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직!
"끄아아악!!"
당아영의 발이 흡혈귀의 안면에 적중했다.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콰직!
다시 한번.
-콰직!!
다시 한번.
-콱! 콰득! 콰드득!
당아영이 흡혈귀를 계속해서 짓밟았다.
화가 쉽게 풀리지 않는 듯 여기까지 그녀의 분노가 느껴졌다.
"..조금 심하군. 말리러 가야겠어."
"심하다고요..?"
"생포한 채로 데려가야 보수가 더 높거든."
"..아."
그쪽으로 심하단 뜻이었구나.
나는 혹시라도 흡혈귀가 일어날 때를 대비해 사내의 뒤에서 당아영을 향해 다가갔다.
-홱!
당아영이 기척을 느꼈는지 이쪽을 바라봤지만
-오싹
나는 그녀의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얼굴을 보고 몸이 그대로 얼어 붙었..
-활짝
"아, 무사했어요?"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화사하게 바뀌었다.
"어..?"
"어디 다친 데는 없죠? 아까 조금 차갑게 굴어서 미안해요. 그때는 정말 급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아니.. 방금.."
"방금이요? 아. 흡혈귀가 왜 이러냐고요? 독인이라고 당문에서는 어릴 때부터 독을 먹여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평소의 밝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보며 그냥 내가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당아영이 그렇게 살벌한 표정을 지을 리가 없다.
아마 힘겨운 싸움을 이어나가서 얼굴 근육이 경직됐던 것이리라.
"..소저는 괜찮습니까?"
"괜찮..다고 말하고 싶지만.. 저도 이제 서있을 힘도 없어서.."
비틀거리는 그녀를 보며 서둘러 그녀에게 달려갔다.
-포옥
다행히 그녀가 쓰러지기 전에 받아낼 수 있었다.
'..아니 근데 지금 이렇게 쓰러지면 어떡하지?'
뒤처리는?
이제 저 흡혈귀를 데리고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
"어.."
"뒤처리는 내가 할 테니 그쪽은 소저를 데리고 마차로 돌아가시오. 많이 지친 모양이니."
"..혼자서 할 수 있습니까?"
사내가 주머니에서 엄청 두꺼워 보이는 밧줄을 꺼냈다.
"무림맹에서 지원해준 물건이오. 한번 묶기만 하면 절정 고수의 힘에도 끄떡 없다고 하오."
'무슨 밧줄이 내 팔뚝보다 두껍지.'
사내를 뒤로 하고 내게 거의 몸을 기대고 있다시피 하는 당아영을 부축하며 마차로 향했다.
"저기요.."
"왜 그러십니까 소저?"
"저 진짜 열심히 했는데.. 잠깐만 이라도 좋으니까 소저 말고 이름으로 불러주시면 안될까요?"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렵지 않은 요구였다.
"아영아?"
"아아.."
당아영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뭐랄까, 한이 있던 귀신이 성불할 때 내는 소리 같았다.
그나저나 겨우 이 정도 요구로 끝나다니 생각보다 소박..
"그리고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안돼요..?"
하게 끝나지 않았다.
"뭔데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그녀가 요구할 것도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얼굴 좀 보여주세요.."
역시나였다.
예상 못 할 것도 없었다. 틈만 나면 얼굴 좀 보여 달라고 하는 여자인데 여기서 할 요구가 저것 말고 더 있을까.
"미안하지만 얼굴은 절대.."
평소처럼 대답하려던 순간 아까 흡혈귀를 상대로 혼자 고군분투하던 당아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흡혈귀에게 노려져 죽을뻔했던 나를 구해주기도 한
어찌 보면 생명의 은인.
"..."
"진짜.. 이렇게 했는데도 안 보여주면 대체 뭘 어떻게 해야.."
"보여 줄게요. 나중에."
"..."
순간 당아영의 숨이 멈췄다.
"지, 진짜요?"
"당장 보여준다는 거 아니에요. 나중에. 진짜 나중에 보여줄 거예요."
"어, 어쨌든 언젠가 보여준다는 거죠?"
"네, 네."
스승님의 말을 잊은 것은 아니었지만
뭔가
이 여자라면 믿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당아영을 마차 안까지 데려오고 마차 안에 있는 짐을 뒤져보고 있었다.
싸우러 오면서 약을 가지고 오는 건 당연한 상식이다.
"소저, 혹시 약 어디에 뒀는지 아십니까?"
"아, 제가 가지고 온 보따리 안에.... 잠시만요. 제가 찾을게요."
"다친 몸 아닙니까. 그냥 어디 있는 지만 말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
"안돼요!!"
당아영이 필사적인 표정으로 나를 밀어내길래 소중한 물건이라도 있나 보다 했다.
원래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보여주지 못할 물건은 있는 법이니까.
당아영이 약을 찾았길래 편하게 바를 수 있도록 마차 밖으로 나갔다.
크게 돋보이는 상처가 팔에 난 상처인 거지 근접전을 벌이면서 몸에 크고 작은 상처가 많이 생겼을 거다.
실제로도 그녀의 옷에 뚫린 구멍 때문에 정면에서 보면 여러모로 낯뜨거운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 상황이었다.
여분의 옷 정도는 챙겨왔을 테니 그녀가 약을 바르고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들어가면 되겠지.
