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얼굴이 궁금했나?
"언젠가 보여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갔다 와서도 언제든지.."
"언제 돌아올 줄 알고요."
"..."
"가기 전에 보여주고 가요. 오늘."
당아영이 다가와 내가 앉은 의자를 붙잡았다.
이대로 도망가게 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연히 드러나는 모습에 속으로 고민을 시작했다.
'진짜 드러내도 되나.'
[얼굴을 드러내지 말거라. 나중에 그 얼굴 때문에 큰 화를 입을 운명이니.]
스승님의 예언.
그리고 거울에서 봤던 내 얼굴의 솔직한 심정을 더해보면
아마 처음 강호에 나올 때부터 얼굴을 드러내고 나왔으면 섬서까지 오지도 못했을지도 모른다.
중간에 납치당해서 팔려나가지 않았을까 싶은 그런 외모였다.
어디 좋은 집안 귀공자인줄 알고 납치해서 몸값을 뜯어내려 들지 않을까 싶은 그런 외모.
'뭐, 당아영이 그런 짓을 저지르지는 않겠지.'
이미 당아영의 집안이 중원에서 제일 좋은 집안 중 하나인데 그런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거다.
다만 다른 걱정되는 거라면
"..믿어도 되죠?"
얼굴을 보고 당아영의 태도가 지금과 달라질 것과 그녀가 다른데 말하고 다니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것이다.
"어디 가서 말하면 안돼요?"
"무슨 일이 있어도 말 안 할게요."
"하아.."
그래.
당아영 정도면 믿을 만 하겠지.
설마 지금까지 알고 지낸 게 있는데 얼굴 좀 보여준다고 관계가 그렇게 쉽게 바뀔까.
그냥 귀여운 동생 보는 심정일 거다.
외형만 그럴 뿐이지 내용물은 완전 성인이라 어차피 어리게 느껴지지도 않을 거고.
"어디 둘만 있는 데로 가요."
"...네?"
"뭐가요. 사람들 많은 데서 보여줄 수는 없잖아요. 주변에 다른 사람이 절대 없는 그런 곳 없어요? 저도 집 없어서 객잔에서 자는데."
".....후으으.."
당아영이 묘하게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
고민할 때 내는 소리가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저기.. 그러면.. 제 집으로 갈까요?"
"소저 섬서에 집도 있었습니까?"
"원래 잘 쓰지는 않는데.. 있긴 있어요."
"그러면 좋네요. 거기로 가죠."
-부들부들
당아영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 그러면 갈게요. 저희 집 맞죠? 당신이 온다고 한 거예요?"
왜 귀찮게 여러 번 확인할까.
계속 답답하게 구는 당아영의 손을 잡았다.
"어느 쪽이에요. 밤도 늦었는데 빨리 가야죠."
나는 빨리 보여주고 돌아가서 인삼주를 깔 생각이었기에 굉장히 바쁜 몸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계속 굼뜨게 구는 당아영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밤..."
오늘따라 당아영의 목소리가 묘하게 무섭게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
.
.
당아영의 집은 생각보다 좋은 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혼자 사는 집인데 이렇게 클 줄이야.
"아무래도 수련하려면 각종 시설이 많이 필요하니까요. 독도 연구해야하고.. 수련도 해야하고.."
평소에는 안 쓴다는 말이 이해가 됐다.
이렇게 큰 집을 혼자 쓰려면 나 같아도 부담스러워서 못쓰겠다.
"문 제대로 다 닫았죠?"
"..네."
집안의 문이 전부 닫힌 것을 확인한 뒤에 망토 모자에 손을 올렸다.
-두근두근
망토를 산 뒤로 거의 계속 감추고 다니던 얼굴을 남에게 보여준다는 상황에 절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스승님이 얼굴을 가리고 다니라고 했는데 과연 그 말을 무시해도 될까 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솟아 올랐다.
마지막 선택의 기로였다.
이대로 모자를 내리고 얼굴을 드러내..
-
사각사
각
당아영을 믿고 얼굴을 드러내기로 했다.
-스륵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가리고 있던 모자가 내려가며 그 힘을 잃었고 내 얼굴이 바깥으로 드러났다.
당아영은 내 얼굴을 보곤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됐어요?"
개인적으로 오래 드러내고 싶지 않은 얼굴이다.
잘생기고 귀여운 건 인정 하지만 다 큰 성인의 몸과 얼굴이라기에는 좀 그랬으니까.
하물며 이런 피와 철의 대지에서 얕보였다가 어떤 꼴을 당하는지 알고 있는 입장에서 이런 유약해 보이는 외모를 함부로 드러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아.."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요? 사람 얼굴 처음 봐요?"
넋이 나가있는 당아영을 보고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다시 모자에 손을 올렸다.
"약속대로 보여줬으니까 가볼게요. 빨리 술 맛을 좀 보고 싶거든요."
아직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당아영을 뒤로 하고 문 쪽으로 몸을 돌렸..
-쿵!
'..어?'
