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저?"
"핫?!"
'내,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아무래도 방금은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몸이 야하다고 해도 아직 얼굴도 모르는 사내다.
그도 계속 말하지 않았는가. 얼굴이 엄청 못생겼다고. 가리고 다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자기도 자기 외모 별로 안 좋아한다고.
-팟!
"죄, 죄송해요. 잠시 다른 생각 좀 하느라.."
"괜찮아요. 일부러 가르쳐 주시는 건데."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지금 당장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가 아니라 나에게.
"저, 저기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몸을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았다.
손이, 눈이, 다리가 주인의 명령을 무시하고 한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 혹시 금나수법 말고 다른 거 배워볼 생각은 없어요?"
"..다른 거요?"
가까스로 화재를 돌리는데 성공했다.
"네.. 그.. 아무래도 몸이 직접 싸우기에는 적합해 보이지 않으니까.. 어차피 목적도 호신용이니 이런 것보단 암기술 한번 배워 보시는 게 어때요?"
"..암기요?"
"비겁하다고 욕을 먹을 수는 있지만 굉장히 효율적인 기술이에요? 제대로 들어가기만 하면 자기보다 경지가 높은 상대도 제압할 수 있는 게 기습이니까."
필사적으로 몸을 제어하면서 말을 이었다.
흥분한 말의 고삐를 꼭 잡고 있는 마부의 심정이 이러할까.
"암기라.."
그의 시선이 잠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했었다.
저쪽 방향에 뭐라도 있나 고개를 돌려봐도 있는 거라 곤 평범한 벽 뿐.
"암기 좋네요."
"아, 그러면 제가 오늘은 이만 가보고 다음에 암기술 배울 준비를 하고 다시 올게요."
"벌써 가시게요? 조금 더 있다 가도 되는데."
...
..........................................
"저기요."
그의 어깨를 잡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거 정말 위험하니까 다음부턴 하지 마세요."
간신히 참았다.
정말 뭔가를 저질러버릴뻔 했다.
정말로.
* * *
화산파.
빛날 화에 뫼 산을 써 빛나는 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문파이다.
그 본산을 섬서에 두고 있는 섬서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 중 하나이며 정파가, 구파일방이 그렇듯 적어도 겉으로는 정의를 표방하고 있는 문파이고
다른 도교 계열 문파에 비해 무인의 향이 강하긴 하지만 엄연한 도사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화산파를 대표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 유명한 검후였다.
지금은 대부분의 시간을 화산에서 보내지만 보다 젊었을 시절 그녀가 '검화'였을 때부터 보여주었던 정의롭고 상냥한 성격과 아름다운 외모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더 완벽해지면 완벽해졌지 전혀 꺾이지 않았다.
.
.
.
-덜컹
검후가 문을 열고 나오자 항상 기다리고 있던 여인 한 명이 그녀에게 닦을 것과 옷을 가져다 주었다.
"이번에는 얼마나 지났느냐."
"정확히 190일이 흘렀습니다."
"생각보다 오래 있었구나.."
여인은 그녀에게 그동안 뭔가를 얻기는 했는지 궁금할 법만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 정도 경지까지 와서 이런 폐관 수련은 크게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마음이 편하지 않구나."
검후는 여인에게 받은 수건으로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었다.
이미 몸에 노폐물이 쌓일 경지는 한참 전에 지난 그녀였지만 옷까지 세월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교는 아직 움직임이 없느냐?"
"다행히도 그렇습니다."
"후.."
검후는 혈교와의 전쟁에서 봤던 천마의 무위를 떠올렸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 도달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천마가 아닐까 라고 생각할 정도의 압도적인 무위.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강함마저 압도해버린 자.
그녀를 포함해 정파의, 아니 사파와 새외무림의 모든 고수들이 다같이 덤벼도 이길 수 있을 거라는 그림조차 그려지지 않을 정도의 강자였다.
"솔직히 닿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감히 들지 않는구나."
