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250)

만약에 그 천지신명이 나를 이 세계로 끌고 온 거라면 욕을 한 바구니 쏟아부어야 적성이 풀리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나름 적응해서 잘 살고 있으니까.

'설마 중원 전체에 전쟁이 일어나거나 하지는 않겠지.'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든 탈출할 방도를 마련해 봐야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걱정할 필요 없어 보였다.

지금 중요한 건 눈앞의 손님이니까.

"흐음.."

이쯤에서 내가 점을 본 뒤에 그걸 남에게 얘기해줄 때의 원리를 이야기해 보자면

먼저 점을 볼 때 나는 하늘의 기운을 받거나 기록을 읽어 일종의 계시를 받게 된다.

그리고 이후에 이 내용을 말로 번역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 주는 건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천기누설이라는게 워낙 하늘 입맛 대로라 범위가 똑같지 않다는 것.

대신 본능적으로 '여기까진 말할 수 있다.' 와 '여기부턴 말하면 안된다.' 를 알 수 있긴 하지만 정확히 정해진 기준이 없기에 내가 피곤하다.

가끔 왜 누구한테는 자세히 알려주더니 자기한테는 대충 알려 주냐고 뭐라 하는 손님들도 있어서.

'하늘은 공평하다느니 뭐 그런 거 다 헛소리야. 헛소리.'

내가 보기엔 세상에서 제일 편파적인 게 하늘이다.

가끔씩 '하늘한테 사랑 받고 있구나'가 딱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나오는 내용도 좋고 천기누설의 범위도 적어서 좋은 말만 해줄 수 있다.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는 당아영 정도?'

아무튼, 그래서 지금 이 말을 한 이유는

이 여인도 굉장히 하늘에게 사랑 받는 모양이라 서다.

.

.

.

"혹시 평소에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무어라?"

"아. 오해의 소지가 있군요. 이성적인 상대가 아니라 정말 사람 말입니다. 자주 생각하고 신경 쓰는."

"으음.."

검후는 점쟁이의 말에 한 여인을 떠올렸다.

그녀가 가장 자주 생각하고 자주 신경 쓰는 인물이라고 한다면 천마밖에 없었다.

물론 같은 화산파의 장로들이나 그런 인물들도 신경 쓰긴 하지만 천마의 무위를 본 이후로 단 하루도 그녀의 생각을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검을 휘두를 때도, 수련을 할 때도, 휴식을 취할 때도.

"있다."

"그 인물이 손님에게서 소중한 무언가를 앗아갈 것입니다."

"...!!"

천마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빼앗긴다고 했을 때 생각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였다.

중원이. 화산파가 공격 당한다.

-부들부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걸 막기 위해서 지금까지 계속 수련에 몰두해온 것인데 설마 그렇게 말할 줄이야.

'..아니. 아직이다.'

아직 섣불리 판단하기엔 이르다.

천마나 화산파를 가리키는 게 아닐 수도 있다.

확실히 말하지 않았으니까.

"..내 무엇을 앗아간다는 것이냐?"

"음.. 손님의 목숨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인생의 동반자와 같은 그런 것?"

"..."

내 목숨과도 같은 것. 인생의 동반자 같은 것.

화산. 혹은 검.

만약 후자라면 나와 천마가 싸우게 되고 내 검이 그녀 앞에 꺾이게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쪽이 낫다.

진작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일이고 전자보다는 낫다. 내가 꺾일지언정 중원은. 화산은 건제할 테니.

..하지만 만약 전자라면?

아니면 둘 다라면?

"..그대의 점은 잘 맞는 편인가?"

"저도 자주 틀리긴 합니다만.. 대개 8할 정도는 들어맞습니다."

8할. 높은 확률이었다.

이 점쟁이의 말을 전부 신뢰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소문을 생각해보면 그의 천기를 읽는 재주가 상당히  뛰어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조언해 드리자면..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지신명께서는 늘 다른 미래도 준비해 놓으시니까요. 그리고 제가 느끼는 바로는.. 충분히 막을 수 있는 미래입니다. 손님께서 노력하신다면요."

