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250)

"뭐 빚으로 남겨 둘게요. 나중에 적당히 빚이 쌓였다 싶으면 요청할 테니까 각오 하세요."

"물론이죠!"

괜히 속여서 귀속 시키는 것보다 좋게 좋게 가는 게 낫겠지.

앞으로도 계속 볼 사이니까 잘하면 이대로 빚을 쭉 쌓아서 합법적으로 그를 당가에 귀속 시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다.

"아. 그래서 술 맛은 어떠세요? 맛있지 않아요?"

"뭐.. 술 맛은.."

그렇게 비싼 술은 아니었던 만큼 그처럼 호들갑을 떨 정도는 아니긴 했지만

"적당히 맛있네요."

"마음에 들어한다니 다행이네요."

분위기가 맛있었다.

가끔식 회상하곤 한다.

만약 이때 그에게 그대로 수작을 부렸다면 어땠을까.

그 뒤에 그가 3년 안에 돌아가 봐야 하는 사람이라는 걸 좀 더 일찍 알았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 * *

"으그으윽..!"

"그러게 말 들으라니까."

나는 당아영의 팔에 몸이 얽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금나수법을 배우기로 하고 첫 수업.

"금나수법이 손을 이용한다고 해서 정말 손만 쓴다고 생각하면 곤란해요? 다리는 물론이고 몸의 관절 부위 하나하나 전부 신경 써야 제대로 된 금나수법이라고 할 수 있다고요?"

지금 이런 상황이 된 데에는 내 고집이 컸었다.

아무래도 금나수법을 배울 때 까지 망토를 고집했던 건 너무 욕심이었던 모양이다.

몸을 움직이기에 적합하지도 않고 체형을 가려주는 만큼 하늘하늘한 탓에 너무 쉽게 잡힌다.

물론 경지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나는 것도 있겠지만 뭘 배워보기도 전에 계속 제압당해서 드러눕혀지는 상황이니 원.

"알았어요. 벗을게요. 도저히 안되겠네 이거."

그냥 이번 만큼은 고집을 꺾기로 했다.

기껏 당아영이 시간 내서 와줬는데 제대로 못 배우면 그건 그거대로 실례겠지.

"..벗는다고요?"

"네.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좀 갈아입고 올 테니까."

어딘가 멍한 기색의 당아영을 뒤로 하고 가게 안에 있는 다른 문을 열었다.

따로 탈의실을 만들어두진 않았지만 쓰는 곳이 탈의실이지 뭐.

-스륵

'꽤 오랜만에 벗어보네.'

이제 거의 한 몸처럼 느껴지는 망토를 벗자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은둔자의 망토]

[아무도 그 과거를 알지 못하는 은둔자 '허미트'. 신출귀몰한 움직임으로 죽지 않는 자들과의 전쟁에서 큰 활약을 펼친 영웅 중 한 명. 그가 끝내 죽음을 잃은 자들 사이에서 여신의 품으로 돌아갈 때 까지 아무도 그의 본 모습을 알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내가 이 망할 세계에 오면서 유일하게 가진 것.

상점창.

상태창 만큼은 아니어도 충분히 쓸만하다.

이 피와 철의 대지에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이다.

이것마저 없었으면 정말 삶의 의지도 잃었을 텐데 말이다.

'정말 뒤지게 오래 걸렸지.'

상점에서 사용하는 재화의 단위는 포인트고

이 망토의 가격이 2000 포인트다.

무림 세계에 왜 상점창이나 영어가 있는지는 묻지 말자. 그렇게 따지면 애초에 갑자기 이런 세계로 빙의 당한 것부터 이상한 일이니까.

참고로 포인트의 획득 방법은 두 가지 뿐이다.

하나는 시간.

하루에 1포인트.

그리고 두 번째는 돈.

금화 1냥에 1포인트다.

10년 동안 산속에서 지내면서 금화 하나 못 만져 봤으니 사실상 첫 번째 방법으로 2000일. 6년 조금 안되는 시간 동안 모은 포인트로 겨우 산 거다.

