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250)

'..나는 대체 무엇을 원하는 거지.'

매번 그 소년을 찾아 사과하겠다는 생각만 하면서도 정작 다른 이가 그 소년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경지까지 와서 아직도 자신의 마음을 명확히 다잡지 못할 줄이야.

'..아마 시간이 오래 지나서 그런 것이겠지.'

무려 10년이다.

오히려 그 아이가 이미 세상의 차가움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이 더 높을 정도의 시간.

사실 이제 와서 그 소년을 찾는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매번 사과하겠다고만 하고, 정작 그의 망쳐버린 인생과 시간에 대해서 어떻게 보상할 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할 수 없었다.

매 해 시간이 흐를 때마다 준비했던 말이 의미가 없어졌다.

당시 지학도 되지 않던 아이에게 10년이라는 시간은 감히 보상하겠다고 쉬이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인생의 황금기라고 해도 좋을 시간을 자신의 탓으로 망쳐버린 것이었으니까.

이제 와서 그 소년을 찾는다고 한들, 자신이 대체 어떻게 해야 그 빚을 갚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감히 그 소년 앞에 모습을 들이대는 것 자체가 실례 아닐까.

괜히 아픔을 딛고 일어나 잘 살고 있을. 이제는 청년이 되어있을 자에게 괜히 아픈 기억을 되새겨 주는 것 아닐까.

'경지가 오르면 무엇 하나.. 정작 사람을 대하는 건 아직도 부족하거늘..'

검보다 사람이 더 어렵다는 스승님의 말에는 틀린 것 하나 없었다.

"소저, 안에 계십니까?"

-화들짝

자괴감에 너무 깊게 빠져든 나머지 주변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했더니 무면금귀가 마차 밖에서 다가온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흠흠, 무슨 일인가?"

"혹시 괜찮다면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게."

그가 천막을 치우고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한창 심란한 와중에 그를 보자 가슴 한켠이 더 아려왔다.

"아까 보니까 괜히 저 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못 하신 것 같아서 음식 좀 싸왔습니다. 술자리 분위기가 부담되시면 마차 안에서 드시죠."

그가 들고 있는 접시에는 음식들이 담겨있었다.

제대로 보지 않고 사양의 말을 건넸다.

경지가 경지라 몇 끼 굶는다고 괴롭지도 않고 도사인 이상 자극적인 음식이나 고기는 멀리해야 했기에 이런 남성들의 술자리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거의 없었다.

"배려해준 건 고맙지만 도사는.."

"자극적인 음식이나 고기는 멀리한다고 들어서 양해를 구하고 최대한 피해서 가져왔습니다. 일단 챙겨오긴 했는데 그래도 불편하시면 남기시죠."

"..."

확실히 대부분이 곡물이나 채소였고 양념도 최소한으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과일은 어디서.."

아까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붉은 색의 과실도 있었다.

"상인들이지 않습니까. 물건 중에 과일도 있다 길래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돈 주고 사왔습니다. 다행히 싱싱하더군요."

"이 시기의 과일은 비쌀텐데..?"

"소저 덕분에 무료로 얻어 타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술값도 대신 내준다는데 이 정도 지출이 아깝겠습니까."

분명 모자 안쪽의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음에도 그가 웃고 있다고 느꼈다.

"안휘까지 같이 가기로 한 사이 아닙니까. 서로 불편하거나 가리는 게 있으면 서로가 맞춰야지 한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관계는 좋지 않습니다. 저는 소저와 더 가깝게 지내고 싶거든요."

"뭣..!"

"하하, 제가 속세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런 것이니 부담스럽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흔하디 흔한 수작이다.

이런 수작쯤은 옛날부터 얼마든지 당해 왔었다.

-펄럭펄럭

'나, 남자가! 어찌 지조도 없이!'

분명 그러할텐데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한서불침은 이룬지 오랜데 몸에서 열이 나는 느낌이 들었다.

손으로 바람을 일으켜 열기를 식히고 있자 그가 접시를 내려두고 마차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아, 그리고 소저. 아까 제가 한 말은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기억도 잘 안 납니다. 그 여자."

-스륵

그는 저 말을 끝으로 마차를 나갔다.

"...배려해준 건가?"

먼저 그의 사정도 모르고 나무란 것은 자신이거늘 내가 신경 쓰는 것 같으니 이렇게 먼저 찾아와서 위로해 주다니.

