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 금을 준다고 해도 그럴 생각은 없네요."
설령 잠깐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해도 그 뒤에 잇따를 고생이 더 걱정된다.
앞으로도 3년 안에 스승님이 있는 산에 돌아가기 전에는 이걸 벗을 생각은 없다.
"대체 안에 뭐가 들었길래 그렇게 비싸게 굴어요?"
"말했잖아요. 엄청 못생겼다고."
"냄새가 나는데.."
"그러고 보니 어제 술을 좀 많이 마시긴 했죠. 몸에 술냄새가 배었나?"
스승님이랑 지내면서 여자의 감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알고는 있었지만 작게 몸에 소름이 돋았다.
냄새는 무슨 냄새야. 그런 게 어딨다고.
-삐질삐질
저 거머리 같은 여자를 어떻게 떼어내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
-똑똑
"저기.. 안에 계신가요?"
"아이고 어서 오세요 손님!"
구원의 동앗줄이 내려왔다.
.
.
.
손님은 생각보다 예쁜 여자'들'이었다.
"와.. 진짜 망토 안쪽이 하나도 안보이네.. 신기해라."
"내가 말 했잖아. 눈에 내력을 집중해도 안 보인 다니까? 이제 좀 믿겠어?"
"..저기 손님. 구경료는 따로 있습니다만."
"구경료도 있어요?"
"예.. 전에 들어와서 점은 안보고 계속 피풍의만 보다가 가신 손놈샊..아니 손님 분이 있던 뒤로 구경료를 넣었습니다."
여자들의 2명은 어느 소속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머지 한 명은 어디 소속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째릿
나를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보이는 눈빛 하며 소매에 매화가 새겨진 새하얀 무복.
화산파다.
무당파나 곤륜파 만큼은 아니지만 저쪽도 일단 도사인 만큼 천기를 가지고 노는 이런 요술은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몇 번 화산파 사람들을 만나보긴 했었지만 대게 저 여자와 비슷한 반응이었으니까.
"구경료는 얼만데요?"
"반 시진에 은자 10개 입니다. 참고로 인당으로 책정합니다."
"왜 이렇게 비싸요?!"
"괜히 구경하지 마시고 점 보고 가시라는 의미죠. 점 보는 게 더 쌉니다."
참고로 점 한번 보는 게 은자 2개.
좀 비싼 가격이긴 하지만 지불 못할 금액도 아니다. 애초에 지구에서 처럼 심심풀이로 보는 점이 아니라 진짜 효용성이 있는 점이니까.
자신의 미래를 알고 미리 대비할 수 있다는 것에 은자 2개면 오히려 싼 편이다.
무림인들이 많이 다니는 동네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돈이 많기도 했고.
'마음 같아선 큰 거 한탕 해보고 싶긴 한데.'
괜히 일확천금을 노리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아주 큰 돈은 아니지만 즐겁게 놀기엔 충분한 금액으로 안정적으로 수익을 올리는 게 낫다.
그리고 뭐 일확천금의 기회도 언젠가는 오겠지.
바로 지금처럼.
"..나는 당신에게 점을 볼 생각 따위 없어."
화산파의 무복을 입은 여인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러면 점집에 왜 왔는데.'
내가 이래서 도사들이 싫다.
천기를 읽는 걸 전세 낸 것도 아니고. 내가 내 고생해서 얻은 기술로 돈 좀 벌겠다는데. '감히 천기를 우롱하는 요술을 돈벌이에 이용해?!' 이러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다.
"네. 그러면 저 소저분은 일각 분의 구경료만 내시고.. 다른 두 소저는.."
"내 벗들에게 요술을 들이밀지 마."
"..두 분도 구경료만 내시고 나가실렵니까?"
"아니.. 그.. 그게.."
"됐어. 이런 거 보지 마."
화산파의 여인이 안절부절한 표정의 두 여인의 말을 끊고 나에게 뭔가를 던졌다.
이게 뭔가 싶어 보니까..
"..오."
은원보였다.
하나에 은자 수십 개 값어치는 하는 물건.
이거면 오늘 장사는 접어도 이득이다.
"정 점이 보고 싶으면 차라리 내가 다른 도사분한테 부탁해볼게 그러니까 이런 요술엔 손 대지 마. 가자."
"으, 응.."
내가 망토 안쪽으로 싱글벙글 웃는 사이 여인이 친구들을 데리고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가기 전
"무면금귀."
"?"
화산파의 여인이 나가기 전 문 앞에 서서 나를 불렀다.
"그런 요술로 사람들을 희롱하는 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뭔가 했더니 그냥 시비였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얼굴 없는 돈을 밝히는 귀신이다.
"안녕히 가십쇼!"
그리고 매출 많이 올려주는 손님은 왕이고.
왕이 가신다는 데 당연히 배웅해야 하지 않겠나.
.
.
.
"와.. 은원보.. 이게 얼마 만이야.."
나는 탁자에 은원보를 올려놓고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햐.."
이거면 술이 몇 잔이야..
이 정도면 평소에 비싸서 못 먹었던 것도 시켜볼 수 있는 거 아니야?
이런 행복한 상상에 잠긴 사이에
"..딱히 기분이 상해 보이진 않네요?"
천막 안쪽에 기척을 감추고 숨어있었던 당아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그 매화무늬 도복 입은 여자. 딱 보니까 화산파던데. 당신한테 시비 걸려고 온 거 아니에요? 점 보러 와서 점 볼 생각 없다면서 구경료만 내고 돌아가는 게?"
