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40
발판
기회.
아니, 필연이다.
'사람 사는 세계라는 게.'
사실 다 비슷하다.
아래에서는 위가 보이지 않을 뿐이다.
마치 등산.
처음 올라갈 때는 정상에 대한 환상이 꽃피게 된다.
막상 가면 별거 없다.
올라가서 할 수 있는 건 야호~! 한 마디 뿐이다.
"박사장 신수가 훤해 보여?"
"아니~ 뭐 그냥 평소대로지."
"평소는 무슨. 요즘 사업 잘된다는 소식 들었는데!"
투자유치 설명회에 나왔다.
호텔을 대관한 넓은 공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그 한 명, 한 명이 기업의 중책 혹은 대표하는 인사다.
일반인이라면 벽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작년만 못해."
"어이구, 작년에도 사업 확장하지 않았어?"
"박사장은 좋겠어~ 사업이 매년 잘되고."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는 거지 흐흐."
인간이다.
똑같이 밥 먹고 똥 싼다.
경제 활동을 통해 돈을 벌고, 소비 활동을 통해 돈을 쓴다.
'근데 뭐 다르겠냐고.'
지적 수준도, 화젯거리도 일반인들과 큰 차이가 없다.
다른 부분이 있다면 규모.
"흐음……, 자네는 누군가?"
"초청을 받아서 왔습니다."
"그래? 그럼 처음 왔겠네. 내가 누군진 아나?"
그리고 지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있는 자가 갑이라는 것이 가장 절실하게 느껴진다.
'그런 거 있잖아.'
하청에게 갑질을 했다던지.
구시대적인 관습을 강요한다던지.
솔직히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잘 와 닿지 않는다.
띠꺼우면 퇴직하면 되기 때문이다.
퇴직금 받을 때까지 꾹 참고 체리피킹으로 되돌려주면 되는데.
"모르는데요."
"허어……, 날 몰라?"
"이봐. 박사장! 무슨 일이야?"
"이 친구가 나를 모른다고 하네?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 같은데."
"큰일 날 친구구만."
"사장님이 들었다가 경을 치겠어~."
사업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
뒤로 물러나는 순간 퇴직이 아닌 파산이니 말이다.
법을 멀고 주먹은 가깝다.
나이 든 세대의 특성이 더해지며 갑질이 일상처럼 일어난다.
'틀딱들 시끄러워.'
도저히 효율적이지 못한 짓.
투자자의 관점에서 경멸을 하게 되는 그런 부류다.
최소 50대는 돼보이는 아저씨 셋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
꽤나 즐거워 보인다.
"별로 알 바 아닌 거 같은데."
"뭐, 뭐라고?"
"젊은 놈이 말 싸가지 없이……. 너 이 새끼 사장 누구야? 어디 있어?!"
"여기 어딘가 있겠죠."
"누구 직원이길래 이렇게 등등할 수 있는지 얼굴 좀 봐야겠네. 너 이 새끼 거기 딱 있어! 도망만 가기만 해봐."
사회 초년생 꼽주는 것이.
자신들의 사회적 영향력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가정에서도 그렇게 인정 받는 가장이었으면 좋겠네.'
얼마 전 둘마트에서 봤던 남편처럼 잡혀 살지 말고.
"젊은 친구가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
"박사장이 이 업계에서 발이 넓은 사람인데 이러다 업계에서 일 못해!"
스트레스가 쌓인 걸지도 모른다.
난데없이 말을 걸더니 시비까지 물 흐르듯 이어진다.
타악!
흔한 일.
아직도 사회의 한 켠에서는 비현대적인 갑질 문화가 뿌리 깊이 내려있다.
"무슨 일이시죠?"
"어, 백사장!"
"젊은 놈 교육 좀 시키고 있었지……. 혹시 아는 사람이야? 백사장네 직원?"
대한민국 기업 문화가 발전할 수 없는 이유.
윗물이 썩어있으니 아랫물을 아무리 정화해봤자 의미가 없다.
'그 첫 번째라고 하긴 에매하겠지만.'
정신을 차리게 해줄 수는 있을 것이다.
컨설팅 이후 각별한 관계를 가지게 된 백화선씨가 다급하게 다가온다.
그 모습을 보며 씨익 웃는다.
두고 봐라 하는 표정.
박씨 성을 가진 사장님으로서는 내가 압박감을 느낄 줄 아는 모양이지만.
"이분은 제가 모셔온 분입니다."
