾지도 못한 주제에..
"..."
-후룩
따뜻한 차가 몸 안에 들어오자 마음도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다.
그 아이를 찾아 제자의 죄에 대한 속죄를 해야 하고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마교와 천마를 향한 대비 또한 멈춰서는 안됐다.
그 아이를 찾을 겸 잠시 수련의 피로를 풀기 위한 여행이라고 생각하고 나왔거늘 이래서야 또 다른 심마가 생길 판이다.
물론 저자가 내게 특별히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문제였다.
'분명 수작은 익숙하다고 생각했거늘..'
젊은 시절에도 저런 수작들은 수도 없이 당해봤다.
아무리 시간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경험이 사라진 것은 아닐텐데 이상하게 저 사내에게는 자꾸 묘한 감정이 생긴다.
그를 그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스스로의 마음도 조절하지 못하는 주제에 무공의 경지가 무슨 소용인가..'
술꾼들과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그를 두고 혼자 올라가 보려 생각하고 있던 도중
"..소저. 죄송합니다. 나중에 사과드리겠습니다."
갑작스럽게 무면금귀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오오오오!!!"""
그리고 주변에서 환호성이 들려오더니
"저와 교제해주시겠습니까?"
무면금귀가 내게 하얀 꽃을 내밀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사고가 멈출뻔 했지만 그동안 익힌 무공이 헛되지 않았는지 금방 상황 파악이 끝났다.
아마 그와 술꾼들 사이에서 내기가 오고 갔고 그가 패배해 그 벌칙을 수행 중인 것이리라.
분명 그럴 거다.
-두근
술자리에서의 하찮은 노름일 뿐이다.
-두근
그러니까 괜히 반응하지 말고 무시하면 되는..
-두근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