마차 밖에 나와 안면이 거의 뭉개지다시피 한 흡혈귀를 구속하고 있는 사내를 보고 있자 아까 흡혈귀에게 검을 잃고 발길질로 날아갔던 사내가 뻘쭘하게 합류하는 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저 남자도 있었구나.'
내 처지가 처지라 완전히 잊고 있었다.
흡혈귀의 손톱에 몸을 꿰뚫렸던 사내는..
'성불하시길.'
잠시 묵념을 빌어주었다.
뒤처리를 하기 바쁜 사내들을 보며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술과 돈에 눈이 멀어서 이번엔 참여하긴 했었지만 이번 일이 끝나면 생각을 조금 고칠 필요가 있었다.
내가 뭘 하러 도망까지 쳐가면서 산 밖으로 나왔을까.
놀려고 나온 것 아니던가.
더 많은 풍류를, 더 많은 쾌락을.
그걸 위해서 위험까지 감수해가며 토벌대에 참여한 것 아니던가.
'금 10냥..'
충분히 큰 돈이다.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의 금액이다. 내 매출로 따지면 한 달은 안 쓰고 모아야 하는 정도의 금액이고 대부분의 서민들이 살면서 이 정도로 돈을 모을 수 없을 정도로 큰 금액이다.
상점창에 넣어서 포인트로 바꿀 수도 있겠지만 한번 넣으면 돌려주지 않는 만큼 그건 조금 생각해 봐야 하고.
그러면 이 돈으로 뭘 해야 할까.
'당연히 놀아야지.'
목숨까지 걸어가면서 번 돈이다.
노는데 쓰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면 뭘 하고?
또 지난 반년처럼 술이랑 노름판에서 전부 탕진하기는 너무 아깝지 않나?
목숨까지 걸어가면서 번 돈을?
'..앞으로 2년에서 2년 반.'
내게 앞으로 남은 시간이다.
저것도 최대로 잡은 거지 스승님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만큼 조금 더 일찍 돌아가야 할 가능성도 생각해둬야 한다.
평소 관심 가지던 놀거리를 생각하다가 이내 한 가지에서 생각이 멈춰 섰다.
'여행.'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섬서에서는 충분히 논 것 같다.
확실히 유동인구도 많고 치안도 좋은 만큼 장사하기엔 딱 좋은 장소였지만 내 목표가 장사하면서 먹고 사는 게 아니었다.
한정된 시간 동안 최대한 속세의 놀 거리 들을 즐기다 스승님에게 돌아가는 것.
그러기 위해선 슬슬 섬서를 떠날 시기가 온 것 같다.
명성이 다른 지역까지도 퍼졌다니까 아무데서나 돗자리를 깔아도 적당히 장사는 될 것 같고 금화 10냥을 여행 자금으로 쓰면 즐길 거리도 충분히 즐길 수 있으리라.
내가 평소에 돈을 너무 물 쓰듯 써서 그렇지 노름만 줄여도 쓰는 돈은 확 줄어든다.
술은 못 줄인다.
차라리 다른 걸 아끼면 아꼈지 술에는 돈을 못 아낀다.
'아, 혹시 모르니까 무사도 고용하자.'
가능하면 안전한 지역만 찾아다닐 에정이지만 혹시 모르는 세상이니까.
일류라면 모를까 삼류나 이류 무사 정도는 돈만 있으면 금방 구할 수 있을 거다.
'그래도 당장 떠나는 건 무리겠고.. 준비 하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지.'
돌아가고 나면 일단 여행 계획을 세우리라고 다짐하고 있던 중 마차 안에서 당아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왜 부르십니까?"
"좀 도와줘요."
'손이 잘 안 닿나?'
약을 바르는데 문제가 있나 싶어 가림막을 치우고 마차 안으로 들어오자
"왜 그런 몰골입니까?!"
"..."
당아영이 얼굴을 잔뜩 붉힌 채로 선정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상의는 벗은 상태였고 상체를 가리고 있는 건 가슴을 가리고 있는 붕대 뿐이었다.
그 외에 배, 겨드랑이, 팔 등 다른 상체 부위는 전부 맨몸 그 자체였고 가슴을 가리고 있는 붕대마저도 제대로 압박을 하지 못하고 흘러내리기 직전이라..
"빠, 빨리 옷부터 입으세요. 이번 건 소저가 불러서 일어난 일이니까 나중에 책임이니 뭐니 그러시면 안.."
"자, 잠깐만요! 진짜 도움이 필요해서 그래요!"
"손 뻗지 마요! 붕대 떨어지니까!"
나는 일단 눈을 가리고 당아영의 변명(?)을 듣기로 했다.
다른 부위에는 다 발랐는데 등까지는 혼자서 약을 바를 수가 없었고
그래도 일행 중에 여자가 없는 만큼 혼자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는데 그 과정에서 붕대가 찢어졌다고.
설상가상으로 몸에 기운이 다 빠져서 붕대를 감을 힘도 없다고.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외간 남정네를.."
"당신이라면 괜찮아요."
"..소저. 그렇게 말하면 보통 사람들은 오해합니다."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당아영이 굉장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와 내가 저 말을 누구한테 듣는.."
"..제가 평소에 무슨 말을 했습니까?"
"..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