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27
신데렐라
와인.
가격이 매겨지는 과정은 주식과 흡사한 정도를 넘어 똑같은 수준이다.
『샤또 딸보 2010』
『샤또 딸보 2017』
주식을 사기 전에 회사에 대해 탐구한다.
와인도 깊이 알면 알수록 여러가지가 보인다.
"이 두 가지가 뭐가 다른 것 같아요?"
"글쎄요……. 라벨? 완전히 똑같은데."
겉보기에는 그냥 같다.
귀찮게 그걸 뭐 따지고 있냐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오성전자를 지금 산 거랑 10년 전에 산 거랑 다를 거 아니야.'
와인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같은 와인이라도 빈티지에 따라 맛이 다르다.
"아 빈티지! 들어는 봤어요. 2017년이 맛없는 거라는 거죠?"
"아니요."
"?"
"그게 와인의 재밌는 점이에요."
상식.
이제는 일반인들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정도로 투자를 할 수 있다면.
'주식으로 돈 꼻는 사람도 없었겠지.'
와인의 세계도 비슷하다.
실제로 가격을 예측하는 선물 시장이 수백 조의 규모로 거래되고 있다.
"2017년산도 두 잔 주실 수 있나요?"
"이걸 따라고?"
"무리한 부탁인 건 아는데……."
"에이, 따줄게. 나도 방송 보고 답답했거든."
와인바의 사장님.
아는 사이다 보니 병을 오픈해준다.
아니, 사장님 입장에서도 답답했을 것이다.
꼴꼴꼴~
와인을 마시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다.
샤또 딸보는 전형적인 보르도의 와인이다.
"어? 이건……."
"어때요?"
"맛이 조금 다른데요. 마시기가 힘든 느낌이랄까."
눈빛만으로도 전해진다.
맛이 없다.
더 이상의 혹평을 늘여 놓지 못하는 건 방송이기 때문일 것이다.
꿀꺽!
음미해본다.
잉크처럼 짙은 액체가 입안에서 서서히 풀려간다.
느껴지는 것은 자두와 체리, 그리고 가죽과 타닌감.
본래라면 더 풍부하고 섬세해야 한다.
미성숙된 이 어린 보르도는 자신의 포텐셜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덜 익은 과일 같은 느낌 아니에요?"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다크 초콜릿처럼 텁텁하고."
"아!"
흔히 닫혀있다고 표현된다.
와인은 살아있는 생명체 같은 술 어쩌고저쩌고가 아주 맥락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과일도 후숙해서 먹는 것처럼.'
멜론도 그냥 먹으면 맛없다.
내가 이 돈 주고 참외를 사왔나 현탐이 온다.
하지만 서늘한 곳에서 천천히 숙성을 시키면?
고급스러운 달콤함이 입안에서 춤을 춘다.
그와 마찬가지의 현상이 와인에도 일어나는 것이다.
꿀꺽!
샤또 딸보의 2010년 빈티지.
시기만 했던 자두가 맛있게 영글었다.
다크 초콜릿은 블랙 체리와 가죽향으로 새롭게 꽃핀다.
"그렇게 설명해주시니까 저도 구분이 되는 것 같아요."
"보르도 와인들이 친절하지 않은 감이 있죠."
최소 5년은 지나야 먹을 만해진다.
권장 음용 시기는 평균적으로 15년에 달하는 긴 시간이다.
'그런 걸 1년도 안돼서 열었으니까.'
샤또 딸보는 약 2년간 오크통에서 숙성된다.
즉, 작년인 2019년에 출시된 파릇파릇한 제품이다.
맛이 없을 수밖에 없다.
멜론도, 망고도, 바나나도 갓 딴 초록색은 시고 텁텁해서 먹기가 힘들다.
"게다가 그 해의 보르도는 날씨도 안 좋았어. 살 만한 가치가 없는 빈티지지."
"그런 이유로 싸게 팔면 쓸어 담아야죠."
"무슨 얘기 하시는 거에요?"
사장님께서 답답했을 만도 하다.
나 같아도 초록 바나나 먹고 맛없다고 하면 색 노란 바나나 먹여보고 싶다.
