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향해 달려가던 창수 사내도 그 광경을 보고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꿀럭.. 꿀럭..
이 주변에 소리 라고는 흡혈귀의 목에서 나는 소리밖에 없었다.
"푸흐.."
흡혈귀가 식사를 마쳤는지 방금 전까지 들고 있던 사내를 내팽겨 쳐버렸다.
지금까지 본 장면도 이미 충분히 내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거늘.
그 뒤에 펼쳐진 장면은 더했다.
-꿈틀
흡혈귀의 몸이 꿈틀거리더니 당아영이 새겨 놓았던 상처들이 순식간에 아물기 시작했다.
이미 박혀있던 암기는 무력하게 밀려나왔고 밀려나온 자리에는 새 살이 돋아나 있었다.
흡혈귀가 식사를 마치고 다음 사냥감을 찾기 시작했다.
이지(理智) 없는 괴인. 본능을 따를 뿐인 맹수.
그 맹수가 찾은 다음 사냥감은
무리에서 혼자 떨어져 있으며
가장 약하고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무기력하게 떠는 것만 할 수 있는
"아.."
그런 사냥감이었다.
-덜덜덜덜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어서 도망쳐야 하는데.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주, 죽기 싫어..'
죽음의 공포가 눈앞까지 다가왔다.
어째서 중원에 나왔을까.
그냥 산 속에서 스승님이랑 평화롭게 지내던 나날도 나쁘지 않았을텐데.
어째서 이런 위험한 곳에 따라왔을까.
그냥 조용히 점집이나 운영하면서 지내도 됐을텐데.
죽고 싶지 않았다.
더 살고 싶었다.
더 살아서 좀 더 많은 풍류와 쾌락을 즐겨보고 싶었다.
필사적으로 손을 움직여 품 속에 넣어놨던 물건을 꺼내려고 했다.
상점창. 내가 이 빌어먹을 세상에 오면서 가진 유일한 것.
거기서 가진 모든 포인트를 털어서 사온 물건이었지만
-덜덜덜덜
손이 너무 떨려서 그랬을까
이미 내 쪽으로 그 손톱을 들이밀고 있는 흡혈귀가 먼저 도착했다.
흡혈귀가 망토에 감싸여있는 내 심장을 노리고 손톱을 뻗어왔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눈을 감았을 때 눈앞에 보인 건 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
.
.
"하아.. 하아.. 겨우 안 늦었네. 괜찮아요?"
"아..?"
눈 앞에 한 여인의 등이 보였다.
그 가느다란 팔로, 가느다란 손으로 흡혈귀의 손목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소, 소저?"
"무사하면 빨리 그쪽에서 나와 줄래요? 저도 계속 붙잡고 있는 건 무리라.."
당아영이 웃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부들부들
흡혈귀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게 훤히 보이는데도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애써 웃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저도 움직이고 싶은데..!"
그러나 방금 전까지 죽음이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몸은 내 말을 들어주질 않고 있었다.
이대로면 꼼짝 없이 다 죽을 거라고 생각하던 순간
-팍!
"꽉 잡으시오!"
창수 사내가 다시 돌아와 나를 낚아챘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당아영과 흡혈귀로부터 멀어졌다.
그녀가 걱정 되면서도 정작 내가 여기 있어봐야 도움 될 건 아무것도 없다는 현실이 비수가 되어 내 몸을 꿰뚫고 있었다.
"헉.. 헉.. 여기면 조금 안전할 거요."
"..."
사내가 나를 안전하게 내려놨다.
"왜 그렇게 미동도 없소. 어디 다치기라도 한거요?"
"소저는.. 무사 할까요?"
"허, 이 양반이 지금 누굴 걱정하고 있는 건지. 지금 그쪽이 저쪽을 걱정할 처지요? "
초인들의 싸움에 끼어버린 일반인.
그게 지금 내 처지였다.
눈 먼 칼에만 맞아도 목숨이 위험한 상황.
'망할..'
나는 어째서 이런 몸일까.
대체 무슨 죄를 지어서 이 위험한 세상에서 힘 하나 없는 몸으로 깨어났을까.
가진거라곤 외모밖에 없는 주제에 그 외모마저 몸을 지키기 위해선 가리고 다녀야 하는 처지다.
스스로를 지킬 힘 하나 없으니까.
'나도 노력해 봤다고..'
단전이 망가진 채로 무공을 익혀 보려다가 생사의 문턱을 밟았었다.
단전을 회복시킬 수단은 상점까지 동원해가며 찾아봤지만 찾지 못했다.
무공을 못 익혀도 육체라도 단련하자는 생각에 운동도 해보았지만 근육이라곤 전혀 붙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점성술을 배웠다.
상대가 위험한 사람인지, 어디가 위험한 장소인지 알고 그곳을 피해가기 위해서.
