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리가요."
사실 당아영의 무위가 어떻든 내가 온 힘을 다해도 못 이긴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뭐 일단 읽어는 보죠."
당아영이 건넨 종이를 꼼꼼히 읽어봤다.
원래 계약서는 꼼꼼히 확인해야 하는 법.
그나저나
"4일 일정에 금으로 4냥?"
"짭짤하죠?"
보수가 상당했다.
내가 하루에 버는 돈이 잘 벌어야 은자 40~50냥 정도니까 수입의 2배가 넘는 양이다.
그래도..
"위험부담을 생각하면 별로 땡기진 않네요. 저를 왜 데려가는지도 모르겠고."
아무리 그래도 괴인 토벌이다.
삼류 무인도 못이기는 몸으로 따라가고 싶지는 않다.
"우선 당신을 데려가는 이유는 당신의 점으로 흡혈귀를 추적하기 위해서예요."
"무슨 점을 만능으로 아시는 겁니까?!"
"안되나요?"
"하려면 될 것 같긴 하지만.."
"뭐예요. 진짜 돼요?"
"모르고 떠본 겁니까.."
아무튼 별로 땡기진 않는다.
직접적인 전투 인원이 아니라고 해도 안전이 100%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금 4냥은 굉장히 큰 돈이지만 생명의 위협까지 무릅써야 할 정도로 큰 돈은 아니다.
"아무튼 저는 별로 생각이 없.."
"다고 할 까봐 제가 제안서를 바꿔왔죠."
당야영이 빠르게 내 손에 들린 종이를 가져가고 새로운 종이를 건넸다.
그리고 이번 종이가 전과 달라진 점은
"10냥?!"
"그 정도면 올만 해요?"
"으그으윽.."
4일에 무려 금 10냥이다.
'이 돈이면 술이..'
평소에 가는 주점 말고 고급 주점도 찾아가 볼 수 있다.
'금 10냥으로 산 술은 어떤 맛일까.'
입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평소에 먹는 술은 비싸봐야 은자 30냥 정도다.
이것도 충분히 비싼 술이지만 금 단위의 술의 맛이 궁금한 건 주당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니면 모처럼 큰 돈도 쌓였겠다 상점창에 포인트로 조금 넣을 수도 있고.
"그래도.. 위험하지 않을까요.."
내 목소리에 실린 힘이 많이 약해졌다.
금 10냥은 그 정도로 큰 돈이었다.
"에이 저도 참여하는 거지 다른 무사들도 같이 가요. 만약 전투가 벌어지면 무사들 뒤에 꼭꼭 숨어 있으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은 지키라고 말 해 놓을 테니까."
"..믿어도 되죠?"
"아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경로로 얻은 정보인데 우리가 참여하는 토벌대의 책임자가 상당한 술 애호가라 귀한 술들을 많이 보관해 놓는다고.."
"가죠."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충분하다.
"흐흥, 좀 더 아부해보면 뭐가 더 떨어질지도 몰라요?"
"당 소저밖에 없습니다. 소저를 만난 건 제 삶의 최대의 행운입니다."
"...아부인 건 알아도 기분은 좋네요."
당아영의 볼이 옅은 홍조가 올라왔다.
"자세한 일정은 종이에 다 써져 있으니까 참고하시면 될 거고.. 저는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벌써요?"
"조금 더 같이 있다간 큰일 날 것 같아서.."
"네?"
"아, 아니에요."
당아영은 그렇게 말하더니 순식간에 객잔을 나가버렸다.
"급한 일이라도 있나."
-후룩
요즘 상태가 조금 이상한 당아영이었다.
.
.
.
식사를 마치고 가게로 돌아오자 나처럼 망토를 쓴 사람 한 명이 가게 앞에 서있었다.
"음?"
아직 한참이나 멀리 있는데도 나를 느낀 건지 내 쪽으로 정확히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점 보러 오셨습니까?"
"혹시 그대가 그 무면금귀라는 점쟁이인가?"
"별로 좋아하는 별호는 아니지만 맞습니다."
"호오, 신기하군. 정말 얼굴이 보이질 않아."
"일단 들어 오시죠. 용건은 천천히 들어도 되니까."
목소리는 여성의 것이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와 여성을 의자에 앉히고 나는 건너편 탁자에 앉았다.
"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사주팔자? 연애운? 자식복? 시험? 이 외에도 뭐든지 가능합니다."
"용하다는 소문이 다른 지역까지 자자하던데 정말 틀리지 않는 건가?"
"아아.. 아쉽게도 그건 아닙니다. 감히 저 같은 일개 요술쟁이가 어찌 천지신명의 뜻을 전부 알 수 있겠습니까. 그저 일부만 볼 수 있을 뿐이지요. 하지만 완전 쓸모없지는 않을 거라고 보장해드리겠습니다."
"흠.."
망토 안쪽으로 보이는 여성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뭐지?'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실망하거나 겸손 떨지 말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는데 저런 의미 모를 미소는 처음 보는 유형의 반응이었다.
"마음에 드는군. 좋아. 뭐든지 볼 수 있다고 했나?"