혈교는 정말 강했다.
특히 무공과 사이한 술법을 자랑하던 혈교주는 당시의 그녀로서도 승부의 확신을 내기 어려운 상대였다.
그런 혈교가 사실상 한 명의 여인의 손에 멸문당했다.
감히 온 세상을 그들의 피로 물들이겠다는 오만한 생각 때문에, 겁도 모르고 잠자코 있던 마교를 건드렸고 나와서는 안될 괴물이 그 걸음을 꺼내게 만들었다.
만일 혈교가 마교를 건드리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지금 중원은 혈교의 손 위에 올라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은인이기도 한 천마이지만
그것과 이것은 다른 문제였다.
만일 그녀와 마교가 그동안의 다른 천마처럼 중원을 정복하겠다는 목적을 이루고자 그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면 자신은 그 앞을 막아 서야 한다.
중원을 위해서라도.
"내가 들어가 있던 사이 중원에 무슨 일은 있었느냐?"
"평화로웠습니다. 녹림이나 수적들도 요즘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고요."
"다행이구나."
검후는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러고 보니 좋지 않은 소식은 있습니다."
"무엇이냐?"
"섬서에 '무면금귀'라 불리는 점쟁이가 나타났습니다. 감히 사이한 요술로 천기를 우롱하는 건방진 자입니다."
화산파 사람들이 대게 그러하듯 여인 또한 무면금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 또한 도사였으니.
"그자가 요술로 사기를 쳤더냐?"
"..그건 아닐 겁니다. 용하다는 소문이 자자하기는 한 모양이니."
"그자가 위험에 처한 자에게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했더냐?"
"..가격엔 차이 없이 전부 은자 두 냥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자가 요술이나 그렇게 번 돈으로 패악질을 부렸더냐?"
"..매일 술과 노름판을 전전하다고 들었습니다만 딱히 남과 갈등을 일으킨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디가 악인이라는 것이냐?"
사기를 치지도 않았고 타인의 절박함을 돈벌이에 이용하지도 않았고 패악질을 부리지도 않았다.
아직 선인이라곤 할 수 없지만 악인 또한 아니다.
"악한 행동은 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감히 하늘의 기운을 삿된 돈벌이에 이용.."
"됐다. 우리가 무슨 천기의 주인도 아니고 그가 그의 힘으로 얻은 능력으로 돈을 번다는 데 무슨 자격으로 그것에 간섭하겠느냐?"
"그, 그건.."
"그가 악한 행동을 저지른 뒤라면 모를까 적어도 지금 들은 것으론 내가 볼 때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이는구나. 만일 그를 이용해 불길한 미래를 피해갈 수 있던 사람이 있었다면 오히려 이로운 일 아니겠느냐?"
"..."
"네 마음은 이해 한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들은 것 만으로는 그를 딱히 악인이라 할 수 없구나."
"..죄송합니다."
"무얼. 나는 나 때문에 매일같이 바깥 구경도 못하고 있는 너에게 더 미안하구나."
검후는 이야기를 마치고 폐관수련에서 나왔음을 알리러 향했다.
간만에 마시는 바깥의 공기와 함께 그녀의 몸 속에 들어온 무면금귀의 소식에 그녀의 흥미가 향한 것은 그녀만 아는 일이리라.
"흡혈귀요?"
당아영과 객잔에서 식사를 하며 나눈 대화에 익숙한 단어가 나와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네. 흡혈귀(吸血鬼). 이름 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피를 몽땅 빼가는 괴인에 대한 소문이에요. 처음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건 한 달 정도 됐고요."
"흠.."
-후룩
지금이야 중원 사람들이 지은 별호겠지만 내 입장에선 워낙 익숙한 단어다.
그야 게임, 영화, 소설 어디든 빠짐없이 나오는 단골 손님이니까.
여기가 판타지 세계였다면 그런 흡혈귀가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겠지만
'여기 무림 아니었나.'
