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250)

미래를 보는 자들. 예언이나 예지 계열 능력자들에게는 언제나 클리셰가 있다.

남의 미래는 볼 수 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미래는 볼 수 없다거나

혹은 볼 수는 있지만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거나.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조금 더 무섭다.

전자는 남들과 똑같은 조건으로 살아가는 거니까 무섭다고 할 것도 없지만

후자의 경우엔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알더라도 가만히 앉아서 그 운명에 순응하는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니까.

그래서 나는 후자가 더 무섭다.

자신이 본 미래를 바꿀 수 없는 삶만큼 무서운 것이 또 있을까.

* * *

-삐질삐질

"왜 그러느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아, 아닙니다.."

나는 의아하다는 표정의 여인에게서 눈을 피하며 진땀을 흘렸다.

'이,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그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본 당신의 미래에서 내가 팔다리가 구속된 채 당신의 밑에 깔려있었다고.

-저벅저벅

'하아..'

나는 눈앞에 보이는 불길한 건물들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정말 오기 싫었다.

아무리 사술, 요술쟁이 취급 받는 점쟁이로 지내면서 온갖 고생은 다 한 몸이라지만 여기 만큼은 정말 오기 싫었다.

설마 살다살다 마교까지 오게 될 줄이야.

'그냥 조용히 살고 싶었다고..'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소설을 조금 읽기는 했지만 작가한테 4700자 쪽지를 보낸 적도 없고 댓글로 싸우지도 않았고 나 혼자만 읽은 수 천 화 짜리 소설도 없다.

심지어 무협 소설은 잘 안 읽었다. 한자가 어려워서.

'애초에 소설 속 세계인지 아닌지도 모르지만.'

그냥 갑자기 무협 세계로 빙의 당한 입장에서 해본 작은 신세 한탄 이었다.

기왕 빙의 시킬 거면 현대 판타지 먼치킨물 이었으면 얼마나 좋아.

나도 상태창으로 날먹하고 싶었는데.

내가 빙의한 몸은 상태창이나 기연은 커녕 오히려 평균에도 못 미치는 상태였다.

체구 자체가 작고 생긴 것도 유약해서 객잔에서 시비라도 걸리면 목 날아가기 십상인 무림에서 살아남는데 플러스 요소라곤 될 게 없었다.

심지어 무슨 사고라도 당한 건지 단전이 망가져서 그 흔한 삼재심법도 못 익힌다.

진짜 기껏 무협 세계에 왔는데 무공 하나 못 익힌다는 게 너무 서러워서 스승님의 만류도 무시하고 심법의 구결을 외웠다가 몸의 온갖 구멍에서 피를 쏟아본 이후에 무공의 ㅁ도 쳐다보지 않고 살고 있다.

몸도 약하고 무공도 익히지 못하는 이 몸으로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았냐고 묻는다면 스승님의 덕이 컸다.

[오호라, 재밌는 아해로구나. 경지에 이르러 벽에 막힌 무인도 아니면서 심기체가 이렇게 일그러져 있다니. 혹시 여와 함께 가지 않겠느냐?]

가진 것 하나 없이 뒷골목에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던 빙의 초기 시절. 먹을 거라고는 목숨 걸고 구걸해서 얻은 돈으로 먹을 수 있는 소면 몇 그릇 뿐이던 그때 스승님을 만났다.

[천하를 가진다거나 온 무림이 네 발 아래에 깔리게 해주겠다는 약속은 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밥은 굶기지 않겠느니라.]

건달들의 창관에서 몸이라도 팔아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거절하며 하루하루 말라가던 시절이라 스승님의 제안을 받자마자 바로 수락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참 많은 일이 있었지.'

지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이 있었다.

잠시 회상에 잠기며 복잡한 눈을 하고 있던 사이 무인으로 보이는 한 사내가 다가왔다.

"그대가 그 점쟁이인가?"

"오늘 신교에서 부른 점쟁이가 한 명이라면 제가 맞을 겁니다 대인."

처음 보는 사내였지만 사내가 내게 보내는 감정은 굉장히 익숙한 종류의 것이었다.

경멸, 무시.

처음엔 조금 가슴 아프기도 했지만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사람들이 나를 경멸하건 말건 나는 이 능력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았어.'

무릎을 꿇어도 좋다.

비굴하게 빌어도 좋다.

원한다면 발도 핥을 수 있다.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나는 지금까지 이 피로 물든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 생각을 밝힐 순 없다.

요술쟁이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는 건 그 삶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으니까.

"풍채가 익숙한데 제가 감히 대인의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대에게 밝힐 이름은 없다."

"이런.. 실례했습니다."

무시 당하긴 했지만 나도 별로 저쪽의 이름 따위 궁금하지 않다.

어차피 힘을 숭상하는 마교에서 이런 요술쟁이의 마중을 나오는 사내가 정말 무림에서 그 이름을 떨치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이렇게 심어주는 게 중요하다.

나는 비굴한 사람이다.

나는 당신이 신경조차 쓸 필요 없는 사람이다.

가끔 변종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이러면 나를 시선 밖에 놓는다.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감정 또한 그런 종류였다.

내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이러고 있다는 감정이 팍팍 드러났다.

"따라오기 전에 이걸 눈에 써라."

그런 사내가 내게 천을 건넸다.

아하. 건물 안쪽의 구조를 보여주진 않겠다 이건가?

내심 마교가 어떻게 생겼나 궁금하긴 했지만 여기서 이걸 거절한다는 건 목을 내놓겠다는 것과 다름 없기 때문에 나는 순순히 천을 눈에 감았다.

"썼습니다. 이걸로 됐습니까?"

"..그대가 뒤집어 쓰고 있는 피풍의에 가려져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으니 잠깐 그것을 내려봐라."

