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250)

까치발을 들고 그녀의 어깨에 턱을 올린 뒤 귓가에 속삭였다.

"저도 아직 준비가 덜 돼서 그래요.. 나중에 꼭 보여줄게요."

-쿵! 쿵!

밀착해 있는 만큼 당아영의 심장 소리가 내게도 들렸다.

"저는 소저를 믿는데.. 소저는 저 못 믿어요?"

그게 결정타였다.

"미, 믿죠! 당연히 믿죠! 누가 못 믿는데요?!"

당아영이 완전히 홍당무가 된 채로 멀리 물러났다.

그날 당아영과의 만남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

.

.

"..음."

당아영의 집 밖으로 나온 뒤.

나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회상했다.

당아영을 향해 이상한(?) 행동을 했던 건 분명 내 생각이 아니었다.

뭐랄까. 몸이 자동으로 움직였다고 해야 하나.

'뭐였지.'

덕분에 어떻게든 상황이 잘 마무리된 것 같긴 하지만 어딘가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몸에 한기도 도는 것 같고.

'천지신명님?'

점쟁이로서 이런 이상한 기분이 들 때 제일 먼저 의심해야 하는 건 역시 하늘이다.

우리의 하늘께서는 정말 장난기가 많으시고 변덕도 심하셔서 감히 일개 인간이 그 뜻을 파악하지 못할 때가 많으니까.

'..뭐 됐나.'

괜히 복잡한 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돌아가서 술이나 마시고 남은 여행 준비를 마저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

왠지 깊게 파고들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 * *

무인들이라 하면 누구나 하나씩 심마(心魔)를 가지고 있다.

심마는 누구나 그 형태가 달라서 의외로 쉽게 이겨낼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의 무인들에게 이 심마란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낮은 경지라면 모를까 경지가 높은 무인일수록 심마의 위험 또한 커지기에 무인들은 항상 심마를 조심해야 한다.

벽을 넘는 장애물이 됨은 물론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잡아먹혀 주화입마를 불러올 수도 있는 것이 심마였으니.

"..."

또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심마가 찾아왔다.

"하아.."

'옛날엔 이 경지에서 심마는 더 이상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늘.'

한번 이겨내고 벽을 넘었다고 평생 걱정할 필요가 없다면 그것이 심마라고 불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조금만 실마리가 보인다 싶으면 머릿속에 그 장면이 떠올랐다.

[스승님, 오셨습니까?]

한때 사랑해 마지 않았던 유일한 제자.

후기지수 시절 자신의 별호까지 물려받은 자식과도 같은 아이의 손이 한 소년의 가슴팍에 얹어져 있었다.

아직 지학도 되지 않은 어린 소년의 옷은 거칠게 찢어져 있었고 소년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헌데 조금 늦으신 것 같습니다.]

제자의 손이 가슴팍에서 배꼽 부위로 내려갔다.

제자의 얼굴에 광소가 피어올랐다.

-콰직!!

소년이 절규했다.

고통, 분노, 허무, 배신감이 담긴 비명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제자의 손에 막혀 사그라들었다.

-지끈지끈

지금까지 수백 번도 더 본 장면이다.

정작 실제로는 본 적 없는 장면이지만 의식 속에서는 선명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전부 내 업보다..'

제자 교육을 더 잘 시켰더라면.

그녀가 이상할 정도로 단유성이라는 소년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진작에 알아차렸더라면.

한 소년의 인생을 망치지 않을 수 있었을텐데.

그저 제자가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 모습이 기특하고 보기 좋아서 방관해버렸다.

알아차리려면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다름 아닌 자신의 제자니까.

"후우.."

벌써 10년도 더 전에 있던 일이다.

그때 그 소년이 만약 아직 까지 살아 있다면 이미 건장한 성인이 되었겠지.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연약한 몸으로, 그나마 익힌 무공까지 전부 잃고 망가진 몸으로 혼자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중원은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아아.. 이제 그 아이는 바깥 세상에서 힘겹게 살아가겠죠. 저를 유혹했던 것처럼 다른 여인들을 유혹하고 그들의 마음과 재산을 착취하면서 보내겠죠.]

"우욱.."

그 밝고 순수한 소년이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만약 하더라도 정말 어쩔 수 없이, 강제로 당하는 것일 거다.

그리고 만약에, 정말 만약에 어떻게든 상처를 딛고 일어난다고 해도

[그래도 그가 앞으로 어떤 여인을 만나더라도 저를 잊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정상적인 삶을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정도의 상처를 입었으니까.

그러니 이런 심마를 달고 사는 것도 다른 사람을 탓할 수는 없었다.

전부 나의 잘못이고, 내가 평생 지고 다녀야 할 책임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대로 심마에 가로막혀 벽을 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인물이 손님에게서 소중한 무언가를 앗아갈 것입니다.]

그 점쟁이의 말을 무조건 신뢰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세간에 떠도는 소문을 보면 그가 천기를 읽는데 꽤 재주가 있음은 분명해 보였으니까.

"어떻게 해야.."

언젠가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천마를 생각하면 한시라도 빨리 벽을 넘어야 한다.

하지만 심마에 가로 막혀 이대로는 전혀 벽을 넘을 길이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위험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조급해 하지 말자.'

무리하게 서둘러 답을 내려고 했다간 오히려 모든 일을 그르칠 수 있다.