'그것만은 아니지만.'
그 외에도 여러 요소가 있다.
2017년.
프랑스 보르도 지역에 서리 피해가 닥친 해로 많은 농가들이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더 맛이……, 별로였던 거군요?"
"그건 아니라니까요."
"네?"
과거였다면 '망빈'으로 분류가 된다.
와인의 맛이 망해버린 해였다고 기억하는 것이다.
'근데 지금은 21세기잖아.'
포도 농장들이 엄청나게 발전했다.
기상 예측과 농장 관리를 통해 피해를 최소화한다.
부족한 부분도 양조 기술로 보충한다.
메를로의 작황이 좋지 않자 블렌딩 비율을 바꿨다.
"까베르네 소비뇽 품종이 더 들어가 있어요."
"그럼 어떻게 되는데요?"
"까베르네 소비뇽이 메를로보다 장기 숙성에 특화된 품종이라서."
당장 먹을 때는 맛이 없다.
서연씨가 샤또 딸보 2017 빈티지를 맛없다고 느낀 것은 필연이다.
'와인 테이스팅에서 쓰이는 추상적인 표현을 하자면.'
유아 살해.
다 크지도 못한 녀석을 죽였다.
아직은 먹을 만한 시기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가격이 비싼 거에요?"
"미래에 맛있어질 가능성이 현재 가격에 포함된 거니까요."
"아하……."
마치 성장주처럼 말이다.
와인과 주식이 흡사하다는 것은 한 치의 과장도 없다.
'특히 이런 브랜드가 있는 부류는.'
샤또 딸보.
보르도 메독 지역의 4등급 와인이다.
20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분류 체계다.
현재 시점에서는 3등급 이상으로 평가 받는다.
전통과 역사를 계승하고 있는 훌륭한 와인이라는 뜻이고.
"브랜드가 주는 신뢰도 가격에 포함돼있죠."
"아……, 그럼 가격에 거품이 좀 있겠네요."
"거품이 없는 것도 마셔 보실래요?"
"네! 마셔보고 싶어요"
알게 모르게 가격에 포함돼있다.
명품은 부러움의 대상임과 동시에 신뢰의 상징이기도 하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와인은 마시는 것이다.
옷이나 가방처럼 누군가에게 과시하는 용도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타악!
메뉴판을 펼친다.
영어로 빼곡히 쓰여진 것들.
보기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워질 지경이지만.
『메뉴판』
Joseph Phelps, Innisfree Cabernet Sauvignon
Louis M. Martini, Napa Valley Cabernet Sauvignon
Textbook, Napa Cabernet Sauvignon
Trapiche, Iscay Malbec Cabernet Franc
Catena Zapata, Angelica Zapata Malbec
Pyros, Single Vineyard Block No.4 Malbec
Emiliana, Ge
Matetic, Syrah
Garage wine co., Vigno Carig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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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지럼증을 참을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안에는 보물이 숨겨져 있다.
저평가된 주식처럼.
"안젤리카 자파타 말벡 두 잔 주세요. 안주도 그에 맞춰서."
"알아."
와인은 프랑스만의 특산물이 아니다.
전세계 수많은 국가들이 재배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구세계, 신세계 그런 거.'
신세계.
미국으로 대표된다.
새롭게 와인을 재배하기 시작한 지역이다.
신의 물방울에만 해도 가성비가 좋은 지역으로 소개되었다.
그것도 과거의 일이다.
꼴꼴꼴~
출판 연도를 생각하면 당연하다.
현재 시점에서는 구세계만큼이나 프리미엄이 붙어있다.
"아르헨티나의 와인이에요."
"아르헨티나요? 최근에 뉴스에서 봤는데……."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그 나라죠."
최근에는 호주, 남미, 아프리카가 유력하다.
특히 남미쪽의 와인이 주목 받는다.
'경제가 어렵잖아.'
인건비가 싸다.
달러에 목마르다.
좋은 와인이 낮은 가격에 수출된다.
그것은 좋은 투자 기회이기도 하다.
안젤리카 자파타 말벡을 한 모금 입에 머금자.
