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250)

"크으--!"

진짜 어떻게 삶이 이렇게 즐거울 수가 있을까.

이러다 나중에 천벌 받는 거 아닐까.

"고기도 있고.. 술도 있고.. 이게 주지육림이지.."

"형씨. 주지육림이라고 하려면 여자도 있어야지."

"여자라.."

강호에 나온 지 반년이 지났지만 아직 그동안 여인을 안아보진 않았다.

안으려면 얼마든지 안을 수 있다. 돈도 충분히 벌고 지금 형편이면 창관의 창부를 한번에 2~3명은 고용할 여유도 있는 형편이다.

"..그건 딱히 생각 없네요."

그래도 딱히 그렇게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몸 파는 여자에 대한 거부감 때문일까.

아니. 그렇게 생각해도 지금까지 여인을 안을 기회는 제법 있었다.

매일매일을 술과 노름판에서 보내는 만큼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자연스럽게 남녀들 사이엔 추파도 오고 가는 법이다.

이쪽에도 몇 번 왔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충분히 매력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그런 여인들이.

그러나 전부 거절했던 기억밖에 없다.

"..."

-후룩

지금 이 순간에 그 괴팍한 여자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기껏 10년 만에 탈출해서 잘 놀면서 잘 즐기고 있구만.

'아하.'

그 외모에 너무 익숙해져서 눈이 높아져서 그렇구나.

하긴. 무려 10년 동안 그런 여자를 매일같이 봐왔으니 눈이 보통 눈일 리가 없다.

길거리에 다니는 웬만한 여자는 추녀로 보일 정도였다.

하여간 기껏 밖에 나왔는데도 도움 되는 게 없다.

설마 폐관수련에 들어간 이후로도 이런 식으로 내 삶을 방해하다니.

"..."

아주 약간.

아주 약간이지만

오늘은 유독 외로운 잠자리가 차갑게 느껴질 것 같았다.

.

.

.

-비틀비틀

"어우. 역시 비싼 술은 다르네."

술 이름이 여아홍이라고 했던가?

원래 비싸서 주점에도 자주 안 들여놓는 술이랬는데 이번에 들어왔다 길래 먹어보니까 역시 보통 탁주랑은 맛이 달랐다.

오늘 그 화산파 여인이 준 은원보가 아니었으면 아마 나도 못 샀을 정도로 비쌌다.

'그 아저씨는 그런 건 또 어디서 구해왔대..'

그렇게 비싸 서야 나같이 돈 안 아끼는 주당이 아니라면 팔 상대도 거의 없을 거다.

어쩌면 애초에 나를 생각하고 구해왔을 수도 있고.

"삶 진짜 재밌네.."

점을 보면서 손님들의 사연을 듣는 재미도 있고. 봐준 뒤에 손님의 반응을 보는 재미도 있고.

돈 버는 재미, 술 마시는 재미, 주점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보는 재미와 노름판의 스릴까지.

똑같이 반복되고 있지만 그야말로 완벽한 내 하루 일과였다.

그러니까 더 살고 싶었다.

이 위험천만한 세상에서. 최대한 살고. 또 살아서 이런 즐거움을 계속 즐기고 싶다.

'꽤 순진하게 믿어주네..'

그걸 위한 거짓말이다.

무공 하나 익히지 못한. 일반인 하나 제대로 이길 자신 없는 나약한 요술쟁이가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강자들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

최대한 소시민적으로. 뭔가 특별한 가치가 느껴지지 않도록. 그렇게 살아야 한다.

'기연이나 보물에 천지신명께서 미리 정해두신 주인이 있다고? 천운은 준비된 자에게만 온다고?'

거짓말이다.

결국 기연은 기연이고 보물은 보물이다. 그냥 그 자리에 놓여져 있을 뿐이고 그걸 발견한 자가 가질 뿐이다.

이건 그저 나에게 기연이나 보물을 노리는 자들이 접근하는 걸 조금이나마 막기 위한 수일 뿐.

적어도 내가 알기론 저런 제약 같은 게 없다.

'내가 못 가지면 남들도 못 가져' 식의 의도가 아니다.

만약에 내가 남들에게 기연이나 보물의 위치를 알려줄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때부터 나는 더 이상 '조금 용한 점쟁이' 로 남을 수 없을 테니까.

그걸 막기 위한 거짓말이다.

살아남기 위한 연기다.

섬서의 '무면금귀(無面金鬼)'는 그런 사람이어야 했다.

돈이 많으면 안된다. 내가 내 능력으로 돈을 벌었다고 생각할 거다.

강하면 안된다. 내가 내 능력으로 기연을 찾았다고 생각할 거다.

뭐, 사실 다 핑계다.

결국 삶을 즐기려고 주점에서 매일매일 술을 퍼 마시면서 노름으로 돈을 날려 먹은 뒤에 돈이 많으면 안된다고 하는거다.

단전이 망가지고 몸도 좋지 않다는 이유로 운동도 제대로 하지 않아 놓고 강하면 안된다고 하는거다.

결국 이 세상에서 내가 아무리 금력이나 무력을 쌓는다고 해봤자

'진짜'들 앞에서는 어린애의 재롱이나 다름 없을 테니까.

'..뭐 그래도 삶이 재밌으니 된 것 아니겠어?'

스승님. 이 불초 제자는 바깥 세상을 잘 즐기고 있습니다.

산에 있던 시절보다 훨씬 즐길 거리도 많고 사람도 많아서 재밌어요.

근데 오늘은 왠지 스승님이 그리운 밤이네요.

