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으음.."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새벽, 한기를 느끼며 눈이 뜨여졌다.
아직 날이 밝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때까지는 많이 남았지만 어째서인지 잠이 영 오질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바람이라도 쐴 겸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산에서 나오면서 그 약도 끊은 지 오래됐는데 이제 딱히 그런 이상한 일이 없는걸 보면 악귀도 물러갔나 보다.
스승님이 폐관수련에 들어가자마자 그런 현상이 없어졌다라..
‘혹시..’
들어가시기 전에 조치라도 취해주신 건가?
평소 성격이 워낙 괴팍해서 그렇지 은근 상냥한 구석도 있으신 분이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불침번 서는 사람이..’
눈을 비비며 밖으로 기어 나오자 달을 바라보고 있는 피풍의의 여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안 물어봤네.’
적어도 소저 앞에 붙일 말은 있어야 하지 않은가. 아니면 별호라도.
아니 근데 왜 저 여자 혼자 있지?
"소저? 안 주무십니까?"
"아, 일어났나."
"불침번은 다른 상인들이나 표사들이 선다고 들었는데.."
"그냥 잠이 적은 편이라 자청한 것뿐이니 그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아직 공기가 차가우니 들어가 있게."
[아직 공기가 차갑다. 나도 곧 들어갈 테니 마저 자고 있거라. 잠시 잠이 안 와서 나왔을 뿐이니.]
분명 스승님과 생긴 것도 다른 여인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달에 비치고 있는 옆모습이 스승님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
"..왜 그러나?"
"읏차."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에 마른 가지를 던져넣으며 근처에 걸터앉았다.
따뜻한 온기가 피부를 타고 몸 안쪽으로 전해졌다.
"저도 잠이 안 와서 그럽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모닥불에 신세 좀 지죠."
"...뭐, 마음대로 하게."
-타닥 타닥
여인은 계속 말없이 달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주변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모닥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 뿐이었다.
어색한 침묵에 먼저 입을 연 건 내쪽이었다.
"그런데 괜찮다면 누구를 찾으러 가시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무리 섬서와 안휘가 옆 옆 지역이라지만 중원 땅이 보통 넓은 게 아니라 평생 한 지역에서 살다가 늙어 죽는 사람도 수두룩한 세상이다.
나처럼 여유가 있어서 여행을 간다거나 물건을 팔러 다니는 상인들이나 하루하루 돈 될 거리를 찾아다니는 방랑무사 같은 경우가 아니면 특별한 이유가 없지 않은 한 이렇게 다른 지역으로 가는 일이 많다곤 할 수 없다.
사람을 찾으러 간다는 말은 들었지만 좀 더 호기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남에서 계속 쫓아다닐 생각이었으니까 혹시라도 그때 가서 말실수하지 않도록 미리 물어보는 것도 있었고.
"..."
여인은 내 말을 들은 뒤에도 한참 동안 말 없이 뒷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실수를 했나 싶어 사과의 말을 꺼내려던 순간
"..빚을 갚아야 하는 상대가 있네."
"빚이요?"
"내가 너무 큰 빚을 졌어."
난 또 빚이라길래 흔하디 흔한 원수지간인가 했더니 진짜 빚이었나보다.
"사실 지금 안휘에 있는 상대도 그 대상인지 확실하지 않네. 지금까지 계속 비슷한 사람까지 찾아 헤맸는데도 전부 내 착각이었으니."
"상대가 정확히 누구인지 모르는 겁니까?"
"..아니. 다 아네. 이름, 성별, 상세한 특징까지 다 아는데.. 아무리..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
"흐음.. 꽤 오랫동안 찾아 헤매셨나 봅니다."
"오래.. 해맸지. 10년이 넘었으니."
굉장히 긴 시간이다.
저 나이에 10년 전의 빚이라면 어릴 적 은인이라도 되려나?
-타닥 타닥
"굉장히 큰 빚인가 봅니다. 용케 포기하지 않으신 걸 보니."