이렇게 까지 얼굴을 드러내는 걸 거부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스승님을 만나기 전에 워낙 험한 꼴을 당할뻔 한 것도 있지만

[얼굴을 드러내지 말거라. 나중에 그 얼굴 때문에 큰 화를 입을 운명이니.]

스승님이 봐준 내 점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내 스스로의 점을 볼 수 없으니 스승님이 봐줄 수밖에 없다.

그 뒤로 꾹 참고 힘들게 모으고 모아서 산 게 이 망토다.

겉으로 보기엔 불편해 보여도 은근 편하고 여름에는 바람도 잘 통하며 겨울에는 따뜻하기까지 한 만능 옷이다.

빨래도 안 해도 된다.

허미트라는 사람이 왜 안 벗고 다녔는지 이해가 될 정도였다.

'마법서 같은 거는 안 파는 게 아쉽네.'

상점창을 대충 훑어보면 연결된 세계가 판타지 세계라는 게 눈에 보인다.

그래서 처음에 '무공은 못 익혀도 마법은 익힐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마음에 눈에 불을 켜고 찾아봤는데 없었다.

물론 마법서 외에도 눈에 띄는 물건들은 많다.

그중 단연 제일 눈에 잘 띄는 물건은 항상 상점창 최상단에 위치해 있는 이 녀석.

[귀환]

[가격:10000포인트]

금화로 만 냥. 시간으로는 약 27년을 요구하는 녀석이다.

내가 이 세게에 온 뒤로 매일 금화 하나 씩 벌었어도 못 사는 금액.

솔직히 저걸 살 때 쯤이 된다면 굳이 지구로 귀환하고 싶을까 싶다.

그 정도로 포인트를 쌓을 여유가 있다면 이 세계에서도 꽤 잘 살고 있다는 뜻일 테니.

'아 기다리겠다.'

괜히 잡생각을 하느라 갈아입는 시간이 길어졌다.

움직이기 편하도록 입느라 체형이 겉으로 드러나기는 했지만 얼굴을 보여줄 일은 없다.

[팬텀의 가면]

[한때 대륙 제일의 미녀로 손꼽히던 백색 마탑의 마탑주가 피를 갈구하는 죽지 않은 자의 손톱에 당한 뒤 썩어 들어간 얼굴을 가리기 위해 만들어진 가면. 그녀의 바람대로 그녀가 여신의 품으로 돌아간 후에도 그녀의 흉측하게 변해버린 얼굴은 누구도 볼 수 없었다.]

내가 원하지 않으면 절대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는 가면이다.

참고로 이 녀석은 500포인트.

다만 은둔자의 망토와 다르게 쓰면 얼굴에 불편한 느낌이 있어서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그냥 은둔자의 망토를 쓴다.

-덜컥

'이걸로 얼굴도 가렸고.'      

준비가 끝났다.

당아영이 내 얼굴을 궁금해 하는 모양이던데 미안하지만 그건 곤란했다.

정말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자 당아영이 눈에 불을 켜고 내 몸을 훑었다.

금방 내 얼굴의 가면을 보고 아쉬운 소리를 냈지만 다시 매우 놀란 표정으로 내 몸을 계속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저기.. 혹시 나이가.."

"약관 지났습니다."

내 저럴 줄 알았다.

"..그 몸으로요?"

예상하긴 했지만 조금 기분 나빴다.

나라고 안 크고 싶어서 이런 몸인 게 아니다.

안 그래도 남들보다 작고 약한 몸인데 키까지 자라다가 멈췄다.

"지학때쯤부터 키가 더 자라질 않더라고요."

"어.."

당아영은 뇌에 버퍼링이라도 걸렸는지 삐걱거리고 있었다.

"분명 망토 쓰고 있을 때는 이것보다는 키가 조금 더 컸.."

"깔창 좀 꼈어요. 됐어요?"