..잘 지내세요?

* * *

-10년 전-

[저기.. 스승님..? 저는 어디서 자면 될까요?]

[아. 그러고 보니 집에 이불이 하나구나.]

[...네?]

[미안하구나 아해야. 원래 다른 볼일 때문에 내려갔다가 예정에도 없이 너를 거두어온 것이라 미리 준비하지 못했구나. 뭐. 어차피 이불의 크기도 충분히 둘이 덮을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냥 이쪽으로 오거라. 같이 덮자꾸나.]

[...]

[왜 그러느냐? 설마 여가 너의 몸이라도 노리는 거라고 생각하느냐?]

[.....]

[착각하지 말거라. 여의 눈에 너는 옥상에서 떨어진 메주처럼 느껴지니.]

정말 말도 안되는 말이었지만

아마 그때는 그녀의 압도적인 외모를 보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저 정도로 예쁘면 나도 정말 그런 식으로 느껴지는 거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슬슬 침상에 들 시간이니 미리 이불을 데펴놓겠습니다.]

[그렇게 해라.]

그리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서

[스승님. 이제 저도 어느덧 지학인데 여자랑 같은 이불을 계속 쓰는 건 아닐 것 같습니다. 본래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러면 네가 직접 장작을 패거나 짐승을 사냥해 오거라. 내 그걸 팔아 네 이불을 사다 줄테니.]

[...]

흘러서..

[스승님. 요즘 악몽을 꿉니다. 누군가 저를 등 뒤에서 묶고 제 몸을 더듬거리는 꿈이었는데 혹시 불길한 징조 아닐까 걱정됩니다.]

[귀신이구나. 절대 거부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할 것이다.]

흘러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출은 옳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탁

"드시죠.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능이 있는 차입니다."

"..."

나는 눈앞의 사내에게 차를 건넸다.

이 사내에 대해 간결히 설명하자면 이주 전에 나한테 상행에 대해 점을 보러 왔던 사내로 그땐 지금과는 다르게 친구 둘과 함께였었다.

그래. 였'었'다.

"잘 풀릴 거라고 했었잖아.. 당신이.. 당신이.."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군요."

그때 난 그들에게 상행이 잘 풀릴 거라고 얘기했고

그 말에 사내들은 싱글벙글 가게를 나갔다.

그리고 이 주 뒤인 지금. 세 명이 한 명이 되어 돌아왔다.

'...'

항상 말하긴 한다.

나는 그저 하늘의 기록을 엿보는 요술쟁이에 불과하니 절대 맹신하지 말라고.

하지만 이 말을 그저 형식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나를 무슨 예언가 인줄 안다.

그저 점성술이라는 요술을 조금 부릴 줄 아는 일개 점쟁이인 나를.

"어떻게 위로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뭐라도 말해봐. 변명이라도 좋으니까. 그때처럼 그 입을 놀려 보라고."

증오, 분노, 울분이 섞인 목소리.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천지신명께서는 처음부터 하나의 이야기만을 준비하시지 않습니다."

사내가 원하는 대로 변명이라도 해보려고 한다.

점이 틀리는 이유를.

"제가 엿볼 수 있는 기록은 그저 가장 가능성이 큰. 가장 겉으로 드러나는 유력한 이야기를 엿볼 수 있는 것일 뿐. 제가 엿볼 수 없는 줄기의 이야기가 무수히 많이 뻗어져 있습니다."

하늘은 허술하지 않다.

하나의 이야기만을 준비하고 그 이야기대로만 흘러가게 두지 않는다.

항상 다른 가능성의 줄기를 열어두고 만약 그대로 흘러가게 된다면 그 줄기에서 기록을 이어간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당장 가장 유력한 이야기일 뿐.

하늘이 준비한 얇은 줄기의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이 존재한다.

그 누구도 감히 읽을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셨기를."

"...물어내. 보상 하라고.."

"..."

엄밀히 따지자면 내가 그의 상행의 실패와 친구들의 죽음에 대해 책임질 의무는 없다.

그래도.

-찰그락

"은자 20냥입니다. 그렇게 큰 금액은 아니지만 지금 가진 돈의 전부입니다."

이 정도 위로는 해주는 게 도리에 맞겠지.

내가 점을 봐줬고

그 점이 틀려서 친구들이 죽었으니까.

"웃기지 마.. 당신 돈 잘 버는 거 알고 있어.. 무면금귀라고.. 매일 밤마다 비싼 술도 쳐 마시고 노름도 다닌다며.."

"하루에 번 돈을 그날 다 쓰거든요."

"..."

사내의 말이 무례해지고 있었지만 참았다.

나라도 친한 친구를 잃었다면 저런 반응일거다.

"화가 풀릴 때까지 계셔도 괜찮습니다. 차도 원하시면 말씀 하시죠. 얼마든지 더 드릴 테니."

"..됐어. 그냥 당신을 보기도 싫으니까. 귀신같이 생겨 가지고는.."

"하하.. 저도 제 외모를 별로 안 좋아하긴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가리고 다니는 거지요."

"망할새끼."

사내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으로 향해 걸어가는 사내의 입에서 무시할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그쪽이 무사히 끝날 거라고 하길래 고용했던 무사들도 다 취소하고 그만큼 상품을 더 올렸단 말이야. 젠장.. 순 돌팔이새끼 같으니라고."

...잠깐만.

"무사.. 없이 갔다고요?"

"그래 이 돌팔이야."

상행을 가면서 무사도 고용 안 했다고?

"이 미친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아니.. 아니.. 잠깐만. 그것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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