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벌은 또 어떤 종류인가?"
"하하, 알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천벌(天罰)
하늘이 내리신 벌.
감히 천기누설을 한 죄로 내려오는 천벌은 참 가혹하다.
"그리고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도 못합니다."
"그것 마저도 천기누설(天機漏洩)이니."
좋게 말하면 하늘의 기운을 받아 주변에 퍼뜨리는 것이오 나쁘게 말하면 감히 하늘의 기록을 엿보고 이에 반항하려 하는 것이니
그야말로 요술(妖術)이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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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서로 갈 계획이라고?"
"네. 아무래도 그쪽이 안전하고 장사도 잘 될 것 같으니까요."
"아무것도 없는 외부인이 혼자 가서 맨몸으로 시작하는 건 쉽지 않을 거네. 여기 오면서 인연이 있던 상인과 섬서에 있는 지인에게 소개장을 써줄 테니 가지고 가게. 여기 돈도 받고."
남궁진은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었다.
돈도 두둑히 받았고 소개 받은 상인은 마침 섬서로 갈 일이 있다면서 같이 마차를 탈 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게 긴 여정을 보낸 뒤에 나는 섬서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
나는 남궁진이 써준 소개장을 들고 학관으로 향했다.
이름이.. 뭐였더라..
"아 당아영."
성이 당인걸 보면 내가 아는 그 당가인가 싶다.
'인맥이 생각보다 넓나 보네?'
하긴 생각해보니 저쪽도 나름 오대세가 출신인데 당가에 인연이 있는 게 이상하진 않겠다.
그래도 학관에 재학중인 오대세가 사람이라니 조금 상상 이상이었다.
내 입장에선 굉장히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소문 좀 내 달라고 해야지.'
부푼 마음을 안고 학관으로 찾아가자 엄청난 규모의 건물들이 보였다.
확실히 엄청 중요한 건물이긴 한가보다.
'입구부터 경비병이 있네.'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하나 고민 중이던 순간 저쪽에서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사람을 좀 찾아왔는데요."
"아. 외부인을 함부로 들일 수는 없어서 말입니다. 혹시 편지 같은 게 있다면 전해드리겠습니다."
..생각보다 상냥한 경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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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했던 발언을 취소해야겠다.
남궁진은 생각보다 미친 새끼였다.
'미친놈미친놈미친놈미친놈'
"그래서.. 남궁진의 소개를 받고 오신 거 맞죠?"
나는 찻집에서 남궁진의 소개장을 받고 불려온 여인을 앞에 두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둘이 알고보니 일면식도 없는 사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친구인 것도 맞았다. 맞는데..
"설마 살면서 그 사람 이름을 다시 들어볼 줄은 몰랐는데.."
"..."
나는 그녀를 만나고 나서야 둘의 관계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예전에 저에게 고백했다가 차면서 친구로 지내자고 했었죠. 친구가 맞긴 하네요.]
'진짜 미친 새끼 아니야..'
남궁진이 학관에 재학 하던 시절
당아영에게 고백하고 차였다.
그리고 자퇴했다.
..이런 관계였다.
'혹시 나한테 뭐 불만 같은 거 있었나?'
천기누설때문에 말 못해준 걸 마음에 담고 있던 건 아니겠지?
아니 진짜 이게..
"그.. 사실 제가 남궁진과 그렇게 돈독한 사이는 아니고.."
"괜찮아요. 편지에 적혀 있었어요. 목숨을 구해주신 분이라고."
아니 썅. 이걸 쐐기를 박아버려?
'이래선 일이 꼬이는데..'
오면서 상인에게 듣기로는 아무 도움도 없이 이 근처에서 장사를 시작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땅도 땅이고 이미 상인들끼리 나름의 끈이 형성되어 있는 만큼 함부로 끼어들기 어렵다고.
그런데 이젠 도움을 못 받는 것도 아니라 훼방이나 놓지 않으면 다행이다.
'어떡하지? 무릎 꿇고 빌어봐?'
안 그래도 한정된 시간을 낭비할 순 없어서 비굴하게라도 굴어볼까 생각하던 중 의외의 말이 들려왔다.
"..뭐 그래도 이런 인연도 인연이긴 하겠죠."
"네?"
"그 인간이랑 별개로 당신이 능력 있는 점쟁이인 건 맞는 것 같으니까. 도와 드릴게요."
천사다.
완전 천사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당장 도와준다는 건 아니에요. 남궁진의 말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으니까요. 둘이 짜고 칠 가능성도 제 입장에선 완전히 배제할 수 없고요."
"아무렴요. 어떻게 증명하면 되겠습니까? 점이라도 봐드릴까요?"
"혹시 무슨 점이든 볼 수 있나요?"
"네. 웬만한 건 전부 가능합니다. 연애운도 가능해요."
"아뇨.. 그건 됐고.. 그.. 크흠.. 그게.."
당아영이 얼굴을 붉히면서 헛기침을 했다.
뭐 부끄러운 거라도 요청하려는 건가?
"곧 시험을 보는데.. 제가 무공 수련에 열중 하다 보니 필기 시험은 공부를 영 못해서.. 그.. 크흠.."
"..아."
결국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나 보다.
.
.
.
사흘이 지났다.
"확실히 능력 있는 점쟁이네요."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천기누설을 피하느라 최대한 돌려 말했는데 어떻게든 효과가 있었나 보다.
"땅이나 텃세 문제는 제가 해결해 놓을게요. 당신은 점집을 어떻게 꾸밀지 생각해 보세요."
"넵!"
나는 그녀의 말에 대략적으로 만들 점집의 구조를 생각했다.