신비로운 콘셉트인데 원래 키대로 땅딸막해봐야 우스울 것 같아서 깔창 좀 깔았다.

절대 숨기려고 그런 게 아니다.

"그쪽이니까 보여주는 거예요? 어디 가서 소문내기만 해봐요. 빚이고 뭐고 다신 안 봐요."

섬서의 그 유명한 점쟁이가 사실 알고 보니 키가 오 척도 안되는 꼬맹이라더라.

이런 소문이 돌면 범인은 당아영밖에 없다.

어디 가서 밝힌 적 없으니까.

"저기 그러면 저한테는 왜.."

"제대로 배우려면 망토 벗으라매요? 벗으래서 벗었죠."

"..."

당아영은 정말 적잖이 당황했는지 제대로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솔직히 나라도 놀랐을 것 같긴 하다.

그 수상한 외형의 망토 안쪽이 사실 이런 꼬맹이라니.

가면까지 없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당황시킬 자신이 있지만 겨우 그 정도 재미를 보자고 리스크를 감수할 수는 없었다.

"믿고 있기도 하고요. 어차피 지금 바깥 세상에 친구라고 할 수 있을만한 사람이 소저 밖에 없거든요."

"..저밖에 없다고요?"

"뭐.. 주점에 있는 양반들은 어차피 술 없으면 대화도 안 통하는 양반들이라 친구라고 하기도 뭐하고. 제대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소저 한 명이에요."

남궁진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알려면 못 할 것도 없지만 굳이 남정네를 찾아가고 싶지도 않고.

"..."

"소저?"

"아, 아뇨.. 그.. 아니에요."

어째 손을 뒤로 감추는 모습이 수상했지만 의심병이라고 생각했다.

* * *

"하아.. 하아.."

"허억.. 허억.."

방 안에는 두 남녀의 헐떡이는 소리가 퍼지고 있었다.

하나는 나의 것이었고 하나는 그의 것이었다.

금나수법을 알려주기 위해 서로 계속해서 몸을 섞었고 당연하지만 대부분이 내 압도적인 승리였다.

"흐읍!"

그가 내 지친 모습을 보고 힘을 쥐어 짜내 손을 뻗어왔다.

굉장히 느리고 어설픈 동작.

알려준 기술의 반의 반에 반도 제대로 싣지 못한 어설픈 동작이었다.

-탁

손을 가볍게 낚아 채고 그의 다리 사이로 다리를 집어넣자 그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지금까지 수없이 당한 똑같은 수법이거늘 전혀 대처법이 늘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그냥 두면 그가 땅에 몸을 부딪힐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반대쪽 팔을 뻗어 그의 가슴팍을 감쌌다.

그 자세에서 내 얼굴이 그의 목과 밀착하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후욱

그의 몸에서 난 냄새가 코에 거의 바로 들어왔다.

분명 땀 냄새는 남녀 불문하고 불쾌한 것일텐데

정신 나갔냐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지만 조금 향기롭게 느껴졌다.

'하아.. 하아..'

한 두 번이 아니다.

몸 안쪽에 뭔가 쌓여가는 느낌이다.

점점 머리가 멍해지고 가끔씩은 정말 잠깐 동안 의식이 까매진다.

그의 가느다란 팔과 다리가 보였다.

연약하디 연약한 몸이 보였다.

평생 방에서 글만 읽은 공자라고 하더라도 이보다 고울 수는 없다.

남자라고는 믿기 힘든. 웬만한 여자보다 곱고 부드러운 피부.

그런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밟혔다.

'몸이 뜨거워..'

몸을 움직여서 나오는 열기가 아니었다.

그보다 좀 더 깊숙한. 생물로서의 본능과 관련 있는 무언가가 요동치고 있었다.

"저기 소저 이제 이것 좀 놔주.."

놓기 싫다.

좀 더 이대로 있고 싶다.

지켜주고싶고보듬어주고싶고쓰다듬고싶고끌어안고싶고핥고싶고음미하고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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