"네? 그게 왜요?"
"..왜냐뇨? 자존심 상하지 않아요?"
"일은 안하고 돈은 벌었는데 자존심이 중요해요?"
한두 푼도 아니고 무려 은원보다 은원보.
대목에 하루 종일 장사했을 때 나오는 매출을 일각 동안 번거란 말이다.
"..새삼 왜 당신의 별호에 금귀가 들어갔는지 알 것 같네요."
"저는 그 별호 별로라니까요."
"별로라면서 아까 무면금귀라고 부르니까 바로 반응하던 데요?"
"돈 많이 주는 손님은 왕입니다. 왕이 부르는데 뭐라고 부르던 대답 해야죠."
"..참 여러 의미로 대단하네요."
왜. 당신은 돈 많으니까 모르겠지만 이쪽은 악착같이 벌어서 악착같이 놀아야 하는 입장이라고.
벌써 반년이나 지났단 말이야.
"혹시 자존심 상했을 까봐 걱정했던 제가 잘못이네요. 그냥 거기서 제가 모습을 드러내기만 했어도 다들 설설 기었을텐데."
"두 명은 그렇다 쳐도 화산까지 말입니까?"
"..혹시 당신 저 몰라요?"
"? 당아영 소저 아닙니까. 사천당문의 여식."
"..그게 끝?"
"뭐 더 있습니까? 혹시 별호라도 있으세요?"
"허.."
왜. 뭐가.
뭔데. 설명해줘야 알 거 아니야.
이날 기분이 상한 채로 돌아간 당아영이 무림 최고의 후기지수들에게 붙는 별호인 봉황 중 하나였다는 걸 알게 되는 덴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날이 저물고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일을 마치고 피로를 풀고 또다시 반복될 다음의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하는 술시(戌時)
주점은 어느 날과 똑같이 시끄러웠다.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드는 소리, 취기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몸싸움을 시작하는 이들, 그런 그들을 애워 싸고 환호하는 관객들.
그리고 웃고 우는 자가 갈리는 노름판까지.
"봤지! 봤지!! 이거 내가 이긴 거 맞지?!"
"아이고 이거 또 졌네요."
"크하하! 오늘도 자알 놀다 갑니다 점쟁이 양반!"
내 상대를 하던 사내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름 익숙해지긴 했는데 마작은 역시 어렵다.
차라리 지구에서 게임으로 몇 번 해본 적 있는 포커나 블랙잭이면 조금 익숙하지만 무림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툭툭
"허이고, 오늘도 잃으셨소? 형씨는 어째 이기는 날을 본 적이 없구만."
"가끔 천운이 따르면 이기긴 합니다. 승률은 한 2할 정도 나오는 것 같은데."
"허이구, 그러면 남는 게 있긴 한가?"
"노름을 돈 벌려고 합니까. 재미 때문에 하는 거지."
선불로 미리 주문해 놓은 술을 들이켰다.
짜르르한 알코올이 식도를 찌르며 위장까지 내려가는 감각이 느껴진다.
"크.."
진짜 이게 삶이지.
지구에서 인터넷으로 온갖 문화를 다 즐기다가 이런 무림으로 떨어져서 산속에서 10년 동안 박혀있다 보니 지금의 삶은 천국이나 다름 없었다.
"근데 그 형씨..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오.. 형씨는 점쟁이인데 왜 매번 지는 거요?"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점쟁이가 고작 노름판의 수도 못 읽는 게 이상해 보입니까?"
"솔직히 조금 의문이긴 하지."
-조용
어느새 주변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허이구, 그게 또 궁금하다고 이렇게 숨까지 죽일 일인가.
-후룩
뭐, 별 거 없다.
"그러다 천벌받습니다."
내가 오래 살고 싶어서 하는 일일 뿐.
내 목표는 오래오래 살아서 이 재밌는 삶을 계속 즐기는 거다.
괜한 욕심 부리다 그 불씨를 꺼뜨리고 싶지는 않다.
"제가 정말 돈을 벌고 싶었으면 점집을 운영할게 아니라 기연이나 보물을 털고 다녔겠죠. 다 이유가 있어서 이럽니다 이유가~. 요술쟁이에게도 요술쟁이만의 고충이 있어요~."
"..뭐. 하긴. 우린 당사자가 아니니."
"천벌이라.."
내 말에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룩
뭐가 궁금하다고 그러나 했더니 겨우 저거였나.
"본래 기연이나 보물은 천지신명께서 그 주인을 미리 정해두신 것. 천운은 준비된 자에게만 온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저 같은 요술쟁이가 감히 그 영역을 침범하려 했다간 천지신명께서 노하십니다. 하늘께선 준비되지 않은 자의 탐욕에 민감하시거든요."
"..."
-꿀꺽
주변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다들 생각이 많을 거다.
자기가 기연의 주인이 될 거라 기대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괜히 기연을 욕심 내다가 내 말을 듣고 지레 겁을 먹은 사람도 있을 거다.
-피식
"자, 자. 즐거운 주점에서 뭐 그리 무거운 분위기를 잡고 그러십니까. 다들 그냥 하던 거 마저 즐기시죠. 한 낯 요술쟁이의 말에 너무 휘둘리지 마시고."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혹시 호응 안해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그동안 섬서에서 놀면서 친해진 몇몇 주정뱅이들이 같이 잔을 들어 올려줬다.
"건배-!"
아. 나도 처음엔 몰랐는데 중원에서 건배를 외치면 정말 잔을 다 비워야 한다더라.
-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