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250)

"아니 자네 옷이 왜 그렇게 흙투성이인가..? 어디 무덤이라도 파해쳤나..?"

무덤..?

죽은 자들이 들어가는 곳..?

내가 그런 곳에 들어..

-지직

"으윽!"

"자, 자네?!"

"나는.. 나는.."

혼란스러운 기억 속.

하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피를 탐하라. 그것이 그대를 죽음이라는 늪 속에서 구원할 것이다.]

"피.. 피를"

"피?! 자네 혹시 출혈이 심한 건가?!"

[자. 그대의 주인이 피를 바란다. 어서 일어나라 어린 죽지 않은 자여. 어서 일어나 이 세상을 피로 물들이는 데에 동참하라.]

"피를.."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곳에 있는 건 더 이상 노인이 아니었다.

먹이.

신선한 먹이.

-콰득!

"으아아아악!! 자네 뭐하는겐가!!!"

-꿀럭! 꿀럭!

살은 필요 없었다.

뼈도 필요 없었다.

그건 다른 자들의 몫.

우리가 탐하는 것은 오직 피 뿐.

-꿀럭! 꿀럭!

오래되긴 했으나 살아있는 신선한 생물의 피가 몸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끄..으.."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노인에겐 피 한 방울 남아있지 않았다.

피가 필요했다.

더 많은 피가. 더 많은 먹이가.

이 세상에 가득 차도록.

내가 마지막으로 봤던 흡혈귀의 위치와 거의 가까워져 가는 무렵.

"점쟁이양반. 영 안되겠소?"

"거의 다 만들어 갑니다.."

-사각사각

나는 열심히 목패를 깎고 있었다.

건(乾) 태(兌) 리(離) 진(震) 손(巽) 감(坎) 간(艮) 곤(坤) 8개 전부 만들어야 하는 작업이라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산 속에 있었을 땐 스승님이 금방 만들어줬는데.'

이런 식으로 천벌 때문에 망가진 건 아니지만 내 실수 때문에 망가트린 적은 은근 많았다.

그때마다 스승님이 금방 만들어줬고.

물론 잔소리와 함께.

[점성술을 배운다는 녀석이 도구를 그렇게 칠칠맞게 흘리고 다니서야 언제쯤 하산할 수 있겠느냐?]

저래 놓고 결국 끝까지 하산 안 시켜 줬다.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탈출했지.

-까각

진작에 데리고 놀러 나와 줬으면 이렇게 폐관수련에 들어간 틈을 타 탈출할 필요도 없었다.

입은 은혜가 있기는 하지만 대신 나도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다 해줬으니까 할 말 많다.

"점쟁이도 참 힘드네요. 남이 도와주지도 못하고 혼자서 만들어야 하다니."

"소저는 천기를 다를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목패를 깎는 동시에 천기를 불어넣어야 하는 작업이라 기본적으로 천기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그 덕분에 스승님은 가볍게 만드시던걸 나는 손재주가 영 좋지 못한 탓에 이렇게 낑낑대며 붙잡고 있는 거고.

이게 그나마 당아영한테 암기를 배우면서 조금 솜씨가 늘어서 이 정도지 옛날엔 혼자 만드려면 미리 여분으로 16장은 준비하고 시작했다.

-탁

"이걸로 끝."

이번엔 다행히 하나밖에 안 부숴 먹었다.

목패 8개 완성이다.

"근데 이거 되게 삐뚤빼뚤한데 괜찮나요?"

"알아볼 수만 있으면 봐주더라고요."

물론 외관 상 보기 좋아야 손님들한테는 더 좋겠지만 적어도 하늘은 이쪽엔 별로 신경 안 쓰신다.

일단 지금은 임시방편으로 이렇게 만들어두고 돌아가면 제대로 좋은 목재로 만들어야겠다.

-묵직

"흠."

역시나 그립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당장이 급한 때였으니까.

"그러면 봅시다.. 흡혈귀의 현재 위치를."

지도를 펼쳐 놓고 대략 현재 위치를 손으로 집은 뒤 목패를 깔았다.

원래 위치가 가까워진 만큼 주기적으로 위치를 확인해봤어야 했는데 알 수 없는 하늘의 농간 때문에 지체됐다.

-스륵

한시가 급하니 쓸데없는 미사여구나 화려한 시각적 효과는 생략하고 천기를 불어넣었다.

목패로 흘러간 천기가 하늘의 기록을 받아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익숙한 감각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하늘이 내려준 위치를 지도에 대입한 뒤 그 위치를 집어보자

"..바로 여ㅍ"

"위험합니다!!"

-콰직!

사내들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내 머리가 있던 위치의 벽을 뚫고 돌덩이가 날아왔다.

"괜찮아요?! 안 맞았죠?!"

"더, 덕분에요."

당아영이 급하게 내 망토 모자를 붙잡고 당긴 덕분에 내 몸은 무사했다.

혹시 망토가 벗겨질라 모자를 손으로 잡아 누르고 당아영을 쳐다보자 그동안 보지 못했던 엄청 정색한 표정의 당아영이 있었다.

"금방 처리하고 올 테니까 당신은 저 창수랑 붙어 있으세요."

당아영은 그렇게 말하더니 나를 내려놓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덜덜덜

"..창수?"

