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65
그사세
미국 버지니아.
"본 지역은 향후 30년간 뚜렷한 성장세가 관측되고 있으며……."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이 있다.
건축 양식은 고대 로마.
마치 신전과도 같이 준엄한다.
하지만 내부는 현대식에 가깝다.
"이상입니다."
"기존의 정보와 크게 다르지 않군요."
"네, 특별히 더하거나 첨삭할 부분은 관찰하지 못했습니다."
"분발하도록 하세요."
밝게 빛나는 샹들리에 아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회의 테이블이 보인다.
양옆에는 12명의 젊은 남녀가 앉아있다.
상석에는 머리가 거의 벗겨진 백인 남성이.
"당신들은 가문의 은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Sir! Yes, sir!""
"단 일분일초도 허투 소비해서는 안됩니다."
""Sir! Yes, sir!""
"모든 것은 오직 가문을 위해서."
""Sir! Yes, sir!""
희의를 주도한다.
백인 남성의 이름은 발블레어.
그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장로다.
이 12명의 남녀를 평가하고 있다.
이들 중 한 명은 가문의 당주을 이을 것이다.
'관찰할 게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해오는 것이 가문에 대한 보은이거늘.'
매 세대 반복된다.
로스차일드가 수백년간 존속될 수 있었던 비결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다.
시킨 것 이상을 하지 않는다.
요즘 신세대 당주 후보들은 정말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다음은 동아시군요."
"네, 장로님."
"오, 레이첼.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줘요."
그나마 믿을 만한 후보 중 하나다.
아니, 능력만 놓고 본다면 역대 당주들에 비견될 정도다.
'실적도 있고.'
비트코인.
최근 뜨고 있는 자산이다.
세간에서는 가상화폐다 뭐다 하며 떠들썩하다.
가문에서는 10년 전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프로젝트의 일부를 레이첼에게 맡겼는데.
"제가 있는 동아시아, 정확히는 한국에서 겪은 일화 몇 가지를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기간까지 단축시킨 걸 생각하면 보이지 않는 부분은 그것을 넘었다.
'능력은 좋아 능력은.'
그녀의 나이가 20대 초라는 걸 생각하면 대단하다.
지금 보고하고 있는 내용도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온다.
"한국의 스톡 마켓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새로운 시스템 트레이딩 모델을 구축한다면 수익률을 큰 폭으로 향상시키는 것도 가능하리라 보여집니다."
투자 사이클은 10년 주기로 변한다는 통설이 있다.
지금은 미국이지만 다음에는, 또 향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한국도 가능성이 제로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각 당주 후보들.
여러 지역에서 연수를 하는 이유다.
해당 지역의 금융 환경에 미리 적응시킨다.
그 어떤 미래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말이다.
어떤 지역이 중심이 되더라도 로스차일가는 문제가 없다.
"신선한 시각의 프레젠테이션이었어요."
"감사합니다."
"그래서 얼마만큼의 이득을 만들 수 있나요?"
"아직 구체적인 수준의 모델까지는……."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 안에 포함돼있을 것 같지 않다.
보고의 내용이 만족스러움에도 발블레어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
'그래봤자 한국이지 않나.'
손바닥만한 크기에 인구 5천만 남짓인 나라.
그것이 발블레어가 알고 있는 한국의 전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숫자와 데이터를 기반으로 추산을 해보면 한계가 명확히 보이니까.
"소요되는 예산은? 운용 인력은?"
"그건……."
"그리고 기회 비용은? 그 모든 것을 감수할 만큼 한국은 매력적인 투자처인가? Never!"
이미 성장할 대로 성장했다.
앞으로의 미래가 그곳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왜 하필 한국을 선택했냔 말이지.'
레이첼에게 동아시아를 권유한 건 자신이다.
어리석게도 그녀는 한국을 고르고 말았다.
"나머지 후보자들도 잘 들으세요. 우리 가문은 세계의 중심입니다. 큰 물줄기를 움직이는 힘이죠. 작은 강과 시냇물에 연연해서는 안됩니다."
""Sir! Yes, sir!""
만약 중국이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G2로 불리고 있는 세계 2위의 GDP를 가진 나라다.
향후 패권을 쥐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재도 많은 경제학자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중국 시장을 분석한 거라면.'
천문학적인 자금과 인력을 동원해서라도 트레이딩 모델을 구축해볼 만하다.
실제로 시도가 이루어지는 중이다.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등.
정치·금융 시스템이 후진적이다.
아직 유의미한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를 했을 거라 봅니다."
"그렇습니다. 장로님."
"지금이라도 지역 이전을 고려해보는 게 좋을 거에요. 중국이 아니더라도 일본 등 선택지는 있으니."
그러기 힘든 영역이다.
사람의 심리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 단서를 제공했다는 점에서는 흥미롭다.
'결국 분가의 말석. 그릇이 작은 건 필연이라는 건가.'
한국이라서 문제다.
한국도 금융 시장의 카나리아로서 제법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는 있다.
하지만 작은 나라.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면 책정되는 PER도 돈의 흐름도 주류에서 빗겨난다.
'…….'
그러한 사실.
레이첼이라고 모르는 건 아니다.
오랜만에 찾아온 가문은 여전히 숨이 턱턱 막힌다.
정기 회의에 참석하기 위함이다.
각 분가의 당주 후보자들이 모여 근황을 보고한다.
