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도저히 못 읽겠더라.
하지만 이대로 있기에는 너무 심심했다.
"소저."
"왜요?"
"저 무사들 괜찮은 사람입니까? 혹시 말 건다고 주먹을 휘두른 다거나 하는 그런 사람만 아니면 되는데."
"..방금 대충 당신의 머릿속에서 무인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낸 것 같아요."
아마 당아영이 알아낸 이미지와 실제 내 머릿속의 이미지는 거의 비슷할 거다.
언제 어디로 튈 지 모르는 폭탄.
한번의 휘두름으로 내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존재를 마냥 마음 편하게 대하기는 힘들었다.
어차피 대부분 중원 일반인들도 무림인에 대한 이미지는 거의 비슷한 느낌 아닐까.
특히 객잔 주인들이 무림인 손님이 오면 그렇게 불안해 한다던데.
나는 만약 나중에 부업은 한다고 해도 객잔은 절대 안 할 거다.
언제 부서질 줄 알고.
"설마 무림맹과 연관된 의뢰에 참여한 무사가 같은 동료한테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요. 당신이 엄청난 모욕을 한 거라면 모를까."
"..그러면 대화 좀 나눠봐도 괜찮을까요?"
"..당신 혹시 지금까지 겁나서 말 못 걸고 있던 거예요?"
"..."
어쩔 수 없다.
이게 점집에서 손님으로 만나는 거랑 이렇게 밖에서 만나는 거에서 오는 괴리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점집은 내 공간이고 상대가 손님이니까 조금 편한 느낌이 드는데 이렇게 밖에서 만나니까 조금 쫄렸다.
이게 진짜 내 상황이 돼보면 무슨 느낌인지 알 거다.
손가락으로 수박에 구멍을 뚫을 수 있는 초인들을 옆에 두고 있는 심정을.
"어휴. 은근 약한 구석이 있다니까. 그러면 왜 저 상대로는 겁 안 먹었어요?"
"소저는 소저이니까요."
솔직히 당아영을 처음 만났을 때는 소개장도 있기도 했고 내가 아직 무인들의 강함에 대해서 실감을 못한 때이기도 했었다.
강하다는 것만 알지 칼 한번 휘두르는 거 제대로 못 본 상태였던 데다 아무래도 당아영이 강해 보이는 인상과는 거리가 멀기도 했으니까.
"..당신 진짜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죠?"
"뭐가 말입니까?"
"하아.. 진짜.."
당아영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아무래도 내가 무림인에게 너무 겁먹는 모습이 답답했던 모양이다.
"이대로 계속 시간만 때우는 건 너무 심심해서 말입니다. 저 사람들 점이나 봐주면서 시간 좀 보낼까 했죠."
"산 속에서 지냈다던 양반이 지루한 걸 그렇게 못 참아요?"
"오히려 속세의 놀거리들을 즐기니까 더 이러는 겁니다. 소저는 심심하지 않습니까?"
"무인들에게 인내심은 기본 소양이라."
하긴. 가부좌같이 보기만 해도 불편한 자세로 심하면 하루 종일을 앉아있는 사람들이니 일반인의 잣대로 파악하긴 힘들었다.
"그러면 불러 올까요? 그런데 이미 자기들끼리 잘 놀고 있는 것 같아서 불러도 안 올 수도 있다는 건 알아 두세요."
"그러면 이렇게 말하면서 불러보세요. 아마 올 겁니다."
"뭐라고요?"
"연애운 봐준다고요. 공짜로"
아마 남자라면 안 올 수가 없을 거다.
.
.
.
역시나였다.
"정말 공짜로 봐주나? 듣기로는 원래 비용이 꽤 비싸다고 들었는데."
"제가 먼저 영업해 놓고 돈을 받을 순 없죠. 인연이라 생각하고 그냥 부담 없이 편하게 들으세요."
사내 3명이 전부 왔다.
2명은 거의 눈을 반짝이고 있었고 한 명은 조금 시큰둥한 표정이었지만 표정에 미약하게 기대감이 서려있었다.
시큰둥한 표정의 사내가 말했다.
"내가 몇 번 봐 봤는데 점 그거 다 사기일세. 그냥 그럴듯한 말만 해주는 거라고."
"아니 그러면 자네는 그냥 보지 말게. 우리는 볼 테니."
"이 점쟁이가 그렇게 용하다고 사천까지 소문이 퍼졌다는데. 원래 보려면 은자로 2냥일세. 이런 기회가 어디 흔한가? 괜한 자존심 부리지 말고 빨리 앉게."
"..."
사내가 말없이 자리에 착석했다.
"그러면 이쪽 분부터 봐드리겠습니다. 이름이랑 출생 지역 정도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강구언. 강서 출신일세."
"그러면 강 소협의 연애운을 한번 봅시다.."
-촤라락!
목패 8개를 한번에 꺼내서 깔았다.
사실 이렇게 깔아봐야 별로 의미 없다. 그냥 보는 사람 보기 좋으라고 하는 쇼지.
"혹시 몰라서 묻는 건데 전에 연애 경험은 있습니까?"
"..혹시 손만 잡은 것ㄷ"
"자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아픈 부분을 건드린 것 같다.
"하늘은 아버지요 땅은 어머니로다. 우뢰는 가장 빠르기에 장남이고 바람은 그 다음으로 빠르기에 장녀라 일컫는다."