내가 무슨 일을 당한 건지 파악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시야가 급격하게 변해 지금 바닥이 보이고 있었고 무릎과 배 쪽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등 쪽에서 느껴지는 무게감.
"소저..?"
당아영이 나를 밀어 넘어뜨렸다는 걸 깨다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 갑자기 이게 무슨.."
"..왜 도망가려고 해요?"
"도망이라니 그건 또 무슨.."
"가려고 했잖아요. 혼자."
당아영의 상태가 이상했다.
평소의 상냥한 모습의 그녀가 아니었다.
"잔뜩 먼저 유혹해 놓고.. 이렇게 달아오르게 해놓고.. 혼자 도망가면 저는 어떻게 하라고요? 네?"
고개를 움직여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눈 속에 피어오르는 욕망의 불길이 느껴졌다.
억누르고 억누르던 폭탄이 터진 것 같은 강렬한 불길.
그제서야 지금 그녀가 품고 있는 욕망의 종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성욕..'
거칠어진 숨소리, 옷 위로 내 몸을 더듬고 있는 손길, 그리고 화산과도 같은 열기를 품고 있는 두 눈동자까지.
나는 맹수 앞에 선 초식동물처럼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입이 열린 까닭은 아마 내 본능이 경고해준 덕분이리라.
이대로면 큰일 난다고.
"제가 무슨 유혹을 했는데요.."
"하루 종일 지켜 달라고 하고. 남한테는 안 보여준 몸까지 보여주고. 저밖에 없다고. 사랑한다고. 그렇게 말했잖아요. 당신의 입으로."
"그건.. 농담이잖아요."
"농담?? 농담????"
"히익.."
갑자기 당아영의 얼굴이 확 다가왔다.
"당신이 알아요? 당신의 그 한마디 한마디에 제 심장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제 머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죽을 노릇이에요. 당신의 그 간사한 혀에서 나오는 유혹의 말을 들을 때마다 반응하는 제 마음을 주체하느라 매일매일이 고난이라고요. 그런데 농담이요?"
"소, 소저.. 지금 많이 흥분한 것 같은데 조금만 진정.."
"제가 진정하게 생겼어요? 당장 오늘만 해도 당신이 저를 얼마나 유혹했는데요. 그렇게 얼굴 좀 보여 달라고 해도 안 보여주다가 보여줄 테니까 아무도 없는 곳으로 데려가 달라는데 그게 유혹이 아니면 뭐냐고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 내 말과 행동이 저런 식으로 다가왔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렇게 유혹해 놓고 이런 몸에 이런 얼굴이면.. 저보고 어떻게 참으라는 거냐고요.."
당아영의 손이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피부를 통해서 느껴지는 그녀의 뜨거운 욕망에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자, 잠깐만요. 할 말이 있어요."
그러나 여기서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
저 욕망으로 가득 찬 눈빛을 봐라.
절대 내가 오늘 하룻밤 정도로 받아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리고 오늘 일을 저지르면?
한 번 저질렀는데 두 번이라고 못할까?
'..어떻게든 막아야 해.'
지금이야 감정이 폭발했다고 하더라도 이 이후의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최악의 경우엔 아예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게 될지도 모른다.
간신히 머리를 돌려서 이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수를 생각해냈고 그것을 입으로 내뱉었다.
"사실 제가 이미 사귀고 있는 여인이 있어서 이런 짓은.."
그것이 최악의 악수임을 깨닫지 못하고.
* * *
이상한 피풍의를 내리고 얼굴을 드러낸 그의 모습은 감히 말로 표현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나마 아는 문자를 빌려서 사용한다면..
'경국지색.'
이 외모에는 이 단어가 아깝지 않다.
만일 황실의 고위 관료가 여자들로 채워져 있었다면 이 남자의 외모는 정말 나라를 흔들 수 있을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나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한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그렇게 유혹을 당했는데 저런 얼굴까지 본다면 설령 도를 닦는 도사라고 할지라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다 그가 잘못한 거다.
나를 유혹한 그가 나쁜 거다.
이렇게 야하게 생긴 그가 나쁜 거다.
'하아.. 하아..'
설마 첫경험을 겁탈. 그것도 내가 하는 쪽으로 하게 될거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미 겁탈하는 시점에서 그럴 자격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나쁜 경험을 시켜주고 싶진 않았다.
남자로 태어난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반쯤 농담이었고
그에게도 나에게도 첫경험일텐데 벌써부터 그런 기억을 새겨주고 싶진 않았다.
혹시라도(?) 이런 일이 있을 까봐 가지고 다니던 약도 있었다.
아마 이 정도 약이면 서로 부담 없이 쾌락만 즐길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사실 제가 이미 사귀고 있는 여인이 있어서 이런 짓은.."
-뚝
저 말을 듣기 전까지.
"...하."
이미 여인이 있다고?
이제 와서?
"하하.."
그렇게 유혹해 놓고.
그렇게 설레게 해 놓고.
그렇게 수줍게 얼굴까지 보여줘 놓고.
"하하하핫..!"
이제 와서?
"농담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