"저도 같은 동아시아. 중국의 상하이에서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밝은 금발을 가진 백인 남성.
칼로이의 보고가 시작되자 분위기가 달라진다.
그의 집안이 가진 가문 내 입지 때문이다.
로스차일드 분가 내에서도 서열이 나뉜다.
'할아버지가 젊으셨을 때만 해도.'
자신의 집안도 못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 대에서 사고가 있었고, 이후로는 찬밥 신세.
"칼로이도 좀 더 노력을 해야 할 것 같군요."
"하하, 죄송합니다."
"중국은 중요한 지역이니 각별한 신경을 기울여야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장로님!"
즉, 같은 라인에서 경쟁이 안된다.
중국을 선택하지 않은 건 그것을 알고 있어서다.
정기 회의가 끝이 난다.
숨을 조여오는 가문의 심장에서 벗어나려고 하던 그때.
"레이첼!"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무슨 일이죠?"
"무슨 일이냐니. 우리가 무슨 일이 없으면 대화도 못할 사이야?"
"용건만 간략하게 해주시죠."
"하하! 농담도!"
칼로이다.
그는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너무 직설적으로 들이대 곤란할 지경이다.
'서로의 입장을 아는 건지. 알고도 그러는 건지.'
같은 로스차일드가.
그렇다고 교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지 않는 것이 더 일반적일 정도다.
서로에게 틈을 보이지 않으려고 말이다.
최소한의 대화조차 하지 않아 정기 회의의 분위기는 항상 냉랭하다.
"나는 지금 푸단대에서 조교수를 하고 있어. 젊고 잘생긴 교수님이 왔다며 어찌나 인기가 많은지 몰라."
"여전히 눈에 띄는 짓을 즐네요."
"그렇지. 나는 너처럼 우수하지 않으니까."
오직 그만이 다르다.
가문 내 입지.
그리고 성격.
다른 당주 후보들과도 친분이 있다.
그런 정도라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자신이라고 적대 관계를 만들고 싶은 것은 아니니까.
"항상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불안하거든. 너와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를 하지 못할까 봐."
"제가 최선을 다하지 않는 걸로 보이나요?"
"실제로 한국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고 있잖아?"
더 끈덕진 방향이다.
대놓고 선을 그어도 집착에 가까운 수준으로 달라붙는 이유는.
'순수한 호의는……, 아니겠죠.'
그는 자신의 여건을 알고 있다.
어쩌면 뒷조사까지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하다.
칼로이가 자신에게 요구한 사항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타인인 당신이 제 결정에 간섭할 권한은 없습니다."
"맞지, 맞아. 그럼 타인이 아니게 되면 되는 거잖아?"
혼인.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예 없는 일은 또 아니다.
로스차일드가는 특수하다.
타 분가끼리는 혼인을 하는 것도 용인해준다.
'당주 후보를 내세우는데 유리하다는 장점도 있죠.'
정치적인 이유.
만약 그런 것이었다면 자신에게 접근하지 않았을 것이다.
분가 중에서 가장 힘이 약하다.
혈연을 맺어도 특별한 메리트가 없다.
"너이기 때문이야 레이첼."
"용건만 말해주세요."
"하하……, 쌀쌀맞아."
자신에게 접근하는 저의를 모르겠다.
의심을 가진 레이첼과는 다르게.
'정말 매력적인 여자야.'
칼로이는 진심이다.
그녀의 외모, 능력, 가치관까지 모든 것을 사랑한다.
월등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가짜 다이아몬드라면 그녀는 진짜.
"쉽게 동의해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어. 마음이 열리면 언제든지 연락해줘. 어떤 시답잖은 일이라도 좋으니까."
"저에게는 지금 이 상황이 시답잖습니다."
"하하……, 농담도."
매겨지는 가치도, 아름다움도 깊이가 다르다.
같은 엘리트 사이에서도 격이 나뉜다.
'하지만 너에게 없는 것이 나에게는 있지.'
자신이 가진 힘과 그녀가 가진 능력.
둘을 합친다면 당주 경쟁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로스차일드가를, 세계를 손에 쥘 수 있다.
물론 고삐를 쥐는 건 자신이겠지만 말이다.
부웅−!
간신히 칼로이를 떨쳐낸 레이첼은 자차를 타고 공항으로 간다.
한 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다.
한국에 있는 쪽이 마음이 편하다.
가문과 관련된 인간 치고 정상인이 없다.
'…….'
하지만 돌아간다고 변하는 게 있을까?
잠시간의 현실 도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결국에는 마주 봐야 한다.
가문 내에서의 경쟁도, 끈덕지기 짝이 없는 칼로이도.
'나의 결정은 틀린 판단이었던 걸까요.'
장로님의 말씀.
다소 극단적이긴 해도 일리가 있다.
아니, 금융의 관점에서 100% 옳은 소리다.
한국은 사람으로 따지면 청년을 넘어 장년에 접어든 나라다.
그 차이는 실로 커다란 것이다.
과거 미국을 넘보던 일본이 고령화와 함께 저물었던 것처럼.
똑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한국에서의 공부는 헛고생이 될지 모른다.
가문에서의 경쟁도 꼬리 내린 개가 될 수 있다.
아무리 고민을 해도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이 답답한 마음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당신이라면 어떤 대답을 내놓아 줄까요…….'
단 한 명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