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3
K−증시
나의 권위.
"이, 이게 뭐시다냐?"
"보면 몰라요?"
학과 내에서는 다소 떨어진 게 사실이다.
이전처럼 소란을 일으키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동아리.
여느 때처럼 주식 초고수의 위엄을 자랑하려고 했는데.
"요즘 왜 주식 시장이 왜 하락장인 거에요?"
"연준이 시장에서 돈을 흡수하고 있어서 그래요."
"금리 인상인가 그거요?"
"언니! 저도, 저도!"
동아리실의 분위기가 바뀌어있다.
아니, 내가 굳이 일일이 살펴보지 않아도.
'니가 왜 여깄냐.'
눈에 띈다.
금발의 서양 미녀가 앉아있다면 누구라도 눈이 갈 것이다.
심지어 그냥 있는 게 아니다.
동아리 부원들에게 이것저것 조언을 해주고 있다.
"금리 인상도 있고, 대차대조표 축소도 있어요."
"뭐가 다른 거에요?"
"Umm……, 금리 인상만으로 컨트롤하면 부작용이 커요. 그래서 다른 방식도 쓰고 있어요."
그것을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다.
레이첼에게 특강을 받는다는 느낌이다.
'나도 말해줬던 건데 시발.'
내가 말할 때는 듣는 시늉만 하던 것들이 아주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다.
"무슨 일인지 설명 좀 해줄래?"
"설명이고 자시고 보이는 그대론대요."
"뭐가."
"조교 언니가 동아리실에 종종 오셔서 도움을 주고 있어요!"
동아리장인 혜리에게도 공인.
어느샌가 적에게 완전히 감화된 모양이다.
'내가 소라 놀리는 사이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워낙 놀리는 보람이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하지만 동아리에서는.
"뭘 도와주는데?"
"요즘에 쭉 하락장이잖아요."
"그래서?"
"시장 흐름? 이라고 해야 하나. 관심 있는 부원들이 많아졌거든요."
당연하게도 주식 시장은 현재진행형이다.
최근의 시장 상황이 궁금하다.
대답을 해줄 사람을 원한다.
그 욕구를 레이첼이 채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왜?'
레이첼이라면 해내고도 남는다.
그녀의 실력에 대해서는 의심한 적이 없다.
문제는 Why?
하필 주식 동아리다.
그 이유에 대해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머지않아 확신이 된다.
우연히 눈이 마주치게 된 레이첼이 옅은 미소를 지어온다.
"조교 언니 예쁘죠?"
"얼굴은 반반하긴 하지."
"혹시, 혹시 언니한테 관심 있어요? 막 이래."
"글쎄."
"어머나!"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다.
아니, 남자가 본다면 십중팔구는 착각할 만하다.
'그래서 사람을 홀리는 마녀라고 불렸지.'
실상은 보이는 그대로다.
나에 대한 집착이 레이첼을 이곳까지 이끌었다.
"오랜만이네요."
"강의실에서 자주 보지 않았나?"
"사석에서 보는 것은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심하게 대꾸하자 휙 하고 얼굴을 돌린다.
세상에 이런 미친년이 따로 없다.
'노처녀 좀 따줬다고 선량한 사람의 인생을 박살을 내놓더니.'
이제는 입술 좀 먹었다고 스토커짓을 하고 다닌다.
성격이 배배 꼬였다.
"그래서 그 사석엔 무슨 일로?"
"제가 여기 있는데 당신의 허락을 받아야 하나요?"
"그건 아니겠지."
"흥!"
첫 키스를 하고 방치를 하니 애가 타서 찾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신경 안 쓰는 척하고 있다.
'계속 무시하면 또 별별 짓을 다 할 거고.'
이전 생에서 겪은 일.
이번 생에서는 확실하면서도 스마트한 방식으로 극복해야 한다.
"당신 때문에 오게 된 것은 맞지만요."
"아~ 저번에 키……."
"What, What, What?! Stop being silly!"
누가 보면 섹스라도 한 줄 알겠다.
얼굴이 새빨개져서 평소의 쿨한 이미지는 온데간데없다.
한바탕 소리를 지르자 주위의 이목이 집중된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헛기침을 뱉는다.
"둘이 무슨 일 있어요?"
"강의 때 싸워서 그래요?"
"맞아요! 저는 이 남자가 정말 싫습니다."
"꺄!
"꺄아~!"
"그건 관심 있다는 뜻 아니에요?"
"???"
필사적으로 부정을 한다.
만약 학과 강의실이었다면 먹히고도 남을 변명이겠지만.
'여긴 내 본진이라서.'
나에 대해 웬만큼은 알고 있는 애들 뿐이다.
