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저.."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었다.
화산에서 머무르던 동안에는 절대 들을 일이 없는 호칭이었으니.
"..대체 얼마 만이지.."
반로환동으로 외모는 젊을 때를 유지하고 있으니 확실히 겉만 보면 소저라고 불릴 만 하다.
설마 젊은 사람을 보면서 '혹시 이 사람이 반로환동한 고수일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혹시 소저라는 호칭이 불편하십니까? 그러면 다른 호칭을.."
"아, 아니네. 소저라고 부르게."
젊게 봐주는 걸 싫어하는 여인은 없다.
그리고 굳이 소저라는 호칭을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아, 어디까지 가냐고 물었었나? 안휘에 찾는 사람이 있어서 이렇게 신세를 지고 있네. 급한 일은 아니라 중간에 하남에서 볼일은 봐도 상관 없고."
"오, 저랑 일정이 겹치시네요. 저는 따로 사람을 찾는 건 아니지만요."
우연이었다.
설마 그냥 얻어 탄 마차에서 이런 식으로 인연을 만나게 될 줄이야.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안휘까지 갈 때까지 같이 지내지 않으시겠습니까? 제가 산 속이랑 섬서에서만 지내봐서 세상 물정을 잘 모릅니다."
무면금귀가 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수상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생각보다 작은 손이었다.
'..원래 이렇게 작았나?'
분명 전에 점을 보러 갔을 때는 평범하게 느껴졌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까 어딘가 느낌이 달랐다.
어쩌면 이것도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신묘한 요술일지도 모르겠다.
"..상관은 없지만 나도 하남이나 안휘를 가는 건 오랜만이라 제대로 안내는 못 해줄 수 있네."
"하하, 괜찮습니다. 아예 무경험자보다야 낫겠죠."
상대가 악수를 권했으면 받아주는 게 예의.
그의 손은 겉모습과 다르게 여리고 부드러웠다.
저번에 내공을 흘려보내 몸 안을 살펴봤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도사님들! 출발합니다!"
-덜컹!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아무리 마차를 탔다지만 야영 한번 안하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만큼 중원 땅은 좁지 않았다.
"아이고 이 형씨 생긴 거랑 다르게 아주 술꾼이네 술꾼이야!"
"생긴 거랑 다르다니. 어차피 얼굴도 안보이지 않나?"
"그래도 뭔가 분위기란게 있다는 거지."
"크으-!"
밤이 깊어지고 야영을 할 때 즈음에는 술판이 벌어져 있었다.
무면금귀는 사교성이 좋은 건지 금방 상인들의 틈 속에 파고들어서 술 내기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흠."
나는 당연히 술판에서 멀리 떨어져 적당히 음식만 집어먹고 있었다.
도사가 된 입장에서 술은 멀리해야 하는 것.
이 경지가 더 이상 술을 마신다고 취할 경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만들어진 습관이나 이념은 어쩔 수 없었다.
"아이고 이러다가 우리 술은 가져가기도 전에 다 팔겠네. 더 많이 챙겨올걸 그랬어."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이 마시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내가 술을 멀리하는 것일 뿐.
그래도..
"술 맛 좋네요! 더 가져오시죠!"
'너무 마시는 거 아닌가..?'
도사는 아니라지만 천기를 다룬다는 자가 저렇게 술에 정신 팔려 있다니.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었다.
일행이라고 소개한데다 하필 똑같이 피풍의를 입고 있는 상황에서 저자가 저렇게 행동하면 내가 무슨 꼴이란 말인가.
"돈은 많이 있습니다! 아예 저기 한통을 더 뜯으셔도.."
..아무래도 안되겠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무면금귀의 뒤쪽으로 향했다.
-턱
"그 잔까지만 마시지."
"..."
한창 술을 즐기던 상인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피풍의 밖으로 그가 크게 침울해 한다는 게 느껴졌다.
"저.. 딱 한잔만 더.."
"안되네."
그가 크게 고개를 떨구며 반도 남지 않은 잔을 빙글빙글 흔들었다.
"아직 젊어 보이는데도 잡혀 사는구만."
"쯧쯧.. 모름지기 남자라면 패기 있게.."
"아까 저 여자가 쓰던 검기를 봤는데 얼핏 봐도 일류보다는 수준이 높아 보였네."
"..부인의 청은 받아주는 게 남자의 도리지."
아무래도 기분 나쁜 오해를 한 것 같다.
애초에 남성에겐 관심이 없을 뿐더러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술만 밝히는 남자라면 더더욱 사양이다.
"그냥 일면식이 있는 사이지 그런 관계는 아닙니다."
눈살을 찌푸리며 이쪽을 향해 수근거리는 상인들을 향해 말했다.
"크흠.. 흠.. 실례했구먼.."
"그.. 미안하게 됐습니다.."
"..앞으로 주의해 주시죠."
은근슬쩍 다른 술병으로 손을 뻗고 있는 무면금귀의 손을 쳐내고 뒤로 잡아 끌었다.
아무래도 조금 대화를 나눌 필요성이 있어 보였다.
* * *
한창 분위기가 달아오르던 와중에 여인에 의해 끌려 나와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내가 뭐라 할 자신이 없었다.
아까 듣기로는 최소 절정이라고 하던데.
'당아영보다 강하다는 거잖아.'