"나요."

참고로 창수는 내 점에서 유감스러운 결과를 얻은 사내였다.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사내 쪽에서 한숨을 쉬었다.

"아무렇지도 않으니 걱정 말고 뒤에 숨어 있으시게. 마차에서 얼른 내리고."

"안에.. 있는 게 더 안전하지 않을까요?"

"혹시라도 마차 채로 전복 되면 그게 더 골치 아프오. 듣기론 그 흡혈귀라는 괴인도 괴력이 상당하다고 하니 어서."

-덜덜

나는 방금 코앞에서 죽음의 향기를 맡은 탓인지 진정하지 못하고 있는 손과 발을 움직여 겨우 마차 밖으로 몸을 뺐다.

그리고 마차 밖으로 나오자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장면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그 순간 나는 내가 무림에 있다는 걸 제대로 실감했다.

-챙! 챙!

"이 작자 외공이 보통이 아니오!"

"검이 제대로 박히지도.."

"크르르.."

두 사내가 눈이 시뻘겋고 몸에 흙과 핏자국이 잔뜩 묻어있는 사내와 대적하고 있었다.

사내들의 검이 흡혈귀의 몸에 박히는 것 같다가도 순식간에 튕겨났고 흡혈귀가 그에 대한 반격으로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살벌한 바람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당아영은 어디 갔나 의문을 품던 순간

-푸욱!

"끄륵!"

어디선가 날아온 비수가 흡혈귀의 왼쪽 어깨를 파고들었다.

"단번에 죽일 생각이었나 보오. 암기가 정확히 목을 노렸어."

"..그러면 그걸 피한 겁니까?"

"아마도 그렇겠지."

어디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숨어서 정확히 목을 노리는 암기나 그걸 피하는 인간이나

지구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역시 같은 일류 쯤 되니 외공이 강해도 뚫는구려. 저 친구들은 이류거든."

"경지 하나 차이가 그렇게 큽니까?"

"이류도 같은 이류가 아니고 일류도 같은 일류가 아니오. 우리는 이류 중에서도 중간 위치지만 저 괴인이나 소저는 거의 절정을 앞둔 일류로 보이니. 상대가 안되는 게 당연하지."

"아하.."

내가 사내의 설명을 듣는 와중에도 치열한 공방은 계속됐다.

사내 둘은 아슬아슬하게 둘이 힘을 합쳐 흡혈귀의 공격을 막으며 발을 묶었고 당아영은 틈이 보일 때마다 암기를 쏘아댔다.

흡혈귀의 몸에 상처가 점점 늘어가는 게 내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이대로 끝나려나요?"

"흡혈귀라는 작자가 외공만 무식하게 강하지 이지(理智)는 거의 없어 보이니. 그저 사공에 심취한 괴인이었나보오."

"크아아아아아!!!!"

여기까지 살벌한 살기가 울려 퍼졌지만 사내들과 당아영의 든든한 모습을 보니 조금씩 공포심이 희석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말이 흡혈귀지 그냥 사공에 심취한 괴인에 불과했나 보다.

'진짜 뱀파이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흡혈귀라는 이름도 지금은 별로 와 닿지 않았다.

정작 그가 우리 쪽에는 유의미한 피해를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피를 마시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푸욱!

그 순간 당아영의 암기가 흡혈귀의 심장 부분에 박혔다.

"끄.."

아무리 암기를 맞아도 발악하는 모습을 보여주던 흡혈귀였지만 움직임이 심하게 둔해진 게 눈에 보였고 당아영의 암기는 그 뒤로도 그의 몸을 꿰뚫었다.

"크으으.."

고슴도치처럼 몸 여기저기 암기가 꽂혀있는 흡혈귀.

"크아아아아아!!!!"

그가 괴성을 내지르면서 두 사내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하핫! 이제 그대의 수는 전부 읽었소!"

사내는 그렇게 말하면서 검을 세워 흡혈귀의 주먹을 가로막으며 뒤쪽으로 물러섰지만

-푸욱!

"꺽.."

순식간에 자라난 흡혈귀의 손톱이 검을 피해 사내의 몸을 꿰뚫었다.

"...!"

"흡..!"

나는 깜짝 놀라 몸이 굳어버렸고 내 옆의 사내도 숨을 들이켰다.

"괜찮소?! 정신 차리시오?!"

흡혈귀를 상대하고 있던 다른 사내가 흡혈귀를 향해 검을 휘둘렀지만

-사악!

흡혈귀는 다른 손에 자라난 손톱으로 그의 검을 두부 자르듯 잘라버렸다.

당황한 사내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곧 그에게 닥칠 끔찍한 일은 점을 보지 않아도 누구라도 알 수 있으리라.

-팍!

내 옆에서 사내가 박차고 달려가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흡혈귀는 우리가 예상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팍!

검을 잃은 사내는 관심 없다는 듯 발로 차버리고 그의 손톱에 몸을 꿰뚫린 사내의 몸에서 손톱을 뽑았다.

그리고 그 상처로 입을 가져다 대고는..

-꿀럭.. 꿀럭..

"우욱..!"

보기 힘든 장면이 펼쳐졌다.

그는 말 그대로 흡혈귀(吸血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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