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2
死母펀드
울음.
월가의 마녀라고 불리던 그녀이기에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쌀 것 같네 정말.'
쾌감으로 말이다.
당장이라도 범하고 싶을 만큼 흥분된다.
"왜 울어요?"
"당신이, 당신이……. Look what you've done!"
"한국말로 해."
하지만 참아야 한다.
그녀를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 때까지는.
'일단 첫 단계는 된 것 같은데.'
좋든 싫든 나를 못 잊게 만든다.
강렬한 첫인상을 심어주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조금 방치한다.
그녀의 안에서 내 존재감이 커져 갈 때쯤에.
"당신 때문에 제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요?"
"어떻게 됐는데요?"
"그, 그건……."
적당히 달래준다.
매동을 속이는 것은 작전을 칠 때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래야 개미가 꼬이지.'
주식에서는 세력일지 몰라도 연애에서는 개미나 다름없다.
심리가 다 예상이 간다.
트라우마.
얼마 전, 첫 데이트는 레이첼의 마음에 커다란 충격으로 자리 잡았다.
"남자만 보면 덜덜 떨려요?"
"당신 때문입니다!"
"지금도?"
"?!"
"와, 떠네. 느껴서 떠는 줄 알았더니."
그랬을 것이다.
생각 이상으로 효과가 좋아서 보람스러울 정도다.
'내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지만 죽이지는 못하겠지.'
트라우마의 원흉.
어떻게든 지지고 볶아야 극복할 수 있으니 말이다.
뚝! 뚝!
살얼음이 생길 것 같은 냉랭한 눈가에서도 눈물이 흐를 수 있다.
다행히 고드름이 맺히진 않는다.
"그렇게 제가 싫어요?"
"그럼 좋아하겠어요?"
"저는 좋은데."
"Psychopath! Idiot!"
나를 미워하고 있다.
욕이라도 쏟아부어야 속이 시원할 것 같다.
다 받아주기로 한다.
개미가 시장에서 수익을 내는 걸 허용하듯이.
'결국은 크게 물리겠지만.'
나에게 말이다.
한바탕 눈물과 쌍욕을 쏟아내자 마음속 응어리가 풀린다.
동시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든다.
너무 감정적으로 몰아붙인 건 아닌지.
"아무튼 저는……, 당신이 싫습니다."
"저는 좋다니까요?"
"앞으로 저에게 관여하지 말아주세요."
"삐졌어요?"
말투가 조금은 누그러진다.
나이에 걸맞게 토라진 여자아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사실은 기대하는 거겠지.'
첫 남자.
입술을 빼앗겼다.
더한 짓도 해버렸다.
순수하게 나쁜 기억만이었다면 쌍욕을 하고 돌아갔을 것이다.
조금쯤은 미련이 남는다.
쪼옥!
오해가 있었던 게 아닌지.
고개를 돌리고 있기 때문에 손쉽게 뺨에 키스할 각이 나온다.
"사람이 진지한 얘기하고 있는데!!"
"저도 진지한데요."
"그럼 왜……."
"왜요?"
어루만져 준다.
그제서야 진심을 이야기할 생각이 조금은 드는 모양이다.
뚝! 뚝!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눈물을 흘린다.
마음의 상처가 꽤 깊게 새겨져 있다.
'좀 더 정신 나갔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마음이 여려서 모질게 굴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깝다.
"레이첼씨가 너무 매력적이라서 그렇죠."
"그렇게 심한 짓을 해놓고."
"그러니까 그런 거죠."
"그게 무슨 psycho 같은……."
조금은 이성이 돌아와 있다.
그녀에게 그날 밤의 다른 해석을 들려준다.
'반쯤 궤변에 지나지 않지만.'
애초에 이성의 영역이 아니다.
설마 하게 되는 해피엔딩의 가능성.
그것을 찔러준 것으로도 충분하다.
나머지는 분위기 만들기에 있다.
"너무 매력적이라서 범하고 싶어지잖아요."
"그게 무슨 sex offender 같은……."
"근데 못 범하게 됐잖아."
"!!"
상승장으로 가는 듯한.
반말에 반사적으로 움츠린 레이첼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해 적개심을 푼다.
레이첼로서는 적응이 되지 않는다.
"제가 그……, 경험이 적어서 싫다면서요."
"처녀라."
"윽."
"미안해요. 섬세하지 못해서."
꼭 하고 안아준다.
갑작스런 변화에 어리둥절하는 레이첼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잔뜩 흥분했는데 못하게 됐잖아."
"뭐, 뭘요?"
"따먹으면 책임지라고 할 거 아니야."
"그야 책임은 당연히……."
'씨발련이 이럴 줄 알았어.'
볼을 빨갛게 물들인 채 보수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내가 따먹기라도 했으면 미친년처럼 따라다녔을 것이다.
그런 성격.
알고 있기 때문이다.
책임지지 않는 선에서 철저하게 몸도 마음도 농락한다.
"그래서 저한테 화풀이를 했다고요?!"
"그럼 뭐."
"기, 기가 차서……."
"성욕으로 푸는 게 나았을까?"
"?!!"
조금 끌어안은 것만으로 쫀다.
정말로 마음속 깊이 트라우마가 자리 잡은 모양이다.
'정신병원 보내고 싶네.'
그러기에는 아까운 인재.
잘 조교해서 자지와 주식만을 아는 여자로 만들고 싶다.
"그런 거면 설명을 하죠."
"설명하면 이해해줄 거에요?"
"성욕 때문이라면 정상참작의 여지 정도는 있으니까요. 용서하진 않겠지만."
절대 용서하지 않겠지만.
고개를 휙 돌린 채 중얼거리고 있지만 조금은 풀린 모습이다.