'요, 요즘 후기지수들은 이런 것도 따로 배우는 모양이야.'

-펄럭펄럭

분명 익숙해 졌다고 생각했거늘 얼굴에 피어오른 열기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후우.."

설마 이 나이를 먹고 이런 감정을 느낄 줄이야.

무서운 자였다.

여자 관계가 복잡하다는 소문은 따로 들은 적 없는 걸로 아는데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느껴지는 감정이 순수 그 자체였지만 아무튼 솜씨가 장난 아니었다.

-아삭

마음을 진정 시키고자 그가 가져다준 음식을 입게 가져다 댔다.

아주 맛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당히 맛이 있었다.

그리고 과일은..

-아삭

과즙이 참 달콤했다.

입안에 달달한 맛이 맴돌았다.

* * *

'절정 고수랑 친해져서 나쁠 건 없지.'

무인들이 평생을 수련해도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라는 경지다.

아직 20대밖에 안 돼 보이는데 그 정도 경지라면 정말 괴물중의 괴물인 것이다.

미래에 얼마나 높은 경지에 올라 있을지 기대되는 유망주.. 라는 건 어차피 산 속으로 돌아갈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고

'그러고 보니 저 정도면 별호도 있으려나?'

내가 중원 정세에 밝지 않아서 잘 모를 뿐이지 저 정도 인물이라면 어지간히 실력을 꽁꽁 감추고 지낸 게 아닌 이상 분명 별호 하나는 있을 거다.

'화산파고.. 검을 쓰는데 젊은 여자니까.. 검봉? 검화?'

사실 별호가 지어지는 규칙도 잘 몰라 예측할 수 있는 범위가 저 둘 뿐이다.

그나저나 검화라고 하니까 뭔가 몸에 으스스한 기분이 감도는 게 썩 좋은 기운이 담긴 별호는 아닌 것 같다.

왠지 가지거나 가진 적 있는 인물한테 안 좋은 영향을 줄 것 같은게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별호다.

이래 보여도 점쟁이니까. 이 정도 기운은 읽을 수 있다.

'술 값 대준다는 언약도 받았으니까.. 하남에서 붙어 다녀야겠다.'

안휘에 도착할 때까지 술값을 내준다고 했으니 하남에서 관광하면서 놀러 다니는 동안도 포함일 거다.

하남에 가본 적 있는 것 같은 눈치였으니 잘 부탁해보면 여행의 도움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잘 모르더라도 그냥 옆에서 붙어 다니기만 해도 이득이다.

무려 절정 고수이지 않은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안전을 위해 무사를 고용할까 했던 고민 따위를 완전히 날려버리는 존재가 바로 옆에 있었다.

그녀가 다니는 곳을 따라다니기만 해도 하남에서 있는 동안의 안전은 보장되는 것이고 이런 식으로 미리 호감작(?)을 해 놓으면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보자고 할 수도 있다.

괜히 서로 불편하거나 가리는 게 있으면 서로 맞추자고 한 게 아니다.

그걸 위해서 오랜만에 칼을 들었던 것이다.

산 속에서 매일같이 풀떼기를 조리 한지 어언 10년.

최소한의 양념으로 최대한의 맛을 끌어내는 방법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역시 속세의 맛을 따라올 수는 없지만 못 먹을 수준은 아니다.

가끔씩 스승님도 칭찬해 주시던 솜씨였으니까.

"아까 보니까 야채 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던데 요리 자주 했었수?"

"자주 했었죠."

"허허, 아내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꽤 사랑 받는 모양이야. 칼에 아주 애정이 담겨있더만."

"..."

애정?

웃기지 말라지.

그딴 괴팍한 여자한테 느낄 애정 따위 전혀 없었다.

[저 나무가 보이느냐? 네가 지학일때 심은 나무인데 어느덧 저렇게 자라서 네 키도 훌쩍 넘었구나. 그땐 네 무릎까지 간신히 오는 길이였거늘.]

그런 여자..

"..."

..안휘에 가면 여자들이 좋아할만한 선물이 뭐가 있을지 한번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산 속에서 스승님과 지내던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스승님. 요즘 이상한 꿈을 꿉니다. 등 뒤에서부터 누가 끌어안고 제 몸을 더듬는 그런 꿈인데 혹시 불길한 징조가 아닐까 염려됩니다."

