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250)

도망치는 데는 쓸 수 있겠다.

아무튼, 제자인 나는 이렇게 빌빌대는 형편이었지만 스승님은 아니었다.

맨날 누워있어서 그렇지 가끔 씩 밖에 나가실 때는 감쪽같이 사라져서 짐승 몇 마리를 잡아오곤 하셨으니 절대 일반인의 영역은 아니었다.

처음엔 도사인가 생각했지만 저런 사람이 도사일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지금은 그냥 은거한 무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 비록 혼자 심심하겠지만 조금만 버텨주면 좋겠구나. 금방 돌아올 터이니."

"괜찮습니다. 작물에 물을 길러다 주다 보면 시간은 금방 지나갑니다. 어느새 10년도 지나지 않았습니까. 3년이면 금방 입니다 스승님."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구나."

스승님이 내 어깨를 토닥였다.

"저 나무가 보이느냐? 네가 지학일때 심은 나무인데 어느덧 저렇게 자라서 네 키도 훌쩍 넘었구나. 그땐 네 무릎까지 간신히 오는 길이였거늘."

"...스승님이 나오실 때 쯤엔 열매도 맺겠군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구나.."

10년.

지구에 있던 시절의 기억도 까마득해 질 정도의 시간.

그 시간의 대부분을 스승님과 함께 보냈었다.

"내가 나온 뒤에는.."

"스승님 그 뒤는 말하지 마십쇼. 불행을 부르는 말입니다."

"...참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내 제자 답구나."

플래그를 세우는 걸 막자 스승님이 나를 끌어안은 뒤 내 어깨에 머리를 올렸다.

-꼬옥

"..."

"..."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포옹을 한 뒤에 나는 마지막으로 식사라도 대접해 드리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요리가 끝난 뒤 상을 준비해 밖으로 나왔을 때

스승님의 방은 금줄 수십 겹과 부적으로 굳게 봉인되어 있었다.

'..3년.'

길다고 하면 길고 짧다고 하면 짧은 시간이다.

지금까지 10년을 이렇게 살았는데 3년 정도 더 기다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

같이 대화를 나눌 상대 하나 없다는 게 조금 외로울 것 같긴 하지만

맨날 성격이 괴팍하다고 욕하긴 했지만 그 마음 한켠엔 나를 향한 애정이 담겨있었으리라.

밥이 조금 탔다고 뭐라 하고

얼룩이 덜 지워졌다고 뭐라 하고

고기가 덜 익었다고 뭐라 하고

기껏 밖에 나갔을 때 사온 다과도 아껴 먹을려고 숨겨 놨더니 혼자서 8할을 먹어버리고

점성술에 실패하니까 그것도 제대로 못하냐고 까이고

성희롱도 심심할 때마다 하는..

'나가자.'

에이 퉤

잘 먹고 잘 살아라.

나는 밖에서 살 거니까.

.

.

.

"음!"

나는 밖에 나가기 위한 채비를 다시 한번 점검한 뒤 봇짐을 맸다.

안에 입은 옷 외에 겉으론 거대한 망토가 몸과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스승님! 이것 보시죠! 제 얼굴이 보이십니까?]

[신묘한 물건이로구나. 넌 매번 어디서 그런 기물들을 구해오는 것이냐?]

구하기 정말 힘들었던 망토다.

거의 10년이란 세월의 절반 이상을 투자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기물이라도 쓰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법.

드디어 이 망토가 진가를 찾았다.

이런 수상한 망토를 걸친 사람한테 함부로 시비를 걸지는 않겠지.

"그러면 스승님. 이 불초 제자 잠시 세상 구경 좀 하고 오겠습니다."

-타다닷!

혹시라도 따라올 까봐 서둘러 다리를 움직였다.

새로운 땅.

새로운 사람들.

음식, 술, 유희.

그동안 겪지 못했던 많은 경험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강호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

.

"계십니까?"

유성이 떠난 뒤 굳게 닫힌 문을 제외하면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깊은 산 속의 거처.

한 상인이 수레에 짐을 가득 싣고 그 앞에 서있었다.

"여기가 아닌가?"

사내가 수레를 잠시 내려놓고 품 속에 넣어둔 약도를 꺼냈다.

얼마 전 갑작스럽게 찾아온 경국지색의 여인이 차고 있던 장식품 하나를 내밀면서 의뢰를 맡겼었다.

[여가 곧 폐관 수련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면 제자가 혼자 남겨져서 걱정이니라. 곡식은 괜찮으니 주기적으로 고기나 다과 좀 저 산 속으로 가져와 주거라.]

여인 또한 굉장히 아름다웠지만 그녀가 내민 장식품도 만만치 않았다.

팔면 금으로 수십 냥은 가볍게 받을 수 있을 거란 게 눈에 훤히 보일 정도.

[고기는 소의 것을 제일 좋아하고 다과는 전병을 좋아하는 것 같더구나. 전에 보니까 탕후루도 꽤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고.. 돈이 남으면 혼자 심심하지 않도록 책도 올려다 주면 좋겠다. 세상에 관심이 많은 것처럼 보이니 다양한 지역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 책이 괜찮을 것 같구나.]

[저기.. 그런데 말입니다. 저 산에 위험한 짐승이 많다는 소문이..]

[이 약도로 오면 괜찮을 것이다. 미리 정리해 두었으니 적어도 앞으로 3년 동안은 짐승 하나 얼씬 못할 거다.]

