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250)

분명 힘이 없다고 들었는데 저 답답하다는 목소리를 들으니 힘이 넘쳐 보였다.

"하아.. 하아.. 진짜.."

그러나 금방 머리를 부여잡는 걸 보면 정말 힘이 없는 게 맞는 모양이었다.

"당신 진짜 얼굴 보여준다는 약속 안 지키기만 해봐요. 당문 여자가 한을 품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드릴 테니까."

"..언젠가 보여준다니까요. 그리고 붕대 말고 옷으로라도 좀 가리세요."

애써 당아영의 살결에서 눈을 돌려 널부러져 있는 그녀의 옷을 주웠다.

"진짜.. 남자로 태어난 걸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야.."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목소리가 작아서 못 들었는데."

"흥, 혼잣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요."

딱히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겠지.

"그래서.. 제가 약을 발라드리면 됩니까?"

"그리고 붕대도 좀 감아주세요."

붕대라.

그러고 보니 이쪽 세계에는 브래지어가 없었지.

스승님을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불편해 보이셔서 아이디어만 전달해 줬더니 알아서 만드시고 잘 차고 다니셔서 잊고 있었다.

그나저나 붕대로 감으면 아프지 않..

'..원래 이렇게 컸나?'

붕대의 압박을 벗어난 당아영의 가슴은 굉장했다.

여전히 스승님이 약간 우위지만 거의 견줄만한 크기.

한 손으로 감싸기에는 어림도 없어 보였다.

보기만 해도 묵직함이 느껴질 정도.

"..안 답답했습니까?"

나도 모르게 저렇게 물어봐 버렸다.

그 정도로 압축률(?)이 대단했다.

"답답하죠. 그런데 어쩌겠어요. 이렇게 안 묶으면 얼마나 불편한데요. 수련할 때나 싸울 때나 정말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고.. 특히 잘 때 엎드리면 숨이 막혀서.."

그러고 보니 스승님한테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 사람은 잘 때..

'...'

그 사람은 잘 때 엎드릴 일이 없으니 관련 없는 내용이었나 보다.

숨은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막혔고.

* * *

당아영은 낑낑대며 뒤쪽에서 붕대를 감아주고 있는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참 신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이 사람도 쑥맥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 마음에 폭탄을 계속 던지는 모습을 보면서 보통 내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혹시 저거 순진한 척만 하고 사실은 안에 능구렁이가 들어있는 거 아닐까.

그 작고 여리고 야한 몸으로 이미 즐길 거 다 즐기고 다닌 몸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얏."

"아, 아픕니까?"

"아뇨. 괜찮아요."

이렇게 어리숙한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그냥 정말 순진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여자 경험도 없어 보이고.'

그동안 은근히 유혹을 해도 별 반응이 없길래 더욱 의심했던 면도 있었지만 이 모습을 보니 알겠다.

분명 동정이다.

이렇게 수위가 높아지니 금방 금방 반응하는 모습을 보니 그동안 반응이 없던 건 아마 그냥 눈치가 없던 것이리라.

처음 인원 편성에서 여자를 뺐을 때 딱히 이런 걸 노리고 한 짓은 아니었지만 예상치 못한 부수입을 얻었다.

'앞으로도 이대로만 가면..'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시간은 많다.

어차피 계속 섬서에 머무르는 한 앞으로도 자주 마주칠 거고 이런 식으로 천천히 접촉(?)시켜서 함락 시키면..

-핥짝

곧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다.

관건은 얼굴이다.

대체 얼마나 맛있.. 아니 멋있게 생겼길래 저렇게 감추고 다닌단 말인가.

본인 말로는 엄청 못생겼다고 하는데 몸이 그렇게 야한데 얼굴이 별로 일리가 없다.

아니, 정말 못생긴 게 그에겐 오히려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망토를 벗고 얼굴을 드러냈을 때 저 야한 몸에 어울리는 얼굴이 나온다면

그땐 나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무사히 일정을 마치고 섬서로 돌아온 뒤, 천천히 여행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가능하면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처럼 이름 있는 정파 세력이 있는 지역이 안전하다.

'하남.. 호북.. 청해.. 사천.. 안휘..'

내심 곤륜산을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저쪽은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그래도 속세에 물든 면이 어느 정도 있는 화산파랑 다르게 저쪽은 진짜 산 속에서 수련하는 도사들이라 천기를 이용하는 요술로 돈벌이를 하는 모습을 좋아하진 않을 테니까.

물론 시비 거는 화산파 도사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 어리거나 젊은 사람들이었지 정말 높은 사람들은 별 말 없었다.

근데 곤륜은 진짜 아니다.

진짜 무섭다.

산 한번 보자고 그런 위험한(?) 장소로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

비슷한 이유로 무당파도 최대한 피해가야 한다.

'사천.. 아니면 안휘랑 하남..'

섬서에서 안휘까지 가려면 어차피 하남을 지나가야 하니 아예 하나의 선택지로 생각하고 고르는 게 좋겠다.

사천이냐, 안휘+하남이냐.

'그러고 보니 사천이면 사천당가가 있는 쪽이지?'

당아영의 소속이니 만약 저쪽으로 간다고 하면 당아영한테 도움도 받을 수 있을 거다.

시기를 잘 잡으면 같이 갈 수도 있을 거고.

그러면 기왕 아는 사람이 있는 사천 쪽..

'..뭐지 이 불길한 기운은.'