감정을 게워낸 것이 효과가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한 번 시원하게 게워내고 싶다.
"그럼 바로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덮쳐지고 싶지 않으면."
"!!"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못할 그녀는 아니다.
찌직−!
받아들이기가 힘들 뿐.
지퍼를 내려 눈앞에 들이밀자 또 다른 의미로 얼어붙는다.
"우, 우앗!"
오랜만에 인사를 시켜준다
* * *
행선지.
푸드마켓이 최초로 세운 점포였다.
'삼겹살집이라.'
헤일즈푸드의 주력 사업이기도 했다.
배웠던 것을 독립 후 써먹은 것이다.
하지만 순탄치는 않았다.
음식점 운영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거니와.
<전 사장이 집착이 심한 사람이라…….>
방해를 받았다.
헤일즈푸드가 근처에 매장을 오픈하며 노골적인 선전포고를 해왔다.
결과는 패배.
10년 넘게 쌓아 올려진 유통망과 시스템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역설적으로 사업 다각화의 계기가 되었다.
새 프랜차이즈들이 연전연승하며 자리를 잡았지만.
'헤일즈푸드는 발전이 없었다라.'
여전히 삼겹살집을 주력으로 삼고 있다.
매출 대부분을 의지하고 있을 정도다.
회사의 캐시카우.
그곳을 무너뜨린다면 순식간에 재정을 파탄까지 몰고 갈 수 있을 것이다.
꿀꺽! 꿀꺽!
조수석에 탄 레이첼이 페트병에 담긴 물을 마셔 댄다.
목이 몹시 말랐던 모양이다.
"아직도 목에 젤리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왜요? 사래라도 들렸어요?"
"당신 때문이잖아요!"
다른 이유였다.
취식한 단백질이 입맛에 영 맞지 않았다고 한다.
'없어서 못 먹는 애들도 있는데 실례네.'
연신 헛구역질을 해댄다.
그리고 틈틈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그렇게 자꾸 노려보면."
"불만 있어요?"
"그건 아닌데 또 흥분하게 될까 봐."
"!!"
그런 레이첼을 얌전하게 만든다.
허벅지에 손을 올리니 아주 다소곳하다.
'옳지.'
한 번 남자 맛을 보여줬더니 말을 잘 듣는다.
역시 여자는 자지로 가르쳐야 한다.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그러면 불편해서 어떻게 살아요."
"평소에는 안 그래요."
"평소에도 사이코 같은데."
"……."
사소한 부작용은 따른다.
그녀와 나의 사이에는 아직 넘어야 할 벽이 많다.
'여하튼.'
삼겹살집에 도착한다.
먹자골목의 사거리에 두 개의 삼겹살집이 눈에 듼다.
『돈육家』
『제주돼지집』
가볍게 한 잔 적시러 들어가는 이자카야와는 다르다.
본격적인 외식업에 해당한다.
조금 후미진 곳에 위치해도 된다.
상권으로 따지면 B급 이하로 썩 좋은 위치는 아니다.
'그런 곳에 나란히 있다면 우연일 수는 없겠지.'
사장님의 노고가 엿보인다.
푸드마켓의 제주돼지집은 간신히 운영만 되는 상태다.
"식사를 하러 온 건가요?"
"아, 말을 안 했나?"
"아무것도."
"업체 컨설팅을 하고 있어서요."
"Consulting?"
그나마도 가게 컨셉을 바꾼 덕분이다.
당시 제주 흑돼지가 공중파를 타고 유행했다.
'사람들의 소비 수준도 올라갔고.'
더 맛있는 걸 먹고 싶다!
소비자의 니즈를 충족시킨 것이 기업 생존의 비결이었다.
하지만 유행은 오래 가지 않는다.
결국 돈육가의 탄탄한 운영에 밀리고 말았다.
"의외로 다양한 일을 하고 있네요."
"온실 속의 화초랑은 다르지."
"뭐, 뭐라고요?!"
발작 버튼을 누른 모양이다.
매우 높은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는 그녀다.
'좋은 경험이 되겠지.'
하지만 방향성이 금융 경제로 한정돼있다.
실물 경제도 알아가면 좋을 것이다.
끼익−!
차를 댄다.
제주돼지집의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점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말씀하신 것들 준비해두고 있었습니다!"
제주돼지집 1호점의 점장 유청성.
사전에 통화를 통해 몇 가지 물품을 부탁했다.
『끝살』
『뽈살』
『두항정』
『등심추리』
『등심덧살』
『돈두』
돼지의 부위별 고기들이다.
다만, 시중에서는 볼 일이 없는 희소한 부류다.
"이런 잡고기들을 어디다 쓰시려고……."
"쓸 데가 있으니 부탁한 거겠죠."
"아, 네!"
평생 고기를 팔아온 점장님도 놀랄 만하다.
이렇게 정돈을 할 일은 보통 없으니까.
'순댓국이나 편육에 들어가지.'
하지만 대중적으로 먹는다.
돼지머리에서 나온 부속고기들로 맛 자체는 문제가 없다.
"이게 다 뭔가요?"
"왜요? 공주님은 비위가 약해서 보기가 역하시나."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거든요!"
외관상으로는 안 좋을 수 있다.
그래서 대충 썰어서 순댓국과 편육에 넣는 것이다.
'그만큼 싸지.'
고기가 뭉텅이로 들어가도 가격이 싼 이유다.
그것을 구이용 고기로 팔 생각이다.
평소에는 못할 진귀한 경험.
곱게 자란 레이첼을 놀려줄 겸 고른 장사 아이템인데.
"그래도 되는 건가요?"
"맛은 문제 없다니까요?"
"이런 폐기물을 먹을 정도로 한국 서민들의 삶은 피폐한 건가요?"
"……."
순수하게 문화 충격일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