언뜻 차가워 보이는 인상의 여자였지만 제자는 상당히 아끼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오면서 그 흔한 들짐승 한 마리도 못 본 게 사실이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용한 무사의 돈이 아까울 정도.

"여기가 맞는데?"

결국 사내는 그 뒤로도 한참을 서있다가 고민 끝에 수레를 내려놓고 산을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마을이다.."

험한 산 속을 정처 없이 내리막길을 따라 걷기만 한지 세 시진.

나는 산 속을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혹시라도 관문 같은 게 있으면 어떻게 변명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큰 마을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꼬르륵

"일단 밥부터 먹자.."

모처럼 나온 바깥 세상이다.

풀떼기 말고 좀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다.

객잔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조금만 돌아다녀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어서 오세요! 한 분이신가요?"

"예."

'뭘 주문해야 하지?'

지구였으면 메뉴판이라도 있었겠지만 이 세상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제가 산 속에서 지내다가 방금 막 내려온 차라 음식이 뭐가 있는지 모르는데 혹시 추천 가능합니까?"

품 속에서 은자 하나를 꺼내 빙글빙글 돌렸다.

물가가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은인데 한끼 식사 정도는 풍족하게 할 수 있는 금액 아닐까.

"물론입죠! 산에서 막 내려오셨다면 그동안 자극적인 음식은 거의 못 드셨을 테니 우선 소면부터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어항육사같은 육류는 맛이 자극적일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그걸로 주시죠."

"네. 혹시 술도 필요하십니까?"

"..적당한 걸로 한 병 부탁 드립니다."

"넵! 금방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선불이었는지 거스름돈을 잔뜩 돌려받았다.

아무래도 은자는 생각보다 큰 돈이었던 모양이다.

.

.

.

"이제야 좀 살 맛이 나네.."

오랜만에 먹는 속세의 음식은 진미 그 자체였다.

겨우 소면이라고 해도 산에서 길러서 먹는 작물보다는 훨씬 맛있었고 특히 술은 진짜 얼마 만에 먹어보는 건지..

"역시 사람은 알코올이 필요해.."

중국 술이라 그런지 좀 쎄긴 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좋았다.

그나저나 이 몸은 꽤 술에 쎈 몸인 것 같다.

술은 거의 처음 먹는 몸일텐데 아무리 내용물이 구르고 구른 성인이라지만 특별한 거부반응도 없다.

'이거 하나는 마음에 드네.'

단전은 망가졌지, 몸은 약하지, 얼굴도 가리고 다녀야 하지, 참 불편함 많은 몸이었는데 처음으로 장점을 찾았다.

마음 같아서는 한 병 더 마시고 싶지만 하산 첫날부터 술로 절여져 쓰러질 수는 없는 노릇.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 위해선 정보가 필요했다.

"저기 한가하면 뭣 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사례는 할테니."

"물론입죠!"

종업원? 점소이? 기억상 그렇게 불리는 소년이 내 손에 들린 은자를 보고 눈을 빛냈다.

마침 다른 손님도 없겠다 편하게 질문할 수 있겠다.

.

.

.

"흐음.."

아는 게 많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점소이였다.

요즘 무림 정세가 어떻니, 녹림이 어떻니, 후기지수들이 어떻니, 나름 유용한 정보가 많았다.

그리고 특히 유용했던 정보는

"섬서에 있는 학관이라.."

약관쯤의 나이에 입관할 수 있다는 학관의 존재였다.

정파 세력들의 한가운데에 있는 만큼 온갖 지역에서 정(正)을 꿈꾸는 후기지수들이 몰려든다는 학관.

내가 입관할 생각은 없다. 무공도 익히지 못하는 몸으로 가서 뭘 배운단 말인가.

머리를 쓰는 일을 배운다고 해도 3년 안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하는 입장에서 학관에서만 그 시간을 보내는 건 큰 손해였다.

애초에 점성술이라는 정도인지 사도인지도 애매한 요술로 입관 할 수 있을거란 확신도 없고.

그러면 왜 관심을 가졌냐고?

"그 근처는 안전합니까?"

"다른 지역보단 훨씬 안전하죠. 오대세가나 구파일방의 자제들도 모여있는 학관인데 무림맹에서 손 놓고 있겠습니까?"

안전해 보이니까.

정파라고 마냥 착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대의를 표방하고 있는 만큼 주변의 치안도 제법 보장될 거다.

그 뿐인가? 유동 인구도 장난 아닐거다.

전생으로 따지자면 대학로 아닌가.

유동 인구도 많은 데다 그 대상이 한참 뜨겁고 혈기 왕성할 젊은이들.

장사하기 딱이다.

장사하기 좋은 손님도 많고 치안도 좋다고?

안 갈 이유가 없다.

문제가 있다면 거기까지 가는 길이지.

"가는데 오래 걸립니까?"

"중원 땅이 오죽 넓겠습니까. 만약 가시려거든 표사나 상인들과 이야기 해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점소이에게 돈은 건네주고 밖에 나오자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에 표국을 찾아가 보는 건 힘들 것 같다.

점소이에게 추천 받은 객잔으로 찾아가며 돈 주머니를 뒤적였다.

아쉽게도 저쪽은 얼마 전에 무림인들이 싸운 덕분에 2층에서 사람을 재울 형편이 안된다고 한다.

그런데 산 속에서만 지내던 놈이 돈은 어디서 났냐고?

..나올 데가 한 곳 빼면 더 있나?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