가끔은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며 안식도 취해야 답을 찾을 수 있다.

-부스럭

때마침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들어와라."

"실례하겠습니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온 여인의 손에는 편지로 보이는 종이가 들려있었다.

"그건 무엇이냐?"

"찾으시던 소년으로 보이는 인물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참 공교로운 순간에 왔구나."

10년 전에는 눈이 거의 돌아가서 어떻게든 그 소년을 찾아오라고 난리를 피웠던 적이 있었다.

화산에서도 다름 아닌 검후의 요구였기에 조금 불만이 있어 보이는 기색이기는 했지만 성실히 그 소년의 흔적을 찾아주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중간에 하늘로 솟기라도 했는지 흔적은 보이더라도 전혀 소년 본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간간히 단유성으로 보이는 남자를 발견했다는 소식은 전해졌지만 직접 찾아가 보더라도 전부 다른 인물이었다.

그래도 소식이 전해졌다면 가만히 앉아있을 수는 없다.

"오랜만에 세상 구경을 좀 하겠구나."

다름 아닌 나의 잘못으로 인생을 망쳐버린 소년이었기에

찾아가서 사과를 한다면 그건 나 자신이 직접 해야 할 일이었다.

사실 반쯤 포기하고 있기도 하다.

지금까지 이랬던 적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안휘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온전히 그 시간을 낭비하는 것 또한 아니다.

마침 심마를 극복할 방법을 찾는 중이기도 했고 오랜만의 세상 구경은 그 실마리가 될 수 있었다.

'젊은 시절이 생각나는구나.'

검화라고 불리던 시절에는 정체를 숨기고 세상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돕고 도적들을 소탕하고 교화하는 일을 즐겨하곤 했었다.

이제는 어깨에 올려둔 짐이 너무 많아 함부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잠시 옛 추억을 살려보는 것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그러면 마차를 준비하겠.."

"아니, 됐다. 마차보다는 몸을 가릴 수 있는 피풍의와 적당한 위장 신분 정도만 준비해주면 좋겠구나. 나머지는 알아서 할테니."

"..알겠습니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 말이었지만 여인은 전혀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다름 아닌 검후가 사고를 당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으니까.

반대로 일으킬 거란 생각도.

* * *

"소저, 혹시 어제 잠을 못 잤습니까? 눈가가 많이 거뭇한것이 통 한숨도 못 주무신 것 같은 몰골입니다만."

"..쉽게 진정이 안되더라고요.. 하면 할수록 계속 달아올라서 결국 밤을 새서야 겨우.."

아무래도 당아영은 밤새 수련을 한 모양이었다.

"혹시 근처에 괜찮은 침구 상인 있나요? 당장 오늘 덮고 잘 게 없어서.."

땀도 정말 많이 났나 보다.

'섬서 밖으로 나가보는 게 얼마 만인지..'

나이는 먹었지만 몸은 전혀 나이를 먹지 않아서 그런지 약간이지만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차를 얻어 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목적지가 같은 상인들을 찾은 뒤에 혹시 자리 남냐고 물어본 뒤에 검기만 보여줘도 바로 얻어 탈 수 있다.

지금이야 적당히 절정 수준의 검기로 조절해서 내보냈지만 절정 고수도 흔한 건 아니다. 평생 그 문턱도 못 밟아보는 무인도 세상엔 넘치고 넘치니까.

상인들로서는 마차 안에 자리 하나를 내주는 것으로 상행의 안전을 얻고 고수와 안면까지 틀 수 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은 거래이다.

'안휘로 바로 가는 게 아니라 하남에서 며칠 있다가 가는 건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기왕 명분을 가지고 세상에 나온 거 조금 느긋하게 즐겨도 되지 않겠는가.

"도사님..? 그러면 이제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위험할 때만 얘기할 테니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지내세요."

"아이고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아무튼 이제 출발.."

"저기요!! 잠시만요!!!"

다급한 목소리가 상인의 말을 끊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였다.

"헥.. 헥.. 잠시만.. 지금.. 숨이.."

목소리의 주인은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자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었는지 생각해 낼 수 있었다.

'무면금귀?'

피풍의로 온몸을 감싸고 기묘하게 모자 안쪽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는 섬서의 유명인이었다.

"헥.. 여기.. 마차가.. 자리가.. 헥.. 있다고 들어서.."

"자리가.. 남은 게 있긴 하지만.. 그게.."

상인이 내 눈치를 살폈다.

무면금귀가 혹시 거절 당할까 두려운 건지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돈은 낼 테니까.. 어떻게 안되겠습니까? 원래 약속했던 상인이 갑자기 마차가 망가졌다 그래서 일정이 지금.."

그는 정말 급하게 뛰어왔는지 마차 벽을 붙잡고 심장을 두드렸다.

"아는 사람입니다. 수락하셔도 됩니다."

"아, 아는 사이셨습니까? 아이고 진작에 말을 하시지.. 어차피 자리도 남겠다 그냥 타시죠. 돈은 필요 없습니다."

"네..?"

무면금귀가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마차에 올라타더니 나와 마주쳤다.

"엇, 혹시 몇 주 전에 오셨던 손님분 이십니까?"

"오랜만이네."

"이야 설마 여기서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네요. 소저는 어디까지 가십니까? 이 마차가 호남에서 며칠 있다가 안휘로 간다고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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