어느 날부터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내 몸을 옴짝달싹 못 하게 묶어놓고 내 몸 여기저기를 더듬는 꿈이었는데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나지도 못하고 꿈인데도 이상하리만치 생생해서 불길한 기운이 들 정도였다.

처음 며칠 동안은 혼자서 끙끙 앓으면서 고민해 봤지만 도저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다 오히려 그동안 더 강도가 심해져서 고민 끝에 스승님에게 상담하기로 결정했었다.

"..."

"스승님? 왜 말이 없으십니까?"

"..그동안 내성이 들렸나."

"예?"

"아, 그냥 혼잣말이었느니라. 일단 앉아서 정확히 어떤 내용이었는지 상세히 얘기해보거라."

스승님의 말에 앉아서 꿈의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눈이 떠지지 않습니다. 그 상태에서 팔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제 몸을 묶습니다."

"음."

"그 뒤에는 명백히 손이라고 느껴지는 감각이 온몸을 휘젓습니다. 머리, 가슴, 배, 다리, 음.. 아무튼 온 몸을요."

차마 말하기 민망한 부분은 말하지 못했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하리만치 감각이 선명합니다. 마치 현실인 것처럼. 저항하려고 해도 몸이 묶여있어서 아무것도 못하고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아십니까?"

"..."

스승님은 잠시 고민에 잠긴 표정을 지으시더니 금방 입을 여셨다.

"아무래도 네게 악귀가 달라붙은 모양이구나."

"악귀요?!"

"그래. 아무리 네가 몸도 약하고 단전도 망가진 몸이라지만 그동안 내게 배운 게 있는데 설마 하찮은 잡귀가 달라붙은 건 아닐거다. 내가 눈치채지 못했으니 아무래도 상당히 강한 악귀인가 보구나."

"히이익.."

스승님의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악귀라니. 사람을 파멸로 몰아넣거나 몸을 강제로 뺏어버리는 귀신 아닌가.

심지어 매일 같이 자는 스승님이 눈치채지 못했다면 상당히 강한 악귀인게 분명하다.

나는 감히 상대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그,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우선 절대 저항하지 말거라. 그것이 네게 무슨 짓을 하던 목소리도 꾹 참고 아무 저항도 하지 말거라."

"그, 그거면 되겠습니까?"

"일단 그렇게 며칠 견디다 보면 틈이 생길 거다. 그때 내가 악귀를 쫓을 수 있는 약을 제조해 줄테니 자기 전에 마시거라. 그러면 아마 악귀가 물러갈 것이니라."

스승님의 말에 불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잠에 들었다.

그날로부터 3일 동안 손길이 더 음란하고 자극적이라 자고 일어나자마자 바지 안쪽부터 확인했어야 할 정도였다.

결국 밤에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얼굴에 다크서클이 퀭해질때쯤

"이제 슬슬 때가 됐겠구나."

묘하게 요즘 들어 기운이 넘쳐 보이는 스승님이 해결 방도를 마련해 오셨다.

"자, 조금 쓰겠지만 자기 전에 이 약을 먹고 자거라. 아마 오늘 밤부터는 편하게 잘 수 있을 테니."

"..매일 말입니까?"

"일단 오늘 하루만 먹어보거라. 일단 약효를 보고 그 다음에 결정할 일이니."

조금이 아니라 매우 쓴 약을 마시고 잠에 든 그 날은 정말 스승님의 말대로 귀신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다.

"스승님. 오늘은 스승님 말대로 푹 잤습니다."

"네가 푹 잤다니 내 마음도 놓이는구나."

"그런데 묘하게 몸이 허하고 정기가 빨린 느낌이 드는데 이것도 약의 부작용입니까?"

"..원래 그런 약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니 감수하거라."

그날 따라 묘하게 스승님의 피부가 좋아 보였지만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약효는 증명된 것 같으니 앞으로 일주일에 하나씩 먹거라. 원래 악귀란 놈들은 끈질겨서 잠깐이라도 틈을 내주면 다시 돌아오기 마련이니."

그 뒤로 일주일에 한번 약을 먹는 날마다 몸에 기운이 없어서 힘들었지만 스승님이 그만큼 짐승을 잡아오시는 빈도도 늘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악귀 때문에 고생하는 제자가 보기 안 좋으셨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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