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250)

'훔친 게 아니라 잠깐 빌린 것 뿐.'

원래 제자의 물건이 곧 스승의 물건이고 스승의 물건이 곧 제자의 물건이다.

어차피 폐관수련에 들어간 사람이 돈이 쓸 데가 어딨겠는가

어차피 쓰지도 않을 거 잠깐 빌려다 쓰고 나중에 다시 채워 넣으면 그만이다.

'..걸리면 좆됀다.'

그러니까 서둘러야 한다.

내 목표는 3년 안에 최대한 세상을 즐기다가 스승님이 나오기 전에 돌아가는 것.

호오오오옥시 몰라서 잠깐 나갔다 온다고 편지를 남겨 놓긴 했지만 언제 그 인간이 날 잡으러 쫓아올지 모른다.

우선 그러기 위해선 지금 당장은 섬서로 가는 게 최선이다.

치안도 좋고 장사도 할 수 있으며 즐길 거리도 많은 곳.

자세한 건 가고 나서 생각해 보도록 하고 오늘 밤은 이만 자려고 객잔 문을 연 순간

"와우."

엄청난 액운을 뿜고 있는 사내를 발견했다.

허리춤에 칼을 찬 모습을 보니 무림인인 것 같다.

'저런 사람 옆에 있으면 괜한 일에 휘말리기 십상인데.'

저 정도 액운이면 지금까지 멀쩡한 삶을 살지도 못했을 거다.

무림인인것 까지 생각하면 오히려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

'..잠깐만.'

어쩌면 집안이 좋아서 저 정도 액운을 가지고도 지금까지 살아있는 걸 수도 있다.

태어나기 전 천지신명이 부모를 정해주시는 것과 운명을 정해주시는 것은 별개이기 때문에 가까스로 정말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면 어떻게든 금이야 옥이야 살릴 수는 있다.

그 정도 액운이다.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면 못해도 사지 중 하나는 이미 사고로 잃었을 정도의 액운.

이제 보니 옷도 재질이 다른 사람들이랑 달라 보이는 게 정말 좋은 집안일지도?

'흠..'

잘하면 섬서로 가기 전에 돈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 *

"안녕하십니까 소협. 오늘 날씨가 참 쌀쌀하지 않습니까?"

"마약이라면 거절이다."

"하하, 제가 비록 사정이 있어서 이런 차림새긴 하지만 수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수상한 차림새를 하고 수상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결국 대게 이상한 놈들이더군. 열에 일곱은 나를 이용해 먹으려는 자였고 셋은 자객이었다."

사내는 온몸에 피풍의를 두르고 다가온 의문의 남성에게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의심을 풀어드리려면 우선 자기소개부터 해야겠군요. 저는 산 속에서 수련을 하다가 오늘 막 내려온 점쟁이입니다."

"하, 요즘은 점쟁이들도 산 속에서 수련을 하나?"

"그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늘의 기운을 받으며 그 기록을 읽는 기술인데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이 아니면 어디서 수련 한다는 말입니까?"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

"소협의 입장도 이해 합니다. 솔직히 이런 수상한 차림으로 다가오면 누구나 경계할 만 하겠죠. 제가 소협이었어도 그랬을 겁니다. 그러니까 제게 소협의 흥미를 돋을 수 있도록 약간의 시간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

분명 차림새만 보면 몹시 수상한 사람이거늘 묘하게 빨려드는 느낌이었다.

이상한 처리라도 되어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각도가 절묘한 건지 아무리 눈을 돌려도 안쪽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고 목소리 또한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남성인지 여성인지조차 구분이 잘 가지 않는 수준이었다.

"일각을 주지. 그 뒤에도 귀찮게 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

만약 이자가 자객이었다면 엄청난 고수이리라.

자신의 신체적인 정보를 전혀 넘기지 않으면서 상대의 흥미를 얻는데 성공하다니 상당한 실력이었다.

"하하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점쟁이는 기분 나쁘게 웃으면서 자신의 품 속으로 손을 넣었다.

암기라도 꺼내려는 건가 싶어 언제든지 수를 취할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한 사내였지만 점쟁이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작은 목패 8개였다.