"이 친구가 무슨 실례를 범했는지 봤어야 돼~."
"백사장이 유해서 한 소리 못하겠으면 우리가 업계 선배로서 예절을 뼛속까지……."
"저희 직원이 아닙니다."
""뭐……?""
그럴 위치가 아니다.
두고 보라는 사람이 무섭지 않다는 사실만 잘 가르쳐준다.
'그런 병크를 터트려도 평소라면 유야무야 넘어가겠지.'
그만한 사회적 입지를 가지고 있다.
TV에서 종종 나오는 갑질 뉴스는 빙산의 일각이다.
"점포의 컨설팅과 IR 상담을 도와주시고 계십니다. 저희 회사를 도와주시는 중요한 협력자이십니다."
"이, 이렇게 젊은데?"
"저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지만 나이는 상관이 없더라고요."
웬만한 건 힘으로 무마한다.
아니, 애시당초 을의 입장에서 이의를 제기하지도 못한다.
그러니까 무턱대고 시비를 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짓을 함부로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장님들 얘기하는데 새파랗게 어린 놈이 감히……."
"곽우석 대표님 아시지 않습니까?"
"아 그 곽사장."
"이야기는 들었어~ 무리하게 사업 확장하더니만 쯔쯧."
"여기 계신 찬욱씨가 도와주셨습니다. 사실 저희가 많이 힘든 상태였는데 컨설팅에서도 IR에서도 도움을 주신 덕에 살아남을 수가 있었죠."
""…….""
머지않은 미래에 가르쳐줄 수도 있다.
나에 대해서는 몰라도 곽우석 대표에 대해서는 잘 아는 모양이다.
'이제 전 대표인가?'
좁은 세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것이다.
회사가 망해버렸는데 모르면 더 이상하다.
정말로 이상한다.
수십 년이 된 회사가 망했다면, 흡수 당했다면 업계에서 뒷이야기가 돌 수밖에 없다.
"들으셨다시피 헤일즈푸드는 저희 푸드마켓에서 운영을 하고 있고, 찬욱씨도 지분의 40%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사, 사십 퍼센트?!"
"그렇게나 많이……?"
"아, 공동 경영자는 아닙니다. 감사하게도 경영권은 저에게 일임해주셔서요."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마음만 먹으면 경영권 싸움을 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걸 이해했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한 가치를 지녔는지도.'
172억 8500만 원.
곽우석 대표가 지분의 60%를 넘기는 대가로 받은 금액이다.
내가 투자한 금액은 115억 원에 달한다.
회사가 안정되면 최소 3배는 평가 가치가 뛴다.
"대충 그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일 있으면 연락하십쇼. 마음에 안 드는 회사가 있다던지."
""하, 하하…….""
싸다.
그럼에도 인수전에 참여하지 못했다.
억지로 웃고 있는 사장들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사업이 잘되긴 개뿔.'
인플레이션과 금리 인상.
사업, 특히 식품 사업이 잘될 수가 없는 환경이다.
잘된다 뭐다 떠든 건 매출 이야기겠지.
실상은 속 빈 강정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다.
슬금슬금 도망간다.
헤일즈푸드와 같은 신세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언변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잠시 다녀왔는데……."
"그 정도는 감수하고 온 거니까요."
"그, 그런가요?"
"그보다 부탁드렸던 일은 어떻게 됐나요?'
"아! 그건 확실하게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 피라미들.
몇 개 더 먹자고 아저씨들이 드글대는 장소에 온 것이 아니다.
'애시당초.'
발판으로 삼을 생각밖에 없었다.
헤일즈푸드의 지분도 처분할 생각이다.
백화선씨도 그것을 원하고 있다.
회사가 안정되는 대로 조금씩 인수하기로 했다.
끼익−!
그 대가까지는 아니다.
헤일즈푸드와의 경쟁은 그만큼 치열한 것이었고, 아직도 은혜를 느끼고 있다.
그래서 어려운 부탁도 받아주었다.
식품 업계 최상단에 위치하는 회사.
'둘마트지.'
딱히 규모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회사의 비전과도 상관이 없다.
보다 근본적인 이야기.
대한민국 경제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회장님."
"어, 왔어?"
"네, 이쪽이 전에 말씀드린 선구안을 가졌다는 그 IR상담자입니다."
"오~ 젊은데?"
"많이 젊죠? 근데 업계에서는 이미 이름이 알려져 있어서……."