그런 상대에게 함부로 불만의 말을 꺼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어쩐지 굳은살이 장난 아니더라니.'
설마 절정일 줄이야.
피풍의 안쪽으로 보이는 외모만 보면 당아영과 나이 차이도 크게 나지 않아 보이는데 대단했다.
분명 당아영이 그 나이대에서는 가장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세상은 넓었다.
'말투가 20대 말투가 아니긴 한데.'
뭐, 말투야 이 세상에서 뭐 그리 의미가 있다고.
그냥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듣고는 있나?"
"무, 물론이죠!"
"하아.. 그러니까 아무리 그대가 도를 닦는 도사는 아니라고 하지만 천기를 다루는 입장에서 그렇게 술독에 빠지는 것은 도사 입장에서 보기 썩 좋지 않.."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좀 늦더라도 다른 마차를 찾아볼걸 그랬다.
술을 줄이라니. 차라리 수명을 줄이면 줄였지 술은 못 줄인다.
'하아..'
어떻게 해야 이 외모는 20대인 주제에 상당히 고지식해 보이는 여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이미 이쪽에서 안휘까지 같이 가자고 제안해버린 상태. 협상을 보지 않으면 남은 일정이 힘들었다.
'부정 못할만한.. 가불기가 뭐가 있을까.'
내가 어떤 변명을 해도 저쪽에서 따로 반박의 여지를 주지 않는 말.
그런 것을 찾아야 했다.
'아.'
생각났다.
"..사실 제가 술을 마시는 것을 즐겨서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 사정이 있어서 마시는 거예요."
"..뭐지?"
여인이 가소롭지만 변명은 들어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나저나 이쪽도 외모가 상당했다.
스승님의 외모에 익숙해져 있는 내 눈에 예쁘게 보일 정도면 일반인 기준에서는 상위 0.1%쯤 된다는 소리다.
아무튼,
"사실.. 잊고 싶은 괴로운 기억이 있어서 그럽니다."
나는 혼신의 연기를 시작했다.
최대한 슬프다는, 괴롭다는 감정을 목소리에 실었다.
"믿고 모든 걸 바쳤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분명 그때 겉으로 느끼기에는 좋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했고 마음을 바쳐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상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동요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결국 배신당했습니다. 저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감정이 사랑이 아니더군요. 결국 제 모든 걸 앗아갔고.. 지금은 헤어졌지만 아직도 간간히 그 얼굴이 떠오를 때면 괴롭곤 합니다."
"..."
"그래서 술을 마십니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 여자에 대한 생각이 전혀 들지 않거든요."
작위적으로 방금 만들어낸 설정이었지만 저쪽에서 반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녀가 내 뒷조사라도 해왔으면 모를까.
내가 겪었다는 데 뭐 어쩔 거야.
"아까는 산 속에서 지냈었다고.."
이 반응도 미리 예상해 뒀었다.
"제가 왜 굳이 속세를 떠나서 산 속으로 들어갔겠습니까?"
"..."
여인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버렸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여인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안하네. 내가 그대의 사정도 모르고 너무 내 의견만 밀어붙였어."
"..그러면."
"술을 마시던 무엇을 하던 마음대로 하게. 사과의 의미로 안휘에 도착할 때 까지 술값은 내가 낼 테니 원하는 대로 하게."
역시 사람은 입을 잘 털어야 한다.
나는 이렇게 일시적이지만 좋은 물주(?)를 얻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다시 돌아가 술자리를 즐기고 있는 무면금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설마 그런 사연 때문에 술을 마시는 거였다니.
그런 과거가 있는 상대에게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대한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어휴 아까 그렇게 마셔 놓고 그게 더 들어가? 그러다가 병 나도 몰라?"
"병 나는 것보다 술이 없는 게 더 무섭습니다. 자, 한 통 더 뜯으시죠."
"허허, 이러다가 정말 가기도 전에 다 팔아버리겠어."
이미 그가 해치운 술의 양도 어마어마한데 괴롭지도 않은지 다시금 술을 잔에 따르고 있었다.
그가 저렇게 강박적으로 술을 마시는 이유가 믿었던 여인에게 배신 당한 아픔을 달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니 어딘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무공이라도 익혔다면 모를까 보통 사람이 저 정도로 술을 마시면 몸에서 거부반응을 보이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괴로운 기색 없이 있는 걸 보면 대체 그 기억이 얼마나 괴로운 것이기에 저럴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할 정도다.
몸의 고통보다 마음의 고통이 더 크다는 것이니까.
특히 믿었던 여인에게 배신 당했다니 제자의 일이 생각나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
'..잠깐만.'
저번에 그의 몸을 살펴봤을 때 화산파의 무공을 익혔다가 단전이 파괴된 흔적을 발견했었다.
그때는 나름의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따로 의심하지 않았지만..
'...'
거기에 믿었던 여인에게 까지 배신 당했다?
요소가 겹쳐도 너무 겹쳤다.
'혹시..'
무면금귀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소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 깊숙한 곳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저 정도로 겹치는 사람이 아무리 중원이 넓다 한들 그렇게 많을 리가 없다.
-두근두근
'..아니겠지.. 아닐 거야..'
이미 지금까지도 그 소년으로 의심되는 사람은 몇 번 만나봤다.
결국 전부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그러니까 무면금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