"혹시 기존에 점을 봐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나는 그대에게 점을 볼 생각이 없다."

"일각을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정도는 투자해 주시지요."

방금 막 산에서 내려온 것 치고는 사람을 대하는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건(乾),태(兌),리(離),진(震),손(巽),감(坎),간(艮),곤(坤)

천지 만물을 대표하는 8가지 상징. 8괘.

건(乾)은 곧 하늘이요 땅은 곧 곤(坤)이고 태(兌)는..

"시간이 없으니 원리 같은 건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설명하기도 힘들고요."

"원래 설명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입이 길면 사기꾼입니다 소협. 원래 진짜 고수는 결과로 증명한다는 말 못 들으셨습니까?"

"..."

뭔가 그동안 봤던 무당이나 도사들과 비교해보면 뭐랄까 격식이 없었다.

'쓸데없는 허례허식이 없어서 좋다고 해야 할지..'

"자, 결과가 나왔습니다."

"벌써?"

"이래 보여도 산 속에서 10년 동안 수련만 했습니다. 아. 혹시 너무 심심하게 끝난 것 같아서 그러십니까? 원하신다면 작게 불꽃 정도는 튀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됐다. 그냥 결과나 알려 다오."

상대할수록 피곤해지는 인간이었다.

뭐가 됐든 그냥 빨리 헤어지는 게 상책이다.

"기분 나쁘게 들리실 수도 있지만 조금만 진정하고 들어주시죠. 혹시 본인이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 있으십니까?"

"..."

사내는 약관을 조금 넘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결코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어릴 적에 돌아가셨으며 하나 뿐인 형님은 배 다른 아우라는 이유로 자신을 멸시하고 경계했다.

무(武)에 재능도 없었으며 자신에게 '남궁'이라는 성씨를 물려주신 아버지는 그 이름이 더럽혀 지지 않도록 최소한의 보호만 해주실 뿐 눈길 한번 주지 않으셨다.

결국 이런 주변 환경 탓일지, 지학을 넘겼을 때부터 탈선을 하기 시작했다.

매일 기루에서 살다시피 했으며 가문의 이름으로 수많은 여인을 꼬셔 잠자리를 가졌다.

결국 이런 망나니짓이 집안의 어르신들의 귀에 까지 들리게 되자, 그제서야 아버지는 눈길을 주셨다.

[꺼져라. 너 같은 자식을 낳을 줄 알았으면 그날 그 기루를 가는 것이 아니었..]

"회상에 잠기신 와중에 죄송하지만 일각까지 얼마 안 남아서요. 할 말만 조금 하겠습니다."

"..됐다. 별로 좋은 기억도 아니었으니."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우선 제가 보기에 소협의 액운은 엄청납니다. 제 개인적인 소견으로 말씀드리자면 지금까지 살아 남으셨다는 것에 존경을 표하고 싶을 정돕니다."

과장된 표현과 몸짓이었지만 이상하게 별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물을 조심하십시오."

"..물?"

"자세히 말씀드릴수록 천기누설이 많아집니다. 지금은 이 정도가 한계입니다. 꼭 기억하세요 소협. 물을 조심하세요."

"..쯧."

세상 어딜 가도 있는 게 물이다.

그런 물을 조심하라니. 결국 어딜 가서든 조심하라는 말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묘하게 말을 잘 하길래 혹했던 마음이 빠르게 식어갔다.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했군."

말을 더 들을 가치도 없었다.

사내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위층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잠깐만요 소협!"

"..."

아래층에서 점쟁이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무시하며 빠르게 방으로 올라갔다.

* * *

"에이씨 은전 하나라도 주고 가지."

첫 장사인데 아무래도 망한 모양이다.

돈 좀 벌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에휴. 관심은 생긴 것 같았는데 아쉽네."

한숨을 쉬면서 탁자에 깔아 놨던 목패 8개를 회수해서 품 속에 넣었다.

"뭐.. 이제 나도 자러 가야지."

내가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이 객잔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객잔을 찾는다.

첫날부터 다치고 싶진 않았으니까.

"아으 잘 잤다."

그 무림인은 만났던 객잔과는 멀리 떨어진 객잔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밖으로 나왔다.

"여기 있었군!"

"아."