재벌.
어디 가서 한 번은 들어본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의외로 모른다.
'재벌이 지배하는 나라에 살고 있으면서도.'
둘마트는 구세계 그룹의 자회사다.
그리고 그 위에는 오성 그룹이 버티고 있다.
핏줄로 연결이 된 관계.
이 구조를 모른다면 '한국'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손익좌?"
"아~! 그 사람."
"유명한 친구야?"
"요즘 뜨는 애널리스트에요. 개인 투자로 수백 억을 벌었기로도 유명하고."
"그래?"
백화선씨는 식품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 인맥이 있다.
그것은 가장 윗선에도 닿아있다.
둘마트 회장에게도 말이다.
마침 최근 업계에서 핫한 헤일즈푸드의 몰락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 자. 일단 앉아. 다리 아프게 서있지 말고."
"알겠습니다. 회장님."
"실례하겠습니다."
단순한 유흥거리로 말이다.
시가총액 5조 원의 둘마트.
한국 경제계를 지배하는 재벌가의 핏줄.
'고작 수백 억이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어.'
아까 사장 소리 듣던 사람들도 중소기업 하청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천상계'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자네가 헤일즈푸드를 무너뜨렸다고?"
"그렇게 거창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하! 나도 복잡한 이야기하려고 부른 건 아니야. 술은 할 줄 아나?"
"좀 하죠."
호텔의 VIP들은 통째로 대관한 3층에 있다.
그리고 VVIP들은 이곳 별실에서 자신들만의 다과회를 즐기고 있다.
꼴꼴꼴~!
단, 술을 곁들인.
아무 라벨도 붙어있지 않은 유리병에서 연갈색의 액체가 쏟아진다.
"조금 독한데."
"독한 것도 잘 받아들입니다."
"그래?"
"요즘 애들이라고 무시하면 섭하죠."
대체 무슨 지랄을 하고 있는 건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입장이다.
'그런 문화가 있었다니까.'
아무것도 써있지 않은 유리병.
저 디캔터는 액체의 정체를 숨기기 위함이다.
이게 무슨 술이게?
니 따위가 알 수 있을까?
꼽을 주기 위한 방법이다.
꿀꺽!
고급 술은 부자들을 위한 문화다.
일반인은 발렌타인 30년도 손을 덜덜 떠면서 딴다.
하물며 맛에 대해서는 알 리가 없다.
이야기에 앞서 기를 죽여 놓을 생각이겠지만.
"괜찮은 위스키지?"
"네. 꽤 괜찮은 글렌파클라스네요."
"……어?"
세상의 온갖 술을 맛본, 마지막 순간까지 술을 마시며 갔던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 이야기다.
'뻔하잖아.'
테이스팅을 하면 간단히 검증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꽤나 놀란 모양이다.
주변에 있는 참모진.
회장의 눈치를 보며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말을 꺼내 놓는다.
"어, 어떻게 알았지?"
"저희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뭐, 간단하잖아요. 무화과와 파인애플의 열대과일 향. 올드하고 트레디셔널한 셰리 캐스크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징입니다. 하지만 원액의 몰티함이 느껴지는 것 보면 상당히 오래 쓴 캐스크고, 이런 오크통을 아직까지 소유하고 있는 변태 같은 증류소는 많지 않기 때문에 글렌파클라스라고 가볍게 유추해보았습니다."
""…….""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한다.
대기업의 회장님께서 취해야 할 모습이 아니다.
'진짜는 본 적이 없나 보네.'
테이스팅.
실제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게 마음대로 되면 '파리의 심판'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애시당초 비싸다.
술 한 병에 수십, 수백만을 호가한다.
그것을 다 마셔보고 각각의 특징을 추려낼 수 있는 사람은 희소하다.
"오……, 그래. 술맛을 아는 친구구만."
"제가 술맛을 좀 알긴 합니다."
"하, 하하! 알다 마다! 재밌는 친구야."
그 극소수의 사람 중 한 명이다.
회귀를 하고 재산은 날아갔어도 미각은 여전히 건재하다.
'아니, 그 전부터 날아갔나.'
아무튼 신고식은 가볍게 마쳐준다.
그런 다음 진짜 화제를 진행하게 만든다.
"자네가 둘마트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많이요."
":많이?'
"술은 조금 하지만, 주식은 꽤 많이 하거든요."
"하하! 그거 좋구만."
내 이야기를 들어볼 생각이 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