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살 끄니까-267화 (267/450)

EP.267

그사세

충청남도의 어느 산.

타악!

산기슭을 따라 올라가고 있다.

레이첼도 내 뒤를 부지런히 따라온다.

"어딜 가는 거죠?"

"가면 알아."

"갑자기 왜 산을……."

등산이다.

아저씨들 좋아하는 취미로 나도 예전에는 좋아하지 않았다.

'근데 나이를 좀 처먹으면.'

자연이 그리워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육체가 바라게 된다.

건강식이 당기는 것처럼 말이다.

패스트푸드는 속이 더부룩해서 못 먹는다.

"체력이 후달려?"

"걱정 받을 정도는 아닙니다."

"그럼 괜찮겠네."

"근데 조금."

"응?"

아직 어린 레이첼은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

척 보기에도 공주님 같으니까.

'체력 트레이닝은 하는 것 같지만.'

명문가 태생.

자기 관리에 소홀하지는 않다.

그렇기에 약점인 부분도 존재했다.

긁적

하얀 팔을 긁적인다.

붉게 부어오른 자국은 내가 때린 스팽킹 흔적이 아니다.

"벌레 물렸네."

"위험한 건……, 아니겠죠?"

"한국에는 그런 생물 없어."

해외에는 있다.

나라별로 주의해야 할 벌레 혹은 병이 한두 가지씩은 말이다.

'한국은 청정구역이지.'

독거미는 커녕 맹수도 거의 없다.

독버섯 같은 걸 찾아 먹지 않는 이상 안전하다.

긁적

그럼에도 싫은 건 싫은 것.

벌레 물린 부위를 만지며 신경이 쓰인다는 표정을 짓는다.

"약 뿌려줘?"

"약이 있어요?"

"몸에 뿌리는 벌레 기피제인데."

"뿌려줘요. 어서!"

"뿌려줄 테니까 옷 벗어봐."

"?!"

이런 일이 있을 것 같았다.

미리 준비해온 벌레기피제를 흔들며 반협박을 한다.

'어쩔 건데. 니가 뭘 할 수 있는데?'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기 마련이다.

실랑이를 하던 레이첼이 항복을 한다.

사락~!

옷을 벗는다.

핏줄이 비칠 만큼 하얗고 맑은 피부가 드러난다.

"사람 오기 전에 얼른……."

"괜찮아. 이 루트는 거의 안 와."

"얼른 뿌리기나 해요!"

칸막이 하나 없는 야외에서 말이다.

수치심보다 벌레에게 물리지 않는 걸 선택했다.

촤악−!

온몸 곳곳에 스프레이를 뿌리며 감상한다.

언제 봐도 완벽하기 그지없는 몸매다.

'쿨하게 무시하네.'

괜히 부끄러워하면 나만 즐거워한다.

반응을 해주지 않으며 넘기려는 생각 같지만.

"눈 떠."

"다 한 거죠?"

"그래."

"근데……, 제 옷 어디 있어요?"

눈을 떴을 때는 없다.

분명히 풀 위에 올려뒀을 자신의 의복이 말이다.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핀다.

이내 확신에 찬 표정으로 나를 째려본다.

"You’re such a stupid idiot!"

엎질러진 물.

저 멀리 앞서가자 욕설을 뱉으며 무섭게 쫓아온다.

'흥분해서 모국어가 튀어나왔네.'

화가 난 그녀는 정말 매력적이다.

가끔씩 일부러 화를 돋우고 싶을 만큼.

"어서 옷 돌려줘요!"

"나한테 있다는 증거 있어?"

"두고 봐요. 용서하지 않을 거야."

고이 접어 가방에 넣어두었다.

벌레 스프레이를 뿌려주는 사이에 말이다.

어금니를 으득 씹는다.

볼장 다 본 사이라도 야플은 아직 일렀던 것 같다.

'엘프가 산림욕 좀 할 수도 있지.'

알몸의 백인 미녀.

누가 목격한다고 해도 산에서 엘프를 봤다고 구전될 것이다.

