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교의 하늘이라.."
천마가 손 끝으로 본인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꿀꺽
혹시라도 안 좋은 반응이 나올 까봐 속으로 긴장하고 있던 나는
"나쁘지 않은 울림이구나."
'휴.'
그녀의 입이 열리자 안심할 수 있었다.
"그대를 부른 이유는 이미 그대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소인이 미천한 몸인지라 남에게 자랑할 수 있는 건 점을 칠 수 있는 소소한 재주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원하는지 말해 주신다면 한번 재주를 부려보겠습니다만.. 이것도 천기를 읽는 일 인지라 혹시라도.."
"천기누설에 속하니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라는 건가?"
"..송구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건 나 말고 다른 도사들이나 영물 한테도 포함되는 이야기니까.
이미 등선한 신선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인간의 영역에서 빗나가지 않는 예지란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나도 여러 번 틀려먹은 적이 많다. 하필 정말 중요한 일들이 제대로 적중하는 바람에 그렇게 용하다고 소문이 퍼져 버린 거지.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어차피 본녀도 그대의 말을 맹신할 생각도 없었으니. 그저 요즘 무림에 용한 점쟁이에 대한 소문이 워낙 퍼져서 호기심 차 부른 것 뿐."
"..과분한 평가입니다."
울고 싶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적당히 운세나 연애운 정도나 봐주면서 지낼걸 뭘 자꾸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녀서 이따위로 소문을 퍼트렸을까.
"그러면.. 정확히 어떤 점을 봐드리면 되겠습니까? 앞으로 신교의 앞날에 대해 봐보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알겠습니다."
.
.
.
"결과가 나왔습니다.."
바닥에 깔려있는 목패(木牌) 8개를 주섬주섬 회수하며 입을 열었다.
점을 보는 원리나 팔괘(八卦)에 대해 설명하려면 어렵기도 하고 입도 아프니 그냥 적당히 넘어가고
"어떻게 나왔느냐?"
"특별한 위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지금 계획 중인 일은 큰 위험 없이 해결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게 단가?"
천마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럴 땐 참 곤란하다.
점 봐달라고 해서 봐줬더니 정작 '별 문제 없네요. 이대로 살아도 괜찮겠는데요?' 라고 대답하면 그게 다냐고 뭐라 한다.
물론 지금까지 살아남은 짬밥이 있지 여기서 그냥 넘어가진 않는다.
"혹시 어딘가로 많은 사람들을 보낼 일이 있다면 그때 20명만 더 보내세요."
이 피와 철의 대지에서 무력 하나 없이 살아남으려면 입을 잘 놀려야 하는 법.
실제로 저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나도 모른다.
맞다. 그냥 입 터는 거다.
걸리면 어떡하냐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설령 동종업자라도 알아채지 못하니까.
-꿀꺽
'떨지말자떨지말자떨지말자떨지말자.'
숨을 죽이고 천마의 반응을 살펴보고 있었다.
설마 아무리 상대가 천마라지만 이걸 알아채진 못할 거다.
내가 티만 안내면.
"어딘가라.. 조금 구체적으로 얘기해볼 수 있나?"
"제가 입을 많이 열수록 그만큼 천기누설이 많아집니다. 많은 피를 흘릴 곳으로 예상된다는 것까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이상 말했다간 사실상 발언이 의미가 없어질 수 있어서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 없는 점을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신교의 하늘이시여."
"흐음.."
천마가 손가락으로 본인의 팔을 두드렸다.
속으로 엄청 조마조마했지만 몸 전체를 가리고 있는 망토 덕분에 티가 나진 않았으리라.
이 망토도 평범한 물건은 아니니까.
이게 천마한테까지 통할 거라는 확신이 없어서 문제지.
"알겠다. 염두 해두지."
'휴.'
다행히 잘 속이.. 아니 설득된 모양이었다.
"수고했다. 먼 곳에서 오느라 힘들었을텐데 보상은 두둑하게 준비하라고 전해두지."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한 것도 별로 없는데 많이 받았다간 천벌 받습니다."
"무얼. 원래 받은 게 있으면 돌려주는 게 있어야지. 사양할 필요 없다."
..어쩌면 생각보다 좋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는데.
그깟 점 하나 보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거냐면서 가격을 깎으려 드는 놈들이나 정의를 위한 일인데 당연히 대가를 받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는 놈들을 한 두 번 만나봐야지.