"..굉장히 큰 빚이지. 감히 어떻게 갚아야 할 지 그 방법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저 나이에 절정의 경지에 오른 사람한테 저 정도 빚을 지워둔 사람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조금 부럽네.'
딱 봐도 미래에는 엄청 거물이 될 사람 같은데 저렇게 말할 정도의 빚이라면 대체 뭘 요구할 수 있을지 궁금할 정도다.
상세한 사정까지 물어보는 건 아무래도 민감할 수 있으니 꺼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솔직히 그 정도로 찾아 헤맸다면 이미 세상에 없는 것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기는 했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낼 정도로 눈치 없지는 않았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부럽네요. 소저 같은 미인이 그렇게 찾아 헤매는 상대라. 사내로서는 그런 영광도 없을 겁니다."
"..푸흣."
"아마 언젠가는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 정도로 오래 찾아 헤매셨으니 천지신명께서 도와주시기를 빌죠."
뒷모습만 보여서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방금 웃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 * *
'영광이라..'
과연 그 아이가 그런 일을 겪고도 여성에게 감정을 품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과연 저 기묘한 사내는 내 정체를 알고서도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칭찬은 고맙군.'
알던 모르던 예쁘다는 칭찬을 받은 것인데 굳이 기분 나쁠 이유도 없었다.
화산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이런 종류의 말도 들을 수 없었으니까.
-스릉
한 손으론 얼굴에 바람을 펄럭이며 다른 손으로 검을 뽑았다.
"나오게나, 이미 습격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 같은데 무엇을 망설이는가."
"..."
"나무 뒤에 셋. 나무 위에 다섯. 그리고 마차 뒤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는 둘. 순순히 나오면 피를 볼 일은 없을거네."
기회를 줬음에도 야밤의 습격자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익숙한 일이었다.
"그대는 여기서 벗어나지 말고 고개를 숙이고 있.."
품속에 손을 넣은 채 그대로 굳어있는 무면금귀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고 했으나
-우웅
'...?'
그의 주변에 잘 보이지 않는 반투명한 막이 만들어져 있었다.
두드려보지는 않았지만 제법 견고해 보이는 방패였다.
눈 먼 칼 정도는 확실히 막을 수 있을 정도.
'호신강기..는 당연히 아닐테고. 참 신묘한 물건일세.'
애초에 강기는 물건에 씌우는 종류지 이렇게 주변 허공에 만들어지는 종류가 아니었다.
아무튼 그를 향한 걱정이 조금 덜어졌으니
-스릉
지금부터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시간이었다.
상인들이 도적들의 비명 소리에 다급한 표정으로 튀어나왔을 때 쯤에는 이미 상황이 끝난 뒤였다.
내 검에는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모든 일이 끝나있었다.
잠에 취해있다가 급하게 빠져나온 상인들이 완전히 전의를 잃고 있는 도적들을 제압하고 밧줄로 묶고 있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도사님. 도사님이 아니었으면 쫄딱 망할뻔 했습니다."
"원래부터 이런 계약이었으니 신경 쓰지 말게."
여인은 상단의 책임자가 건네는 돈주머니를 사양하며 돌려주고 있었다.
"..."
유유히 도적들을 제압하던 여인과 저 여인이 정말 동일 인물이란 말인가.
아까 그녀가 도적들을 제압하던 장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도적들이 휘두른 무기는 그녀의 옷도 스치지 못했다.
애초에 그들이 무기를 휘두를 틈조차 없었다.
그녀의 검이 휘둘러졌다고 생각한 순간 도적이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나는 당연히 검이 도적을 베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10명의 도적들이 전부 제압 당할 동안 주변에는 피 한 방울 떨어져 있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고수인거야.'
검이 닿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덜덜 떨면서 주저앉을 정도라니.
나름 이 세상의 상식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뭐, 정말 고수들은 검 한번 휘둘러서 산도 가를 수 있다고 하니 저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말로 듣는 것과 직접 보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당아영보다 수십 배는 강한 것 같은데.'
아무리 절정과 일류의 차이라지만 나이도 거의 비슷해 보이는데 저렇게 강한 게 말이 되나?