"이러다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럴 일 없다니까."

"남 일이라고 정말!"

"어허."

"!!'

레이첼의 어깨에 손을 두른다.

가슴을 가린 팔을 강제로 치운다.

직립 보행.

인간에게 당연할 걸음걸이가 너무나도 어색하게 느껴진다.

'유두가 꼿꼿하게 섰네.'

그와 반대로 부드러운 가슴은 출렁인다.

매끈한 피부를 타고 떨어지는 땀은 핥고 싶다.

"이곳."

"응?"

"아름다운 산이네요.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어요."

"그렇지?"

산림욕이 익숙해진 모양이다.

주위의 자연 경관을 살펴볼 만한 여유가 생겼다.

별 거 없는 산.

도시에만 사는 사람은 그 자연스러운 광경만으로도 감격하곤 한다.

'여기까지 온 이유이기도 하고.'

조금 더 올라간다.

산 정상까지 가는 게 아닌 만큼 목적지는 금방 도착한다.

"Temple! 저기 절이 있어요!"

"그래서 온 거야."

"한국의 절은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그 차림으로?"

"아."

사찰.

한국의 절 말이다.

의아하게도 산속에 꼭꼭 숨어있다.

'세상에 우연이라는 게 있겠냐만은.'

노출녀를 두고 안으로 들어간다.

유명한 절은 아니다 보니 웅장하다는 느낌은 없지만.

"스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 보입니다."

"그건 제 대사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역사가 잘 보존돼있다.

불교가 번창하던 고려시대 때 세워진 사찰이다.

그만큼 오래됐다.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시주의 공양이 중생들에게 평안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 또한 부처님의 뜻이겠지요."

"나무 관세음보살."

공양.

기부를 했다.

전통적인 방식의 보수가 이루어지며 옛 모습을 되찾았다.

그 인연으로 알고 지내고 있다.

주지스님과 농담 따먹기도 할 정도로 말이다.

'절세를 위함도 있고.'

지정기부금에 해당한다.

종교 단체에 대한 기부는 세금을 공제 받을 수 있다.

"기부? 당신이 기부를 했다고요?"

그것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노출녀가 옷을 입고 사찰에 들어왔다.

"할 수도 있지."

"자신밖에 모르는 싸이코패스인 당신이?"

"그건 좀 너무 나간 거 아니야?"

뭔가 케케묵은 오해가 남아있다.

레이첼이 나의 의도를 의심하고 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순수한 기부.

그런 걸 할 만큼 내가 시간이 썩어나는 사람은 아니다.

절세 때문이라면 다른 방법도 많다.

하고 많은 절 중에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끼릭−!

스님의 안내를 받아 법당 안으로 들어간다.

오래된 사찰답게 외여닫이 문이다.

"차를 내오겠습니다."

주지스님께서 합장을 하며 둘만의 시간을 내어주신다.

레이첼이 궁금증을 쏟아낸다.

"무슨 목적이 있는 거죠?"

"조금만 있으면 알게 될 거야."

"뭐를요?'

"전부 다."

의아할 만도 하다.

기부를 한 목적도, 이곳에 온 이유도, 질문에 대한 대답도.

끼릭−!

스님이 답을 갖고 오신다.

쟁반 위에 올려진 도자기 찻잔과 주전자를 내려 놓는다.

"보살님께서는 차를 하시는지요."

"나무 우린 물 먹을 거냐고."

"한국말 할 줄 압니다."

스님께서 눈치를 좀 보신다.

워낙 시골이다 보니 서양인 신자가 찾아오는 일은 드물다.

'내용물도 그렇고.'

차주전자.

찻잔에 조금씩 따른다.

맑고 투명한 액체에서 싱그러운 전나무 향이 올라온다.

찻잔을 두 손으로 잡고 홀짝인다.

레이첼도 나와 스님이 하는 것을 보고 예법을 흉내 낸다.

콜록! 콜록!

입맛에 안 맞는 모양.

법당 내에서 기침을 하는 불경스러운 짓을 저지르고 있다.