처음에는 겨우 천막 하나만 생각했는데 이러면 좀 더 본격적으로 해도 되지 않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도중 다시 한번 당아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제 쪽에도 조건이 있어요."
"아, 당연히 들어 들어야죠."
"다른 생도들이 오더라도 저한테 해줬던 거는 해주시면 안돼요."
"........."
"분명 안 보이는데 뭔가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요."
"아뇨. 당연히 들어 드려야죠."
"제, 제가 무슨 저만 이득 보려고 이러는 것처럼 보일까 봐 말하는 건데 이게 혹시라도 학관에 소문이 나면 학관에서 저희를 찾아올 수도 있어요?"
"..아!"
"이, 이건 당신이 안전하게 점집을 운영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안일 뿐. 절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변명처럼 들리긴 하지만 맞는 말이긴 하다.
학생들이 죄다 시험 문제를 알아내려고 찾아오면 학관 입장에서도 곤란해질 테니까.
"네. 그건 알겠습니다. 확실히 위험하긴 하겠네요."
"그리고 조건이 하나 더 있어요."
"뭐죠?"
"얼굴 좀 보여주세요."
"...안됩니다."
차라리 수익의 반을 떼 달라고 할 수는 있어도 얼굴은 안된다.
절대로.
"자네 그 소문 들었나? 섬서에 유명한 점집이 하나 있다는 데."
"점? 그거 사술 아닌가?"
"에잉. 그렇게 따지면 무당파나 곤륜파의 도사들이 치는 점도 사술인가?"
"아니 그거랑 그건 다르.."
"그리고 설령 사술이면 뭐 어떤가. 우리가 뭐 피해볼 거라도 있나? 겨우 점인데?"
"..하긴 그렇긴 하군. 그래서. 그 점쟁이가 그렇게 용하다던가?"
"아주 용하다 들었어. 귀신이 따로 없다고 하더군. 사주팔자, 연애운, 그 외 상행이 잘 풀릴까, 자식이 안 태어나는데 어떻게 해야할까.. 아주 별에 별거를 족집게처럼 다 봐준다고."
"그러다 점쟁이에게 별호도 있다고 할 판국이군."
"아. 있다고 들었는데.. 그.. 뭐였더라.."
"무면금귀(無面金鬼)..?"
* * *
-딸랑
"어서 오.. 아 소저 왔습니까?"
"어째 손님이 아니라서 아쉬워하는 모습이네요?"
"손님이라면 좋기야 했겠죠. 뭐 소저라고 반기지 않는 다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일단은 지금 이렇게 먹고 살 수 있게 도와주신 은인 아닙니까. 소저 외에는 딱히 마음 터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도 하고요."
당아영에게 향했던 시선을 다시 아래로 내리며 빗자루로 바닥을 쓸었다.
"들어보니까 요즘 잘 나가는 모양인데요? 무면금귀라고 아주 명성이 자자해요."
"귀(鬼)가 붙는 별호는 별로 좋은 의미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게 돈을 적당히 밝히시지 그랬어요?"
무면금귀(無面金鬼).
내가 섬서에 오고 점집을 연지 반년 동안 생긴 별호다.
처음엔 무슨 점쟁이한테 뭐 별호씩이나 붙여주나 싶었는데 나중에 알기를 원래 별호가 생기는데 특별한 이유 같은 건 없다더라.
그냥 중원 사람들이 워낙 이런 거 짓기를 좋아하다 보니 좀 유명하다 싶으면 별에 별 별호가 다 붙는다고.
'얼굴 없는 돈을 밝히는 귀신이라..'
참 딱 맞는 별호긴 하다.
얼굴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데다 돈을 밝히는 것도 맞으니까.
"그래도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한테 귀신이 뭡니까 귀신이. 아무리 요술을 부린다지만 엄연히 살아있는 사람이라고요."
"왜요. 나름 다른 곳들과의 차이점이에요? 귀신이 봐주는 점집이라니. 재밌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괜찮을 것 같기도 하다.
뭐 오해한 무사가 나를 정말 귀신인줄 알고 토벌하러 오는 게 아니라면 나름 괜찮은 별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그 얼굴을 본 자가 없고 심지어는 여자인지도 남자인지도 확실히 알지 못한다.. 돈을 엄청나게 밝히지만 대부분의 돈을 밤마다 주점에서 술과 노름으로 날려먹는다..고 하던데요?"
"소문이 다 났네요."
"사실은 그 안에 엄청 잘생긴 공자가 있다니 경국지색의 미인이 있다니 아주 관심 거리예요. 어떤 졸부는 당신 얼굴을 알아오는 사람한테 현상금까지 걸었다던데."
어쩐지 노름판에서 돈 대신 얼굴 공개를 걸라고 하는 노름꾼들이 있더라.
단호하게 거절하니까 평범하게 돈으로 즐기고 말았지만.
"그 사람은 뭔데 남의 얼굴에 돈을 건답니까."
"소문이 안 좋은 사람이에요. 돈으로 여자를 꼬셔서 하룻밤만 보내고 버리는 난봉꾼으로 악명이 자자하죠."
...설마 내 안에 정말 미인이 있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
"그 사람한테 좀 전해주시죠. 안에 있는 건 아주 고약하게 생긴 남자라고."
"뭐.. 그런다고 확실히 물러날 거란 보장은 없죠. 확실한 방법은 당신이 그 피풍의를 벗은 모습을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것인데.."
"그건 안됩니다."
얼굴 공개는 안된다.
저 여자가 예전부터 은근히 내 망토 안쪽을 보려고 하는데 어림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