"말을 올리기 죄송하지만 그건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요술쟁이에게 본모습이란 곧 목숨과도 같은 것 인지라."

"지금 외부인 주제에 본교에 눈을 가리지 않고 들어오겠다는 것이냐?"

-스릉

무림인답게 한 번 거절 당했다고 사내에게서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장이라도 내 온몸을 감싸고 있는 피풍의. 그러니까 망토를 갈라 버리려는 기세를 뿜고 있는 사내.

"검후님의 명예를 걸죠."

"..."

"검후님이 제게 목숨의 빚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 대가로 허락 받은 일이니 만약 제가 천을 눈에 감지 않은 것이 발각되면 저를 베고 검후님께 그 대가를 요구하셔도 좋습니다. 신교에서도 나쁘지 않은 일 아닙니까?"

화산파의 검후.

내 입장에선 고마움과 동시에 곤란함의 대상이다.

우연히 봐준 점이 어쩌다 보니 그녀의 목숨까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해 버려서 빚을 지워두긴 했지만

반대로 이게 중원 전체에 소문이 퍼져 버려서 이렇게 마교까지 나한테 관심을 가지게 돼버렸다.

진짜 그냥 조용히 살고 싶었던 나로서는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무려 마교에서 보낸 초청을 거절했다가 무슨 짓을 당할지도 모르고.

"어쩌시겠습니까?"

"..따라와라."

따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사내는 내 말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사내가 걸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야 잠깐만.

"눈을 가리고 있는데 잡고 끌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무공도 익히지 못한 몸이라 앞이 안보이면 걷지 못합니다."

"..."

사내가 한숨을 쉬며 내 팔을 잡고 끌기 시작했다.

그래도 무인이라 상대의 몸을 잘 아는지 앞이 안 보이는 데도 넘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제대로 조절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누가 저를 부른 것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

와 이것도 대답을 안 해주네.

적어도 누구 때문에 점을 보러 왔는지는 알려줘야지.

"가고 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시발 당연한 거 아니야?

가고 나면 당연히 알겠지 뭐 그럼 모르겠냐?

..라고 생각은 했지만 당연히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눈이 가려져서 시간 감각도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발이 아픈 걸 보면 꽤 많이 걸은 것 같다.

내 입장에선 많이 걸으면 많이 걸을수록 불안한 게

많이 걷는다면 그만큼 마교 깊숙한 곳에 있다는 거고

깊숙한 곳에 있는 사람일수록 지위가 높고 위험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나서야 사내가 걸음을 멈추었다.

"도착했으니 천을 벗어도 좋다."

나는 사내의 말에 서둘러 천을 벗었다.

혹시라도 이 미친놈들이 나를 어디 깊숙한 곳에 감금이라도 시키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오면서 계속 들었지만 다행히 감옥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당히 고급스러운 외관의 장소였다.

지금까지 오만 곳을 다 다녀 봤지만 이만큼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의 장소는 손에 꼽았다.

검후의 거처는 화산파의 도사라서 그런지 그 이름에 비해 상당히 수수하게 생겼었으니까.

"미리 말하겠지만 만약 그분의 앞에서 무례를 끼친다면 내 검이 그대를 용서치 않으리라."

옛날이라면 모를까 이젠 솔직히 식상한 멘트였다.

일단 알겠다는 의미로 포권을 취하자 사내가 문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말씀하셨던 점쟁이를 데려왔습니다 교주님."

아 나를 부른 사람이 교주구나.

마교의 교주면..

어 시발 잠깐만

"들어오거라."

아니 시발 잠깐만

진짜 교주라고?

교주면 천마 아니야?

아니 진짜 잠깐만 이건 아니지

기껏해야 대주나 높아봐야 장로를 생각했지 천마가 왜 나를 불러

"..."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얼굴이 창백해지는 와중에 문이 열리며 방 안쪽의 장면이 보였다.

이쪽을 향해 등을 돌리고 가부좌를 틀고 있는 검은 무복의 여인이 보였다.

"수고했네 흑풍대주. 이제 가보아도 좋네."

"알겠습니다."

여인의 말에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사내가 대답했다.

아니 이 사람은 대주였어? 말단인 줄 알았는데?

-드륵

사내가 나를 방에 밀어 넣고 문을 닫으며 사라졌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단유성.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상대가 호랑이 100마리도 손가락 하나로 잡을 수 있는 상대라는 것만 빼면 다를 것도 없다.

"긴장했나?"

내 몸이 굳어있던 와중에 천마가 몸을 돌리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듣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이 세계에 와서 본 여자 중 제일 예쁜 여자가 스승님과 검후님이었는데 한 명 더 추가될 정도였다.

"..미천한 점쟁이가 천마신교의 교주님을 뵙습니다."

"아아. 괜찮다. 본교의 교인도 아닌 이에게 까지 교주라는 호칭을 강제할 생각은 없으니."

이걸 상냥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야 속지 마.'

20년 전 혈교와의 전쟁에서 홀로 3200명의 혈교인들을 갈아버린 괴물 같은 여자다.

내가 이 세상에 빙의하기도 전에 있던 일이지만 그 업적이 얼마나 괴물 같은 일인지 모르지는 않다.

심지어 20년 전에 있던 일이니까 지금은 훨씬 더 강해졌겠지.

괜히 무림맹에서 맨날 마교 마교 거리면서 토벌 못하는 이유가 괜히 있겠냐고.

"그러면.. 신교의 하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신교의 하늘.

간신히 머리를 쥐어 짜내서 만든 호칭이다.

어떻게 해야 저 여자의 심기에 거슬리지 않을까 하며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수많은 후보들이 오고 갔었는데 그중 마지막으로 남은 후보였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