"향이 좋네요."

"부처님의 은덕이지요."

"근데 이거 술 아닌가요?"

"부처님의 은덕입니다."

주지스님이 인자하신 미소를 띄운다.

레이첼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껌뻑껌뻑 한다.

'종교인이니까.'

개신교 목사는 금주가 원칙이다.

불교의 스님은 더 탈속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술을 마시다니?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 해도 이해가 되지 않을 만하지만.

"이것은 차입니다."

"차……, Tea라고요?"

"나무의 잎과 가지를 물에 우렸으니 이 어찌 차가 아닐 수 있겠습니까?"

"저 스님 억지를 부리는데요?"

"종교인이 원래 그래."

크리스천들은 와인은 술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라고 하면서 마신다.

스님들도 그러지 말란 법이 없다.

'차라고 생각하며 마시면 된다는 거지.'

술도 차도 재료는 비슷하다.

만드는 방식에 따라 알코올이 생길 뿐.

꿀꺽!

그래서 이름도 금설차(金雪茶)다.

한국 승가에서 내려오는 비법술이다.

"맛은 괜찮네요."

"그래?"

"맑고 상쾌한 소나무, 이것은 나무의 진액인가요? 원시적인 달콤함을 품고 있어요. 이 한 잔에 한국의 숲이 있습니다."

"취했네."

전나무 송진으로 만든 증류주.

맛은 레이첼이 테이스팅한 그대로다.

'약간 솔의눈 500배 느낌.'

외국의 진과도 느낌이 비슷하다.

하지만 진에는 없는 깊은 맛이 존재한다.

이곳 사찰에 기부를 결정한 이유 중 하나다.

스님들의 술이라 구하기가 힘들다.

"시주가 풍류를 즐기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한 박스 낭낭하게 포장하였습니다."

"이게 다 부처님의 뜻이겠지요."

"나무 관세음보살."

금설차 한 박스를 받아든다.

시중에서는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귀한 술이다.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토닉워터 타먹으면 K−진토닉이다.

주지스님께도 가르쳐줬더니 맛이 쥑여준다며 요즘 절간에서 진토닉을 타드신다고 한다.

"정말 어이가 없네요. 절에서 술을 만들다니."

"바이엔슈테판도 수도사들이 만든 건데?"

"그건 그……, 그렇지만."

스님들도 사생활이 있다.

일반인들이 왈가왈부할 영역은 아니다.

레이첼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납득을 했지만.

"결국 여기에 뭐가 있다는 거죠?"

다른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아니, 처음부터 확실히 했다.

한국에 투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근데 그 정도로 스케일이 커져버리면.'

나도 대답을 크게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산속 깊은 곳에 있는 절까지 찾아온 것이다.

"이 절이요?"

"그래."

"절에 대체 무슨 의미가……."

"이곳이 바로 한국 그 자체니까."

"?!"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찰은 한국의 역사 그 자체다.

유일하게 보존된 문화재다.

'한반도가 전쟁이 많았으니까.'

평지에 세워진 건 대부분 불타거나 약탈 당했다.

산지에 있는 사찰만이 살아남았다.

"한국 역사는 파란이 많거든. 중세까지 갈 필요도 없이 근·현대사만 봐도 찬란하지."

"그렇죠……. 6.25는 미국인인 저도 공부했습니다."

몇 번이나 대전쟁의 무대가 되었다.

그때마다 전국민이 들고 일어나 어떻게든 막아냈다.

'그게 뭐 대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한국 사람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세계사를 놓고 봤을 때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다.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확실히 숫자만 놓고 보면 매력적인 투자처지."

"인구, 자원, 지정학적 위치 등에서 성장 잠재력이 높게 평가 받죠."

"그런데 그 안에 사람은 없잖아."

"사람……, 이요?"

선진국의 투자자들이 흔히 하는 실수다.

통계상으로 나타나는 지표만 보고 그 나라를 평가한다.

'문화, 역사, 국민성. 가장 중요한 것을 빼놓고.'

과거를 모르면 미래를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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