"..너무 사양해도 예의가 아닐 테니 염치 불구하고 받겠습니다."
포권을 취하면서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솔직히 여기까지 오면서 엄청 고생했는데 마교라고 아무것도 안주고 쫓아낼 까봐 속으로 엄청 졸였었다.
"그런데 혹시 그대가 괜찮다면 하나만 더 부탁해도 되겠나?"
"..무엇이든 말씀하시죠."
돈 많이 주는 손님은 왕이다.
왕이 부탁하는데 뭐라고 못할까.
"본녀가 주도(酒道)를 즐기는 취미가 있어서 말이야. 괜찮다면 그대에게도 한잔 권해보고 싶은데."
"..술 말입니까?"
"듣기로는 그대도 중원에서는 꽤 주당으로 이름이 자자한 모양이던데.. 아닌가?"
술. 당연히 좋아한다.
비싼 술이라면 더더욱.
이 인터넷도 없는 세상에서 내가 즐길 수 있는 몇 안되는 취미였으니까.
'천마의 술..?'
무려 천마가 권하는 술이다.
보통 객잔에서 파는 싸구려 술 일리가 없다.
-꿀꺽
예전에 무림맹에 갔었을 때 어쩌다 한 병에 금으로 수백 냥은 줘야 하는 술을 얻어먹었었는데 그 뒤로 한동안 객잔에서 파는 웬만한 싸구려 술은 입에도 못 댔던 기억이 있었다.
'끄으응..'
갈등 된다.
술은 탐나지만 그래도 상대가 무려 천마다. 괜히 술 마시다 트집 잡히면 뇌옥으로 끌려갈지도 모르는 일이니 걱정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술만 따로 달라는 건 속내가 너무 대놓고 보이고..
"본교에는 그대가 중원에서 맛보지 못했을 만한 그런 종류의 술들도 아주 많지. 그대 혹시 서역의 술은 마셔 봤나?"
"서역의 술..?"
'설마 와인도 있어?'
강호에 나오고 술에 맛 들린 이후 와인도 찾아보려고 수소문 했었지만 쉬운 일이 아니라 포기했었다.
근데 마교에 와인이 있다고?
"우연히 연이 닿아서 구하게 되어서 말이야. 근데 장로들은 몇 번 입에 대보고는 영 취향이 아닌 모양이더군. 귀한 술이면 뭐하겠나.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줄 모르는 이라면 아무리 귀한 술이라도 맹물 한잔보다 못한 것을."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괜히 무슨 맛인지 궁금하다고 뺏어 먹고서 온갖 인상이란 인상은 다 쓰면서 억지로 삼킬 바에 그냥 물이나 마시라고 해라.
정말 백 번 공감 되는 말이었다.
"그대는 서역의 술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구나?"
"아주 옛날에 기회가 닿아 스승님으로부터 얻어먹었었습니다. 정말 마음에 들었었지만 저로서는 서역의 술을 구할 방법이 없었기에.."
"그러면 마침 잘됐구나."
참고로 당연하지만 우리 스승님은 나한테 와인 같은 걸 준 적 없다.
그 인간도 중원 토박이일 텐데 와인을 어디서 구할까.
그냥 현대에서 먹어본 기억으로 대충 둘러댄 거지.
"옛말에 사람과 사람의 경계를 허물고 가까워지는 데에는 술 만한 게 없다고 하지. 어디 한번 취중진담(醉中眞談)을 나눠보지 않겠나?"
"영광입니다 신교의 하늘이시여."
* * *
"어허, 어딜 자작(自酌)을 하려 드는가. 어서 그 병 내려놓게."
"술 맛이 너무 좋아서 저도 모르게 그랬나 봅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흥, 이번은 용서해줄 테니 다음부턴 그러지 말거라."
머리가 빙글빙글 돈다.
진짜 엄청 마셨다.
안주라고 해봤자 고기 완자 몇 점이 전부인데 술맛이 너무 좋았다.
"푸하-!"
"오오, 상당히 호탕하구나. 아직도 그걸 한번에 마실 여력이 남았다니. 무공도 익히지 못한 걸로 아는데."
"흐흐, 이래 보여도 절정 고수와의 술내기에서도 이긴 몸입니다."
"절정이 고수인가?"
"..."
"무얼, 농이다."