꿀꺽!
비교도 안되게 진하다.
샤또 딸보가 붉게 익은 자두였다면 이것은 거무스름한 서양 자두다.
응축된 과육이 맛이 터져 나온다.
그 뒤로 카카오와 장미의 복합미가 혀를 강타한다.
"맛있어요! 너무 진해서 많이는 못 먹겠지만……."
"가격은 얼마쯤일 것 같아요?"
"글쎄요? 거품이 없다고 했으니까 한……, 절반?"
샤또 딸보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와인 평가에 자주 쓰이는 앱인 비비노(Vivino)에서도.
'5점 만점에 4.6점으로 훨씬 앞서지.'
물론 일반인들의 평가다.
따자마자 바로 즐길 수 있고, 맛이 진한 것에 후한 점수를 준다.
조작 논란도 있다.
미국 와인의 가격을 올리기 위해 선물업자들이 개입한 정황이 포착된 것이다.
꿀꺽!
그 점을 감안해도 훌륭하다.
안젤리카 자파타 말벡은 10만 원대의 샤또 딸보에 필적한다.
"고작 2만 원짜리가요."
"2만 원이요?! 저도 사고 싶을 만큼 싼데……."
"그렇죠?"
현지 가격은 매우 싸다.
아르헨티나의 경제적 여건이 기적적인 가격을 가능케 만든다.
'국내에서는 3~4만 원 대이긴 하지만.'
한국의 주세, 운송비 등.
주식처럼 딸칵으로 거래하는 게 아니니 신경 쓸 것이 많다.
그럼에도 매력적인 가격인 것은 사실이다.
와인을 모르는 서연씨조차 사고 싶을 만큼.
"미리 사뒀다가 가격이 올랐을 때 팔면 좋을 것 같지 않아요?"
"오……, 진짜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제가 하는 일이 그런 거거든요."
"?!"
와인.
대표적인 비즈니스 음료다.
맛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그 맛을 가격으로 환산할 수 있다면?
수많은 와인업자들이 그것을 사업 기회로 삼는다.
'실제로는 훨씬 복잡하고, 난해한 과정을 거치긴 하는데.'
농업 기술의 발전.
브랜드가 만드는 영향력.
후진국은 정치와 치안까지 고려 대상이다.
환헷지를 필수로 걸고 들어가야 하는 등 쉽지 않다.
일반인들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지만.
"세계에는 이렇게 저평가 받고 있는 자산들이 있어요. 저는 그것을 감별하고, 먼저 투자하는 것으로 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런 직업이었군요? 투자자가."
"네."
내가 말하는 바의 요지.
삼척동자도 이해했을 것이다.
주식 투자를 직업으로 삼는다는 건.
'이 정도로 설명을 했으면.'
시청자들에게도 충분히 와 닿는다.
아니,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라도 말이다.
서연씨의 얼굴이 붉게 물든다,
그 이유는 알코올이 들어가서만은 아닐 것이다.
꿀꺽!
억지로 말을 짜낼 필요는 없다.
와인을 마신다.
함께 나온 안주와 함께.
생햄을 감은 에멘탈 치즈가 씹힌다.
그 깊은 풍미는 맛이 강한 말벡 와인에 뒤지지 않는다.
"와인을 잘 알고 계신 것도……."
"투자 이전에 취미도 솔직히 있어요."
"아."
"이렇게 무뚝뚝한 여자를 알아가는 것도 좋으니까요."
말로써 설득하는 단계는 지났다.
듣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알아서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똥을 싸도 박수를 칠 시간이지.'
진한 보라빛의 액체.
와인이 담긴 잔을 천천히 돌린다.
그와 함께 숨겨져 있던 향들이 피어오른다.
샤또 딸보처럼 수년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하지만 좋은 와인은 시간을 두고 마시는 건 색다른 경험이다.
"말수가 적은 여성과 체스를 두고 있는 것 같아요. 체스가 끝난 후가 기다려집니다."
"무뚝뚝하다고 하신 이유가……."
"네, 이 와인은 지금부터 훨씬 맛있어질 겁니다."
간단하게 함락시켜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