"..어떻게 하면 되겠나?"

"음.. 좀 더 본인에게 신경 쓰셔야 합니다."

"음.."

좀 더 수련에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와 거의 그대로 읊어줬네."

보기 드문 손님이었다.

팔괘를 이용한 점은 나도 미래의 장면을 정확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단편적인 정보만 얻을 수 있는 형태라서 천기누설까지 신경 쓰려면 전달에 어려움이 많다.

그런데 모처럼 이렇게 천기누설을 거의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손님이라니.

"하늘한테 사랑받으시나보다."

대체 전생에 무슨 덕을 쌓으셨길래 그 까칠한 하늘께서 이렇게 잘 대해준단 말인가.

'확실히 덕을 많이 쌓으신 건 맞는 모양이야.'

그 손님이 끝나고 고맙다면서 은원보를 던져주고 갔다.

한 달 전쯤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돈 벌면 된 거지 뭐.

별일 아닐 거다.

'그나저나 슬슬 이것도 다뤄보고 싶은데.'

품 속에서 주먹만한 크기의 구슬을 매만졌다.

스승님이 아끼시던 구슬인데 나도 써볼려고 나오기 전에 쌔벼왔다.

어차피 폐관수련 들어가신 분이다.

쓸 일도 없을텐데. 밖에 나와있는 사람이 써야지.

원래 도구는 유용하게 쓰라고 있는 거다.

통 어떻게 쓰는 건지 감이 안 잡혀서 문제지.

'점을 볼 때 안에 있는 기운을 섞는 것 까지는 활용할 수 있는데.'

전에 스승님을 봤을 땐 이 구슬로 별에 별거를 다 하셨다.

당장 나의 점을 볼 때도 이걸로 보셨으니까.

'최소한 이걸로 점을 볼 수는 있다는 소린데..'

이렇게 구슬에 기운을 불어넣어도 영 작동할 기미가 없다.

생각해보자. 옛날에 스승님이 내 점을 볼 때 이 구슬을 어떻게 썼었는지.

'아 맞다. 내 머리카락.'

그때 분명히 구슬에 내 머리카락을 올려놓고 점을 보셨었다.

'그러면 나도 내 거를..'

그때 기억을 생각해 내 머리카락을 구슬에 올려놨지만 여전히 아무 반응도 없었다.

'..시전자 본인 건 안되나?'

자기 자신의 점을 볼 수 없는 점쟁이의 특성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가게 안에 있는 아무 머리카락이나 주워볼까 했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 걸 쓰기엔 영 찝찝했다.

그러면 주변에 머리카락 한 가닥만 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밖에 없네.'

나중에 부탁해 보기로 했다.

* * *

'그나저나 그 점쟁이.. 분명 흔적이 익숙하단 말이지..'

검후는 점쟁이의 말을 생각하며 거처로 돌아가며 그때 봤던 점쟁이의 몸에 있는 흔적을 생각했다.

'단전이 망가져서 제대로 보기는 힘들었지만.. 그건 분명 화산파의 기공의 흔적.'

다른 사람도 아니라 자신이 잘못 봤을 거라 생각하긴 힘들었다.

그 흔적은 분명히 화산파에 막 입산한 제자들이 익히는 기공이었다.

'단전이 망가졌다는 것은 죄를 지었거나 사고를 입었다는 것인데..'

막 입산한 제자. 그리고 망가진 단전.

한 가지 기억이 어렴풋이 솟아 오르려고 한다.

자신의 아픈 손가락이자 과오가.

'..아니겠지.'

그때 그 아이를 찾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가.

아마 자신이 착각한 것이리라.

무려 10년도 더 전에 있던 일이니.

상냥하다.

그것이 세간 사람들의 검후에 대한 인식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물론이요 설령 악인이라고 할지라도 부드럽게 대해주는 그녀의 성격은 무림인이 아니라 보통 사람으로서도 굉장히 순한 성격이라고 사람들의 목격담이 자자했다.