위치를 결정하려는 순간 매우 불길한 기운이 들었다.

점을 보지도 않았는데 왠지 저쪽으로 가면 인생이 끝날 것 같은 기분.

'천지신명님 혹시 방금 뭐라도 주셨어요?'

당연하지만 우리의 고고하신 하늘께서는 딱히 이런 식으로 계시를 주시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런 적도 한번도 없었고.

그러니까 이번 것도 순전히 내 감이라는 소린데..

'음..'

내 미래는 못 보지만 그래도 미래를 보는 점쟁이인데 감을 믿어볼 만하지 않을까.

'그래. 호남이랑 안휘로.'

당아영한테는 미안하지만 내 감이 저쪽으로 가면 큰일 난다고 하는데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나중에 같이 가자고 한번 해보면 되겠지.

* * *

평소처럼 장사를 하는 건 그대로였지만 노름을 줄여서 돈을 조금씩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2주가 지나자 드디어 기다리던 물건이 도착했다.

"자, 20년 묵은 삼으로 달인 술이에요. 더 많이 받아내 보려 했는데 더 가져갈려면 자기를 죽이고 가져가라길래 이 정도가 한계네요."

"오오오오.."

커다란 유리에 담겨 영롱한 황금빛을 내뿜고 있는 인삼주가 눈앞에 있었다.

나는 구하려고 해도 못 구하는 물건이다. 이미 예약이 꽉 차 있는 모양이라.

산삼은 이쪽 동네에서는 거의 영약이라 감히 손도 못 대는 걸 생각해보면 내 입장에서는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술 중 하나다.

가격만 따지면 오히려 금 10냥보다 이쪽이 더 가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걸 어떻게 구했어요?"

"흐흥, 제대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가져온 거라고요?"

아무리 봐도 순순히 내주지 않을 물건이지만 물리적인 폭력만 없으면 평화다.

"뭐 보니까 술 종류도 엄청 많던데요? 술은 마셔야지 그렇게 쌓아두고 만 있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이 술도 마셔주길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 토벌대 대장이 들으면 피눈물을 흘릴 말이었지만 내 입장에선 알 바 아니었다.

"그리고 흡혈귀에 대한 조사 결과도 나왔어요. 궁금하세요?"

"그냥 사술을 익힌 괴인 아니었습니까?"

"저희도 그런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얽힌 게 많더라고요. 조금 충격적인 결과기도 하고."

"뭐 설마 진짜 혈교랑 관련 있기라도 합니까?"

술에 정신 팔려 정말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지만

"..아마 그런 거 같아요."

..진짜였다.

.

.

.

"..강시요?"

"네. 확인한 결과 이번 흡혈귀 사태에서 파악된 흡혈귀들은 전부 이미 죽은 인물로 확인됐어요.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 전까지."

내가 아는 강시는 다리를 모으고 팔을 뻗은 채로 통통 튀어 다니는 좀비 비슷한 거였는데 이 세상에선 조금 다른 의미였나 보다.

사실상 언데드를 가리키는 단어라고 보면 거의 비슷한 것 같은데..

'피를 빨고.. 손톱이 길고.. 죽었다가 부활?'

이거 거의 뱀파이어 아닌가?

태양빛에 타 죽지만 않았을 뿐이지 거의 뱀파이언데?

마늘이라도 들고 갈 걸 그랬었나?

'..에이. 아니겠지.'

무림에 뱀파이어가 왜 있단 말인가.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게 나을 거다.

"뭐, 그래서 지금 무림맹에서는 난리가 났다고 하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더 높으신 분들만 알고 계신 이야기라서 저도 모르겠네요."

"소저도 모릅니까?"

"제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지만 그래봤자 후기지수 수준에서예요. 제가 낄 데가 아니에요."

당아영이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혈교에 대한 일을 그만큼 무림맹에서 신경 쓰고 있다는 이야기겠지.

'나중에 걔네가 사고만 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참고로 나는 중원이 전쟁에 휩싸이면 바로 산으로 튈 거다.

지루하긴 하겠지만 죽을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사는 것보단 낫겠지.

그때쯤엔 스승님도 있을 테니 적어도 혼자는 아닐 거고.

-스륵

술은 고이 모셔두고 여행책자를 꺼내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안휘성에서 유명한 장소 같은 걸 정리해 놓은 책인데 일단 이 책에 나오는 장소는 최대한 다 가볼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그 책 자주 읽네요? 안휘성에 관심 있어요?"

아 그러고 보니 내가 말을 안 했구나.

"저 당분간 여행 갑니다."

"..."

"소저?"

"..어딜 간다고요?"

당아영의 목소리가 묘하게 차갑게 느껴졌다.

"여행이요. 그동안 섬서에서 꽤 오래 지낸 것 같아서 기분 전환 좀 할 겸 놀러 안휘까지 가볼 생각입니다. 하남을 통해서요."

"여행.."

"최근에 돈도 많이 벌었는데 매일 똑같이 술이랑 노름만으로 날리기엔 아깝게 느껴져서요."

"..."

"왜 말이 없으십니까 소저?"

"언제요?"

당아영의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평소의 당아영이랑 명백히 다른 분위기.

"준비가 거의 다 끝나가서 곧 떠날 것 같습니다. 앞으로 며칠 안에요."

"...그러면 얼굴은요?"

"..."

왜 저렇게 분위기가 심각해지나 했더니 얼굴 때문이었구나.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