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250)

"알.. 뭐요?"

"아, 술 말하는 겁니다."

나름 이쪽 세상에 익숙해지긴 했는데 여전히 가끔씩 튀어나오는 건 막기 힘들더라.

아무튼 술은 중요하다.

"..뭐. 그러면 술도 한 병 사드려요? 그래도 동료들 만나러 가기 전에 취하면 좀 그러지 않을까요?"

"소저는 제가 취하는 거 보셨습니까? 술 통을 가져오라 해보시죠. 안 취할 자신 있으니."

이 몸의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점이다.

주량이 진짜 장난 아니다.

매일매일을 술로 찌들어 보내면서 병 하나 안 나고 술에 취해 쓰러진 적 한번 없는 걸 보면 적어도 술 마시고 사고 칠 일은 없어 보였다.

"근데 지금 빈 속 아니에요? 안 아프겠어요?"

"소저."

나는 모처럼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맛에 먹는 겁니다."

.

.

.

"일단 일행은 저와 당신을 제외하면 무사 3명이에요. 전부 남자고요."

내가 잔에 술을 따르는 사이 당아영이 일정을 설명하고 있었다.

근데 인원 부분에서 의문이 있었다.

"원래 남자 둘에 여자 한 명 아니었습니까?"

편지에 써져 있던 인원엔 원래 여자가 한 명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자만 3명이라.

크게 신경 쓸 부분은 아니지만 의문은 들었다.

"그분은 갑자기 급한 볼일이 생겼다고 하더라고요. 대신 갈 분을 구해주시고 나가셨어요. 왜요? 남자들 뿐이라 아쉬워요?"

어째서인지 목소리가 약간 살벌하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 일거다.

"아뇨. 관심 없습니다."

그리고 정말 일행의 성비에는 전혀 관심 없다.

어차피 스승님의 외모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대부분 여자들은 거기서 거기다.

당아영도 전생 기준이었다면 길 가다가 만나면 뒤돌아서 쳐다볼 정도로 미인이었지만..

-절레절레

'그 여자는 사기야.'

성격이 괴팍해서 문제지 외모에서는 정말 흠 잡을 곳을 찾고 싶어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경국지색. 나라를 기울게 할 정도의 미인. 그 단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의 미인이었다.

그런 여자를 무려 10년 동안 매일같이 봐왔으니 미의 기준이 정상적 일리가 없다.

스승님을 100점으로 둔다면 전생의 연예인들이 70점 정도고 당아영이 85점 정도?

몸매도 지금도 충분히 대단해 보이긴 하지만 스승님 만큼은 아니었다.

"..왠지 어디서 불쾌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기분 탓일 겁니다."

아마 이런 무례한 생각을 했다는 걸 들키면 무사하지 못하겠지만

망토 덕분에 포커페이스는 패시브로 달려있었다.

애초에 표정이 보이지도 않겠지만.

만약 이 망토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별로 상상하고 싶진 않았다.

* * *

-덜컹! 덜컹!

마차를 타고 이동하기 시작한 지 어느덧 3시간 째.

나는 조금씩 올라오는 허리의 고통에 눈살을 찌푸리며 들고 있던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일행인 사내 3명과 당아영은 나름 무인들 끼리 통하는 게 있는 건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드럽게 재미없네.'

나름 인기 많다고 해서 가져온 책인데 내용이 뭐 이따구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아마 이 시대 기준에서는 나름 자극적인 내용이었나 본대 지구 출신에서 이 정도는 밍밍한 소금이나 다름 없었다.

가치관 차이 때문에 이해 안 가는 내용도 상당히 많고.

'그냥 여행 책자나 계속 볼걸.'

괜히 소설 좀 봐보겠다고 가져왔다가 4일을 지루하게 보낼 판이었다.

"뭐 읽어요?"

내가 책 선정을 후회하는 동안 당아영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왜 그러십니까. 무인들끼리 더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시지 않고."

"에이. 작전 회의라던가 대열 설정이라던가 이런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요. 삐졌어요?"

"..애도 아니고 그런 걸로 삐지겠습니까."

그냥 키나 몸집이 좀 작을 뿐이지 내용물은 완전 성인이다.

애 취급 당하는 건 기분이 심히 좋지 않다.

애초에 이렇게 술 잘 마시는 애가 어딨다고.

"그래서 뭐 읽어요? 재밌어요?"

"..재미 없습니다. 그냥 우연히 기연을 발견한 남자가 수련을 마치고 중원에 나와 온갖 보물과 여인들을 손에 넣는 흔하디 흔한 소설입니다. 연출도 진부하고요."

"아. 저도 그거 들어본 거 같은데. 남자 분들한테 꽤 인기 많지 않아요?"

"..이게 많아요?"

"네. 저자가 그 책 쓰고 건물을 지었다나 뭐라나.."

그냥 헛소문에 낚인 줄 알았는데 진짜 인기가 많다고?

이게?

"..아무래도 저는 이런 취향이 아닌 모양입니다."

"왜요. 멋지지 않아요? 뭇 남성들의 꿈 아닌가요? 기연을 얻어서 천하제일이 되고 수많은 미인들을 손에 넣는 그런 거요."