설령 그녀가 토벌하러 간 악인이라고 할지라도 도저히 구제할 수 없는 악인이 아니라면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보상하며 갱생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파격적인 성격은 만일 그녀가 머릿속이 꽃밭으로 가득 찬 여인이었다면 그녀를 큰 위험에 빠트렸을 테지만

그녀는 강했다.

그렇기에 그녀의 정의를 관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라도 그녀의 정의에서 빗나간 존재에겐 가차 없었다.

한번의 기회마저 걷어찬 악인. 도저히 구제할 수 없는 악인.

그들은 그녀의 정의에서 벗어난 자들이었고, 그녀는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검후에게, 중원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화산파 내부에서도 몇몇 사람들만 알고 있는 일이 있었다.

그녀의 손으로 거두었던 그녀의 제자를 그녀의 손으로 베었다는 믿기 힘든 일이.

* * *

화산파의 검후가 유명하듯 그녀의 제자 또한 유명했다.

워낙 검후가 감춰두고 금지옥엽으로 키운 탓에 그 실제 모습을 본 자가 거의 없다고 전해지지만 무림맹에서 주최했던 비무 대회에서 첫 모습을 보인 뒤 모두가 그녀를 검화라고 불렀다.

지금의 검후의 후기지수 시절의 별호까지 그대로 물려받은 검후의 제자는 대회가 끝난 후 다시 화산으로 돌아갔고 수많은 사내들이 그녀가 강호에 나오기 만을 기다리게 만들었지만

그녀가 다시 화산에서 나오는 일은 없었다.

"무엇을 그렇게 보고 있더냐?"

"스, 스승님?! 제가 수련을 게을리 하는 것이 아니오라.."

"아직 너를 나무라지도 않았거늘 왜 벌써 고개부터 숙이느냐. 그냥 뭘 보냐고 물어본 것 뿐이다."

본산 깊숙한 곳에 있는 원래 그녀의 수련 장소에서는 훨씬 떨어진 외각.

속가제자들이 단체로 수련하는 장소와 가까운 곳이었다.

"며칠 전 막 입산한 제자들이구나. 소연이 네가 평소 다른 사람에 영 관심이 없는 것 같아 걱정이 많았는데 이제 걱정을 좀 덜어도 되겠어."

"아, 아닙니다! 일부러 찾아온 것이 아니고.."

"응? 누구 한 명을 찾아온 모양이구나? 난 저 제자들 전체를 보러 왔다고 생각해서 한 말이었거늘."

검후의 말에 검화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게냐? 여기에 있는 제자들은 대부분 아직 지학도 지나지 않은 아이들일텐데."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냥 비록 속가제자라도 같은 화산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검을 배우는 아이들을 한번 보고자 이렇게 내려온 것입니다! 맹세코 다른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 치고는 아까 시선이 유독 한 명에게 집중되어 있던 것 같은데 말이다."

"보, 보셨습니까?"

"사실 확신은 없었지만 네 반응을 보니 진짜인 것 같구나."

검후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너무 없어서 걱정이었던 제자가 처음으로 가진 관심이 하필 자신보다 10살은 어린 아이를 향한 것이라니.

만일 동년배에게 향했으면 교류하며 정신적인 성숙을 이룰 수 있었을 테니 여러모로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검후는 당연히 그녀의 관심의 종류가 불순한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저 순수한 다른 사람을 향한 호기심이라고 생각했을 뿐.

'뭐 오히려 인생 선배로서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려 할 테니 그쪽으로 기대해 볼 수 있을지도.'

"그래서, 어떤 아이냐?"

"꼬, 꼭 말해야 합니까?"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스승의 눈을 피해서 몰래 나올게 아니라면 그래야 할 것이다."

"..저기. 저 아이입니다."

검후는 마지못해 손을 든 그녀의 제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향했다.

검화의 손 끝에는 열심히 수련 중인 한 소년이 있었다.

확실히 아직 지학도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어린 소년이.

그리고 그를 향한 그녀의 첫 감상은

"..화산의 화는 꽃을 의미하는 게 아닐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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