무림에 왜 흡혈귀가 있단 말인가.
아마 그냥 성격 나쁘거나 그런 류 무공을 익힌 인간이겠지.
아니 빙의자나 판타지와 연결된 상점도 있는 마당에 뱀파이어라고 없을 것도 없나?
아무튼
"그래서 그를 토벌하고자 토벌대가 꾸려졌는데.. 저도 그쪽에 포함됐어요."
"소저가요?"
"당신이 저를 너무 쉽게 봐서 그렇지 저도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라고요?"
확실히 대단한 사람은 맞았다.
당대 최고의 후기지수 중 한 명이니.
"그래도 섬서엔 다른 고수들도 많지 않습니까?"
"아. 흡혈귀가 한 명이 아니라서요. 똑같은 현상이 다른 지역들에서도 일어나고 있어서.. 제가 가는 건 그중 하나에요. 마침 추정 무위도 일류고요."
"아하."
그래도 아직 당아영이 토벌대에 합류했다는 데에는 조금 의문이 남아있었다.
그동안 본 그녀의 성격은 마냥 정의롭다고만 하기는 어려웠다.
자신의 이익에 대해 계산기도 굴릴 줄 알고 대가 없는 호의를 여기저기 뿌리고 다니는 사람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인 것 같긴 하지만 정의감만 앞선 인물은 아니라는 건데..
"보상이 꽤 후한가 보네요?"
"후후."
아니나 다를까 토벌대에 마냥 정의감 만으로 합류하는 게 아니었다.
"무림맹에서 꽤 후한 보수를 약속했어요. 그리고 원래 이런 일은 처리하고 나면 명성도 쌓이기 마련이죠. 당가의 후기지수가. 독봉이 흡혈귀를 물리쳤다는 그런 명성이요. 명성이 올라가면 자연스럽게 공식 석상에서의 발언력도 올라갈 거고요."
"다른 후기지수들도 많지 않습니까?"
"그야 우리 사천당문의 무공이 상대를 상처 없이 제압하거나 죽이는데 특화되어있으니까요. 무림맹에서는 단순히 흡혈귀를 토벌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에요. 혹시 20년 전 멸문당한 혈교의 잔당이거나 그와 연관이 있을까 연구하려는 생각이죠."
"아."
이렇게 생각하니 이해가 됐다.
인체 연구라고 하니 뭔가 꺼림칙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원래 이런 세상이다.
특히 혈교의 흔적에는 예민하다고 들었으니까.
"사실 개인적으로는 정말 혈교와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보수와 명성을 전부 챙길 수 있는 기회인데 누가 거절하겠어요?"
"그러면 언제쯤 가십니까? 당분간은 말 상대가 없어서 꽤 외롭겠네요."
"아. 당신도 같이 가요."
아 나도 같이 가는구나.
...
"네?"
뭐요?
"소저. 제가 아무리 소저한테 암기술을 조금 배우긴 했다지만 삼류 무사도 상대 못합니다. 그런데 제가 거길 왜.."
"물론 무턱대고 같이 가자는 건 아니에요. 제안이죠. 일단 읽어보세요. 이 토벌대의 책임자가 보낸 편지니까."
당아영이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나야 원래 망토를 입고 다닌다지만 대체 저 옷에 암기 같은 걸 숨길 곳이 얼마나 있는 건지는 항상 의문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옷이 묘하게 얇아진 것 같기도 하고.'
처음 봤을 때에 비해 옷이 얇아졌다.
예전보다 몸의 굴곡이 좀 더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마 한 한 달 전 쯤부터 조금씩 바뀌었던 것 같은데
'요즘 날이 덥긴 하지.'
원래 지구에서도 여름에는 더우니까 어쩔 수 없이 옷이 얇아진다.
무림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경지 높은 무인들은 추위와 열기에 내성이 있다고 들었지만 아직 당아영은 그 정도 경지가 아닌 걸거다.
"..뭔가 무례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기분 탓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