당연하지만 원래 점 볼 때 이것도 할 필요 없다.
그냥 뭔가 있어 보이라고 하는 거지 마음먹고 빨리 끝내려면 손짓 몇 번 하고 끝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도 기왕 하는 거 뭔가 있어 보이면 좋지 않은가.
-팡!
"자. 결과가 나왔습니다."
점을 보고 남은 천기를 바깥으로 내보내 작은 불빛을 일으켰다.
몽환적인 푸른색이 허공에서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이게 말씀드리기 조금 조심스럽긴 한데.. 그.."
당아영을 힐끔 바라보며 손을 살짝 휘젓자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왠지 저 여자라면 들을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바로 옆에 여자를 두고 말하기는 조금 그랬다.
당아영이 멀리 떨어진 걸 확인한 뒤 입을 살짝 가리고 말했다.
"아랫도리를 조심히 놀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뭣..!"
"허허, 이 친구 바람둥이가 될 상인가? 이거 부럽구만."
이미 한 여자랑 사귀고 있다가 다른 여인과 하룻밤을 보내는데 그 여자가 임신한단다.
이런 결과가 나왔다.
그 사이에 끼어서 지은 죄가 있는 만큼 힘든 삶을 보낼거라는데 솔직히 자업 자득이다.
여자를 꼬셨으면 제대로 책임을 져야지 그걸 다른 여자한테 눈을 돌려?
'어휴. 여자 쪽이 불쌍하네.'
그동안 섬서에서 손님들의 점을 보면서 온갖 방법으로 파탄나는 커플들의 미래를 봤기 때문에 더 와 닿았다.
아랫도리를 조심히 놀리라고 말 해 줬으니 바람 같은 건 안 피길 바랄 뿐이었다.
'얼씨구?'
다음 남자는 더 가관이었다.
이미 주변에 몇 년 동안 그를 좋아하는 소꿉친구가 있단다.
"어째 여자들한테 통 인기가 없어서 말이야. 어떻게 가능성이 좀 보이나?"
그래 놓고서 저런 반응이라니.
"알고 보면 주변에 인연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변을 잘 둘러보시지요."
남자가 눈치가 있어야지.
그냥 작은 계기만 있거나 하다못해 고백만 해도 바로 성립되는 관계인데 이런 식으로 얼마나 시간을 보낸 걸까.
"주변..?"
턱에 손을 괴는 자세로 고민하고 있는 만큼 괜찮은 결과를 얻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지막 상대는..
어..
음..
"...죄송합니다."
"..나는 점 같은 거 안 믿네."
"..원래 미래는 불확실한 겁니다 소협."
"..."
나는 그 이후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옆의 사내들도 마지막 사내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 하고 있던 사이 다행히 이 분위기를 타파해줄 구원자가 나타났다.
"이제 끝났어요?"
"허허.. 이제 우리 차례는 끝났으니 이만 나가보세. 다음 사람이 왔구려."
"그, 그러지. 자네도 빨리 일어나게."
"..."
사내 둘이 한 명을 끌고 쏜살같이 이 장소를 빠져나갔다.
"..뭐예요? 혹시 저 실수했나요?"
"..아닙니다. 마침 좋은 순간에 오셨어요."
비록 마지막에 위기(?)가 있었지만 적당히 시간도 때웠겠다 자리를 정리하려다 당아영을 쳐다봤다.
"..혹시 소저도 관심 있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동안 소소한 점은 몇 번 봐줬는데 연애운은 봐준 적이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당아영것 까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저, 저요?"
"네. 그러고 보니 연애운은 봐드린 적 없는 것 같아서."
"그.. 으.."
당아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여자라서 이런 부분에는 민감하려나?
"생각 없으시면 괜찮.."
"아, 아뇨! 볼게요!"
당아영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자리에 앉았다.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목패 8개를 깔고 천기를 사용할 준비를 했다.
곧이어 느껴질 익숙한 감각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정작 온 것은 기록이 아니었다.
-파직!
"악!"
목패에 작은 푸른 번개가 내려쳤다.
내게 직격하진 않았지만 따끔한 감각에 절로 비명이 나왔다.
"괘, 괜찮아요?!"
그러나 내가 내 손을 감싸기도 전에 당아영의 손이 내 손을 감쌌다.
"워, 원래 이런 거예요? 실패하면 이래요?"
"아, 아니요.. 실패한다고 이런 일이 벌어지진 않는데.."
부드러운 손길에 따끔한 감각이 금방 사라져갔다.
나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방금 그건 정도가 매우 약하긴 했지만 일종의 천벌(天罰)이었다.
하늘에서 번개가 내려치는 천벌이 아니라 그냥 문자 그대로의 하늘이 내린 벌.
점쟁이로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려 한 것에 대한 천벌이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내 미래를 보려 한 것도 아니고 당아영의 연애운을 보려고 한 건데 천벌이라니.
정말 하늘의 뜻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저기.. 이거 다 탄 거 같은데 괜찮은 거예요?"
"..아."
그리고 목패 8개가 전부 타있었다.
만들기 어려운 건 아니지만 꽤 귀찮은 작업이라 속으로 하늘을 향해 욕을 내뱉었다.
* * *
-터덜..터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서 왔는지.
내가 무엇을 했었는지.
지워지기라도 한 듯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거, 거기 자네! 괜찮나?"
주변에서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앞에 성격 좋아 보이는 노인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