밖에 나오자 어제 봤던 그 사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제 점은 도움이 됐습니까?"

"되었지. 정말 잘 되었어 고맙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살아서 다시 만나뵈어서 다행입니다. 면식이 있는 사람의 별세소식은 듣고 싶지 않거든요."

이렇게 살아있는 모습을 보면 다행히 위험은 무사히 넘긴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여기 서서 이야기 할 게 아니라 안에 들어가시겠습니까?"

사내는 물어볼게 많아 보였다.

그리고 나는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아침부터 빈 속을 술로 채워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

.

.

"크으- 역시 대화엔 술이 있어야죠. 정말 소협께서 사시는 것 맞죠?"

"하하, 생명의 은인에게 술을 대접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단 말인가. 걱정 말고 들게."

"자, 그래서 뭐가 궁금하십니까? 술도 대접 받았겠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이겠다 마음껏 질문 하시죠."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나는 사내가 무엇을 질문할지 대략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나?"

이 정도야 예지 없이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범위다.

"씻을 때 습격 받으셨습니까?"

"맞다."

"하하.. 다행이라는 표현을 써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다행이군요. 이게 예지가 엇나갈 때도 자주 있어서 말입니다."

내가 점을 본 내용에 따르면 이 사내는 그날 밤 씻기 위해 세안을 하다가 자객에게 등을 내주고 죽을 운명이었다.

사실 운명이라고 할 정도로 거창한 표현도 아니다. 충분히 벗어날 수 있는 거니까.

"말했지 않습니까. 점쟁이라고. 하늘의 기운을 받고 하늘의 기록을 엿보는 요술을 부리는 요술쟁이. 점쟁이가 미래를 보는 것이 그렇게 놀라운 일입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냥 운이 좋다고 생각하시죠. 소협은 운 좋게 용한 점쟁이를 만났고 그로 인해 살아남으신 겁니다."

어제 점을 칠 때 알았던 건데 알고 보니 액운이 엄청 강해 보였던 게 지금이 끝물이라서 그랬던 거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하지 않던가?

액운이라는 녀석은 한번 제대로 물리치고 나면 다시 찾아올 엄두를 못 내는 겁쟁이 같은 녀석이다.

애매하게 물리치면 오히려 계속 달라붙는 거고.

"그러고 보니 기껏 이렇게 됐는데 통성명 정도는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아아.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안했군. 남궁진이라고 하네."

"오 귀하신 집안 자제 분 이셨군요."

예상하긴 했지만 설마 남궁세가라니

생각보다 귀하신 집안 출신이었다.

자객까지 보냈던 걸 보면 딱히 집안에서 좋은 취급을 받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무얼, 내놓은 자식이지. 그래도 최소한의 지원은 받고 있지만 사실상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해 주는 것 같지도 않네."

"그나저나 말투가 꽤 호탕해지셨습니다?"

"그야 그때는 그대가 처음 보는 수상한 사람이었으니까."

"뭐. 그건 인정하죠."

남궁진은 어제 일을 기점으로 나에 대한 경계가 풀린 모양이었다.

내 입장에선 좋은 일이었다. 그에게 도움을 요청할 일이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그 천기누설이라는 게 그렇게 무서운 건가? 물을 조심하라니. 애매해도 너무 애매하지 않나."

"흠.. 천기누설이 얼마나 무섭냐라.."

아마 내심 애매하게 알려준 게 불만인 모양이다.

"예를 들어서 말해봅시다. 제가 그때 남궁진 소협께 '오늘 씻을 때 자객이 뒤를 노릴 테니 조심하십시오' 라고 말했다면 말입니다."

"자객이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소협의 목숨을 노릴지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대의 점으로도 볼 수 없단 말인가?"

"그건 기본이고 오히려 처음에 본 운명대로 흘러갔을 때보다 더 살아남기 힘들어질 겁니다. 감히 천기누설을 한 죄랄까요. 예를 들어서 소협이 상대한 자객이 이류였다면 다음에 소협의 목숨을 노릴 자객은 일류일겁니다."

천기누설로 운명을 피하려고 들거든 하늘은 더 가혹한 운명을 준비한다.

"뭐 저도 천벌받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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