"..."

생각해보자. 만약 천하제일이 되면

"온갖 문파에서 숨겨둔 귀한 술을 강제로 빼앗.."

"진짜 당신 머릿속엔 술밖에 없어요?!"

"그치만 딱히 상상도 해본 적 없는걸요."

강해지겠다는 꿈은 이미 옛날에 버린지 오래였다.

만약 강해진다면 그건 최소한 몸을 지킬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지 천하제일같은 이상한 목표에는 별로 관심 없다.

애초에 이런 몸으론 될 수도 없고.

"그러면 여자에는 관심 없어요? 영웅은 삼처사첩은 기본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전 중원의 아름다운 미인들을 독점하는 그런 쪽에는 관심 없어요?"

하렘이라.

"지금은 여인 자체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어차피 스승님이 나오기 전에 돌아가야 하는 몸.

만약 연애를 한다고 해도 어차피 헤어져야 하는 운명이다.

그래도 만약.

"그래도 만약 여인에게 마음을 품는다면.."

그때는

"그땐 한 여인에게 모든 걸 바칠 겁니다."

삼처사첩이니 뭐니 그런 거 관심 없다.

한 명에게 나눠주어도 모자란 마음을 여러 명한테 나누다니.

만약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 놈이 있다면 욕을 쏟아 부어줄 자신이 있다.

"..한 명이요?"

"네. 사람의 마음은 한 명에게 주기도 모자란 겁니다. 하물며 사랑은 더더욱."

"..."

당아영은 어딘가 깊은 고민에 빠진 표정이었다.

.

.

.

날이 저물고 슬슬 야영을 해야 하는 시기.

나도 이래 보여도 내가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지금 가고 있는 1차 목적지도 흡혈귀가 마지막으로 발견된 위치와 내가 점친 지역을 적절히 섞어서 가고 있었고

"지금은 그때 그 위치 그대로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모르니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보도록 하죠."

이런 식으로 제대로 중간중간 위치 체크도 해주고 있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술을 챙겨올걸.'

술이 없었다.

자기 전에 한 병은 마셔줘야 제대로 푹 잘 수 있는데 말이다.

-타닥

불침번을 서며 모닥불에 무심하게 나뭇가지를 던져 넣었다.

내 순서가 첫번째고 당아영이 마지막이었다.

당아영이 마지막인 건 그녀가 이 인원 중 제일 고수이니 힘을 비축하는 의미라고 이해할 수 있었지만 나를 첫 번째로 빼준 건 조금 의외였다.

'일반인이라고 배려해준 건가.'

무림인이라고 다 성질 드러운 사람만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타닥

다시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던져 넣자 어깨에서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익숙한 얼굴이 있었고

"잘 서고 있었어요?"

당아영이 내 옆에 걸터앉았다.

"소저 차례는 마지막 아닙니까?"

"걱정돼서 와봤어요. 잘 서고 있을까 해서요."

"..술이 없어서 괴롭긴 하지만 버텨야죠 뭐."

한숨이 나왔다.

저런 활자 조합물을 가져올 바에 그냥 술이나 챙겨올걸 그랬다.

앞으로 4일은 지내야 하는데 혹시 중간에 마을이 있는지 한번 물어보고 거기에서 보충을 해야..

-찰랑

"이거 찾아요?"

익숙한 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려보자 익숙한 모양의 병이 있었다.

"어, 어떻게.."

"당신이 보나마나 그런 반응일 것 같아서 챙겨왔죠. 어때요. 저밖에 없죠?"

"정말 소저 밖에 없습니다. 저는 소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흐흥, 좀 더 아부해 보세요?"

"사랑합니다 소저."

"..."

당아영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순간 실수했나 싶어 식은땀이 나오려고 할 때 다행히 당아영이 정신을 차렸다.

"흐, 흠.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거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사과까지 할 필요는 없고.. 자. 여기요."

당아영이 내 손에 술병을 올려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일행들한테는 들키지 않게 마시세요."

"둘만의 비밀입니까?"

"둘만의 비밀이네요."

모닥불의 불빛 때문인지 약간 상기된 것처럼 보이는 당아영의 미소가 그날 따라 유독 예뻐 보였다.

아침에 다시 무사히 일어난 뒤 침상을 정리하고 다시 흡혈귀의 위치를 점쳐봤다.

위치가 약간 변하긴 했지만 다행히 원래 위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위치였다.

'근데 천지신명님 이게 원래 되는 거 맞아요?'

솔직히 나도 하고서 놀랐다.

위치 추적이라니. 이미 점성술의 범위를 넘어섰다.

하늘의 기운을 받아 하늘의 기록을 엿보는 요술이니 원리 상으로는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정말 될 줄이야.

덕분에 큰 돈도 벌 수 있게 되긴 했지만 요상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온갖 꼼수를 다 시도해도 '내 미래'만큼은 절대 안 보여 주더니 위치 추적은 된다니.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는 하늘이다.

* * *

-다각다각

마차에서 하염 없이 시간을 때우는 것도 어느덧 2일째였다.

너무 심심해서 어떻게든 읽어보려고 했던 책도 그냥 다시 짐 구석에 처박아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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