그때 봤던 흡혈귀도 저 여인이라면 단칼에 처리해버릴 것 같았다.
'후우..'
아직도 떨리고 있는 심장을 툭툭 건드리며 진정 시켰다.
흡혈귀 사건 때도 그렇고 이런 전투 장면은 심장에 영 좋지 않다.
'그러고 보니 이건 효과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네.'
품 속에 쥐고 있던 물건을 바라보자 정보가 떠올랐다.
[보호의 로자리오]
[죽지 않는 자들과의 전쟁에서 영웅들에게 보급된 최후의 성물 '그랜드 크로스'의 복제품. 원본에 비해 효력이 크게 낮아졌지만 이 덕분에 목숨을 구한 영웅들이 적지 않다.]
하루에 한번 보호막을 펼칠 수 있는 기능이 있는 상점창에서 산 아이템이다.
그 강도가 얼마나 강력한지는 모르겠지만 500포인트 값은 하기를 빌 수밖에 없었다.
정작 쓰려고 샀던 흡혈귀 사건 때는 몸이 굳어서 쓰지도 못했지만.
'오히려 쓸 일이 없는 게 다행이지.'
내가 이걸 쓰게 되는 때가 있다면 내가 위험에 처했다는 뜻이니까 가급적이면 쓸 일 자체가 없으면 좋겠다.
이번에는 습격자가 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쫄아서 써버렸지만.
아무튼 상인의 사례를 거듭 거부하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떻게 친해지는 방법 없으려나.'
방금 보여줬던 무위라면 안휘 뿐만 아니라 어딜 가더라도 안전은 보장 받을 거다.
술을 꺼린다는 게 흠이긴 하지만 성격도 좋고 강하기까지 하니 연을 더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친구 정도만 돼도 좋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남은 여행길 동안에 조금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까 나한테 점 봤었잖아.'
머릿속을 뒤져 당시 나왔던 점의 내용을 생각해냈다.
그동안 받은 손님이 한둘이 아니라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다행히 기억에 잘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소중한 무언가를 빼앗긴다고 했었지.'
저런 여인한테 소중한 거라면 대체 뭘까.
물건, 장소, 사람, 신념, 무형과 유형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지 될 수 있기 때문에 예상하기 쉽지 않았다.
'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옆에서 지내면서 소중한 것을 빼앗기지 않도록 도와주면 호감은 금방 살 수 있지 않을까?
다름 아닌 내가 본 점이니까 천지신명님을 조금 닦달하면 뭐라도 힌트..
-우르릉
..같은 건 바라지도 않죠!
불길한 구름 소리가 들렸기에 서둘러 사과했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어느새 먹구름이 자욱하게 껴있었다.
'아, 그냥 먹구름이구나.'
난 또 겨우 이거 가지고 천벌이라도 내리려는 줄 알았다.
은근 이런 쪽에는 또 민감해서 선을 조금만 건드려도 아주 난리도 아니다.
마음 같아서는 욕이라도 하고 싶은데 워낙 변덕이 심해서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에휴.'
그래도 이 능력으로 어떻게 먹고 살고 있는 거니 뭐라 할 수가 없다.
이것마저 없으면 일반인보다도 못한 몸이니까.
* * *
"아, 아가씨. 경지가 오르셨다는 게 정말이십니까?"
당아영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여성에게 말없이 암기를 꺼내 검기를 발현했다.
경지가 올랐다는 걸 증명하는데 이것만큼 확실한 수단은 없었다.
"추, 축하드립니다. 어릴 때부터 범상치 않으시더니 설마 그 나이에 절정이라니.. 가주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아버지요.."
"그러고 보니 이럴 때가 아니군요. 이런 경사스러운 일을 빨리 가문에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둘러 마차를.."
"아뇨.. 됐어요.. 오고 가는 시간만 일주일에 어르신들이랑 이야기 하려면 또 뺏기는 시간이 어마어마할 거고.. 괜히 갔다가 형제들이랑 만나고 싶지도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