결국 선택한 건 도망이었고 회피였다.
그리고 방금 죽음의 공포를 온몸으로 느끼고 깨달았다.
이 세상은 내 생각보다 정말 위험한 곳이라고.
.
.
.
"이제 좀 정신이 드나?"
머릿속을 잠식한 공포 속에서 간신히 고개를 내밀고 현실을 바라봤다.
당아영과 흡혈귀의 싸움에서 솔직히 나는 당아영이 이길 확률이 낮다고 생각했다.
흡혈을 한 뒤로 흡혈귀는 전에 있던 상처를 전부 재생한 데다 우리 쪽은 그 시선을 끌어주던 사람들을 잃었으니까.
그러나 현실은 내 예상 외였다.
"..잘 싸우네요?"
"흔히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있지. 사천당문의 무인과 싸울 때 접근하기만 하면 이길 수 있다고."
당연한 상식이었다.
독과 암기를 주로 다루는 살수가 모습을 드러내고 접근을 허용하면 급격히 약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정말 그랬다면 괜히 당문이 오대세가겠나."
하지만 당아영은 그런 흔한 살수들이 아니었다.
-파악!
당아영의 손바닥이 흡혈귀의 명치를 때렸다.
흡혈귀가 손톱을 휘두르자 어딘가에서 튀어나온 암기가 그의 손가락을 도려냈다.
때론 화려하게 상대의 눈을 속이고 때론 극도로 절제된 움직임으로 상대의 급소를 노린다.
아까처럼 완전히 모습을 감췄을 때의 이점을 살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흡혈귀를 상대로 밀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리고 저 여자가 누군가. 독봉 아닌가. 저번에 열린 후기지수 비무대회에서 2위를 차지했던."
"..준우승까지 한 줄은 몰랐는데."
"점쟁이라는 양반이 생각보다 아는 게 별로 없군."
그나저나 비무대회 준우승이라..
어?
"비무에서는 독이랑 암기를 제대로 못 쓰지 않아요?"
"당연하지. 상대를 죽이려는 목적이 아니니까."
그러면 독이랑 암기를 안 쓰고 2위를 차지한 거라고?
"진짜 대단한 사람이었네.."
그동안 그냥 돈 많고 강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
.
.
.
시간이 지날수록 흡혈귀의 몸에 상처가 늘어갔다.
당아영도 많이 지친 모양이었다.
비록 지금은 전부 피하고 있지만 당아영의 방어력이 칼을 두부 썰듯이 잘라버리는 손톱을 버틸 정도로 높진 않으니 당아영의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시점은 아니었다.
한 대만 허용해도 치명타다.
'천지신명님 듣고 계시면 한번만 도와주시면 안될까요.'
나는 평소와 같이 아무 반응도 없는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당아영이 당하면 우리도 전부 끝장이니 그녀에게 내 목숨이 달려있는 것도 맞았지만
당아영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속세에 나오고 나서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 사람이다.
그동안 쌓인 정도 있고.
마냥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게는 좋은 사람이다.
내가 이 토벌대에 참여한 계기가 당아영이긴 했지만 정당한 대가를 받고 참여한 것이고 수락한 것도 나였으니 당아영의 탓을 할 수는 없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런 기도 외에는 없었다.
이 피와 철의 대지에서, 나는 그저 나약한 점쟁이일 뿐이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점치기도 지금은 도저히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내가 엿볼 하늘의 기록에 당아영의 죽음이 적혀 있을 까봐.
상황이 이렇게 되자 상점창에서 산 물건도 쓸 데가 없었다.
이게 있다고 해도
저 싸움에 끼어들 자신이
나에겐 도저히 없었다.
"크아아아악!!!"
흡혈귀가 당아영을 향해 손톱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당아영이 피할 수 있기를 기도했지만 당아영도 이제 한계인 모양이었다.
-촤악!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옷을 베며 팔에 긴 상처를 남겼다.
심장이 철렁했다.
그러나 이후에 보인 당아영의 반응은 더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콰직!
당아영이 상처가 난 팔을 흡혈귀의 입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단순히 입 안을 공격하기 위함이라기엔 정확히 상처 부위가 입안으로 들어갔다.
'대체 어쩔려고..!'
아까 본 바로는 흡혈귀는 피를 마시면 재생한다.
그런데 도리어 피를 입으로 밀어 넣어주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당아영에게 무슨 수가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불길한 상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푸슉!
팔에 난 상처에서 피가 뿜어져 나와 흡혈귀의 입 안으로 쏟아졌다.
나는 곧 일어날 아까의 그 기괴한 장면을 생각했으나
"크허어어억! 쿠헉!!"
"..어?"
흡혈귀는 재생하기는 커녕 목을 부여잡고 무릎 꿇었다.
못 먹을걸 먹은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