"뭘 요청하시던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내 점도 한번 봐주시게."
뭐 얼마나 대단한 걸 요청하나 했더니 그냥 평범한 점이라니.
그냥 좀 특이한 손님이었구나.
-탁 탁 탁 탁
평소처럼 목패 8개를 꺼내서 탁자에 늘어놨다.
"팔괘라.. 정석적인 방법이지."
"..."
어쩌면 그냥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무인일지도 모르겠다.
분명 느껴지는 기운은 완전한 일반인인데 말이다.
"..자 그러면.."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손 좀 만져봐도 되겠나?"
"..손님?"
"아, 미안하네. 잠깐 흥분해서."
이 사람 진짜 뭐 하는 사람이지?
'하..'
당아영이 있었으면 어떻게 내쫓기라도 해볼텐데.
암기술을 배웠다지만 무림인으로 추정되는 사람한테 덤빌 깜냥은 안됐다.
"여기요. 잠깐 만져 보시죠."
"오오 고맙군."
순순히 손을 내주자 여인이 내 손을 만지기 시작했다.
여인 특유의 부드러움이 있으면서도 딱딱한 느낌이었다.
특히 굳은살이 장난 아닌 게 보지 않아도 느껴질 정도였다.
'반항하면 좆될뻔했네.'
괜히 객기를 부리지 않았다는 것에 안심하며 언제까지 만지고 있을지 궁금해 할때쯤 여인이 입을 열었다.
"자네 혹시 어떤 문파 아래에서 수학했던 적이 있나?"
-10년 전-
스승님이 나를 거두어오고 무언가를 가르쳐 주기 전에 있던 일이었다.
"일단 단전이 망가져 있으니 무공을 가르쳐주기는 어려울 것 같구나."
"..네?"
무공을 익히지 못한다.
내심 가지고 있던 무공을 익힐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박살 난 순간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단전이 망가진 것이냐. 아예 무공을 익히지 않아서 단전이 만들어지지 않은 거라면 모를까 명백히 한번 만들어 졌다가 망가진 흔적이거늘."
"..제가 말입니까?"
"그래. 네놈 말이다."
"..."
당연히 알지 못한다.
내가 이 몸에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뒷골목에서 거의 죽어가는 신세였다.
그 상태로 어떻게든 연명하다가 스승님을 만난 건데 내가 이 몸의 과거 따위 알 리가 없었다.
"뭐, 모를 만도 하겠구나. 어차피 네 몸도 아닐 테니."
"...!"
"무엇을 그렇게 놀라느냐. 여가 그것도 모를 것 같았느냐?"
"그걸 어떻게.."
딱히 숨기려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밝힐 생각도 따로 없었다.
그야 사실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는데 이 몸이 내 몸이 아니다 라고 말해봤자 당연히 미친놈 취급 받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한눈에 딱 알아보기는 힘들지만 밀착한 채로 계속 살펴보면 그 정도는 구별할 수 있다. 네 혼과 몸이 균형을 이루지 않고 일그러져 있더구나. 원래 맞지 않은 것을 억지로 끼운 것처럼."
"..스승님. 제가 의도한 게 아니오라.."
"왜 두려워하는 게냐. 별로 신경 쓸 것도 아니거늘."
"..제가 몸을 뺏었다고 생각하진 않으십니까?"
"그런 고등 술법을 쓸 수 있는 자라면 그런 몸보단 다른 좋은 몸이 널리고 널렸을텐데 굳이 그런 몸을 선택할 이유가 없겠지. 실제로 네놈을 처음 만났을 때도 거의 죽어가던 몰골 아니었느냐."
"..."
"뭐, 외모 하나는 봐 줄만 하다만."
가진거라곤 외모밖에 없는 몸.
작고, 여리고, 나약하다.
그런데 이제는 무공까지 못 익힌 다라.
'대체 내가 왜 이런 꼴을..'
차라리 잘못을 하고 빙의된 거라면 억울하지도 않지.
정말 갑작스럽게 이런 낯선 몸에, 낯선 세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처지에 놓인 처지라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스승님."
"왜 부르느냐."
"어제 저 보고 메주같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
왠지 모르게 그날은 악몽을 꿨었다.
나도 모르게 옆에 있는 여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을 정도로 무서운 악몽을.
* * *
"..없습니다."
"이런. 실례했군. 익숙한 흔적이 보여서 말이야."
굉장히 무례한 질문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과거에 어떤 문파에서 수학했던 적이 있냐니
내가 불쾌한 감정을 표현해도 될 정도의 무례였다.
"궁금한 점이 해결 되셨다면 이제 점 결과를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하지만 딱 봐도 엄청나게 강해 보이는 무림인을 상대로 그럴 깜냥은 안됐다.
진짜 굳은살이 장난이 아니었다.
무슨 일평생 검만 휘두른 사람처럼.
"호오, 벌써 나왔나? 생각보다 빠르군."
"산 속에서 이 짓만 10년을 했으니 말이죠. 천지신명께서 예쁘게 봐주고 계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