슬슬 눈꺼풀이 무겁게 느껴진다.
다른 건 몰라도 술에는 진짜 자신 있었는데 역시 진짜 무림인을 이기는 건 무리다.
나보다 두 배 이상은 마신 것 같은데 취하기는 커녕 볼에 약간 홍조가 올라온 게 끝이었다.
보니까 저것도 일부러 조절해서 약간 취한 거지 원한다면 당장 저 약간의 취기까지 없애버릴 수 있으리라.
"그나저나 그대의 그 피풍의는 참 신기하구나. 그대의 자세가 아무리 흐트러져도 안쪽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다니. 괴력난신이로다."
내 입장에선 무공이나 이 망토나 똑같은 괴력난신인데 중원 사람들한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무공이나 진법은 당연하게 여기면서 이런 건 또 신기해 한단 말이지.
"진법의 일종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흐음.. 본녀의 눈까지 속일 정도의 진법이라.."
"..부디 노여워 하지 마시죠. 정말 힘들게 구한 겁니다."
"뭐, 그대에게도 그대 나름의 비전이 있겠지. 묻지 않겠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까지 해가면서 본모습을 감추고 다니는 사정이라도 있나?"
참 얼마나 받아보는 질문인지.
이제는 어떤 대답을 했는지 생각해 가면서 대답해야 할 판이다.
"얼굴이 흉합니다."
"..?"
"옥상에서 떨어진 메주처럼 생겼다더군요. 오죽하면 부모님이 못생겨서 버렸냐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음."
"뭐, 이렇게 태어난 것도 천지신명께서 정해주신 뜻 아니겠습니까. 생긴 게 무엇이 중요합니까. 잘 먹고 잘 벌고 잘 쓰면서 살고 있으니 이게 남 부럽지 않은 삶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상당히 긍정적이구나. 좋지 않은 기억일텐데."
거짓말은 아니다. 실제로 들어보긴 했다.
"신교의 하늘이시여. 저 같은 점쟁이들은 말입니다. 항상 현재를 즐기면서 살아갑니다. 남의 미래는 봐줄 수 있으면서 정작 자기 자신의 미래는 볼 수 없으니 먼 미래를 대비하지 않고 항상 가까운 미래나 현재 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흠?"
"예를 들어서 말입니다. 제가 주점에서 누군가의 점을 봐주었고 그로 인해 그 사람이 독이 들어있던 술잔을 마시지 않고 피해갔다고 해봅시다. 저는 사내에게 받은 돈을 짤랑거리고 흐뭇하게 웃으면서 제가 마실 술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그 술잔에 독이 들어있을지 없을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남의 목숨은 살릴 수 있어도 자신의 목숨을 살릴 순 없는 건가."
"그렇죠. 괜히 미래를 의식하다간 매 순간 순간마다 죽음을 의식해야 합니다. 마시는 식사에 독이 들어있지 않을까 염두 해야 하고 길을 걷는 무림인이 제 목에 그 칼을 꽂지 않을지. 지나가던 아이가 돌변해 제 배에 칼을 찔러올지 아닐지를요."
"..상당히 힘든 삶이구나."
"그렇기에 현재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타인들에겐 어리석게 사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게 제가 사는 방법입니다. 돈도 저축하지 않습니다. 다음날 누가 제 목에 칼을 꽂고 돈을 뺏어갈지 모르는 일이지 않습니까. 버는 당일 주점에서 술과 노름으로 날려먹습니다."
"..."
"..라고 스승님에게 배웠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아직 좀 더 살고 싶은 인간인지라 조금의 대비는 해두는 편입니다."
"푸흣!"
천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지었던 은은한 웃음이 아니라 갑자기 웃겨서 터진 폭소였다.
"재밌으셨습니까?"
"아하하.. 진지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렇게 갑자기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면 귀엽게 느껴지지 않느냐."
"그러면 제가 인간이지 뭐겠습니까. 설마 요괴라도 되겠습니까."
술자리에서 무거운 이야기는 사양이다.
즐기기만 해도 모자란 삶인데 무거운 이야기라니.
그런 건 싫다.
* * *
술자리가 끝나가고 슬슬 돌아갈 채비를 해야할 무렵이었다.
이 몸 상태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마교에서의 하룻밤은 사양이었다.
취중진담으로 그녀와 조금 친해지긴 했지만 마교를 향한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니까.
"슬슬 가보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