서툰 한국 표현도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그러고 보니 처음 왔을 때도 찬욱 오빠 찾았지."
"!!"
"싸우면서 친해진 거 아니야?"
"한국말에서 강한 부정은 긍정의 동의어거든요~."
그 편이 재밌기도 하다.
순식간에 레이첼을 놀리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녀가 조금만 성격이 좋았다면.
그걸 알아채고 적당히 받아줬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요?"
"아주 조금도?"
"그렇습니다! 애초에 제가 여기 오게 된 것도……."
그럴 만한 유도리가 없다.
나에 대한 악담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아이구야.'
나와 대척하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다.
중간이라는 게 없는 성격이다.
"요 며칠 주식 동아리를 출입하며 알게 되었습니다."
"나란 남자를요?"
"네, 당신이란 남자에 대해 아주 철저하게……."
"어머!"
"꺄아~!"
물론 근거 없는 말을 할 성격도 아니다.
그녀가 하는 이야기는.
"시장 뷰에 관련된 이야기겠지.'
이전 생에서도 자주 부딪혔다.
그녀와 나의 시각은 엇갈릴 때가 잦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다.
서로의 뷰를 비판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주식 동아리라고 들었는데, 정작 주식에 대해 체계적인 공부를 하고 있진 않더군요."
"충분히 체계적인데?"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영향이란 것도 파악했습니다."
"당신이래."
"어쩜, 어쩜."
이번 생에서도 성격 차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강의실 논쟁은 전초전에 불과했다.
'그래줘야지.'
이미 불을 붙인 마당.
이렇게 되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유리한 전장을 확보하는 것이 옳다.
타악!
레이첼이 동아리 비품인 화이트 보드를 가리킨다.
그리고 숙련된 솜씨로 무언가 그리기 시작한다.
"현재 주식 시장이 고점에 대한 공포로 꺾이게 된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하지만 그것이 하락장이 시작되었다고 겁을 먹을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차트였다.
최근 한 달 가량의 나스닥 흐름을 꽤 그럴 듯하게 그려두었다.
---------------------------------------------+
『나스닥 종합지수』
7069.74 ▼258.41 (−3.65%)
[대충 한 달간 떨어지고 있는 그래프.jpg]
+---------------------------------------------
하락장다운 그래프다.
반등을 하던 것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상승분을 반납한다.
"하락장이 맞는 거 같은데?"
"그런 사고방식이 틀렸다는 겁니다. 주식 투자자라면 비관적인 사고가 몸에 배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론이다.
투자자라면 이성적으로 시장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
나스닥에서는 말이다.
나도 만약 나스닥을 기준으로 가르쳤다면 그렇게 했다.
"연준이 시장에서 돈을 흡수해서 하락장인 거 아니었어요?"
"맞아요."
"금리 인상도 있고, 대차대조표 축소도 있다고……."
"그것을 세부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투자자의 일이에요."
이 자존심 센 아가씨의 목적.
정말로 내가 꼴도 보기 싫어서는 아닐 것이다.
그 반대에 가깝다.
인정을 하는 상대이기 때문에 상하 관계를 확실히 하고 싶다.
'꼭 남의 위에 올라서야만 직성이 풀리는 여왕님이거든.'
벌써부터 자신의 편을 만들어가고 있다.
아니, 지난 며칠간 공을 들였을 것이다.
"최근 발표되는 지표와 연준의 기조는 확인하고 있나요?"
"충분히?"
"그런 데도 부원들에게 하락장이라는 선입견을 인식시키고 있는 거에요?"
"근데?"
나와 레이첼의 논쟁.
눈치를 보던 동아리 부원들이 하나둘 그녀에게 붙기 시작한다.
'말을 참 잘해.'
비꼬는 게 아니라 솔직한 인정이다.
공부는 커녕 자퇴를 한 나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레이첼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
미국에서도 흔치 않은 고급 인재다.
실전 경험도 이미 쌓아왔을지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지."
"또 궤변인가요?"
"한 달 후에 어떻게 될지 보자고."
"바라는 바입니다."
"단, 코스피에서."
"?!"
주식 시장에서 경력은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
베테랑도, 풋내기도 같은 위치에서 싸운다.
'내가 경력이 많다고 특별히 유리하지 않아.'
오히려 오랜 경력이 맹점을 만들 때도 있다.
그럼에도 승부를 한다면 내가 이길 거라고 확신한다.
"좋습니다! 이번 기회에 한국 시장에 대한 공부도 겸하는 걸로 하죠."
"저 선배 그래도 단타 잘하는데."
"맞아요. 미친 도박꾼이에요!"
"……."
단타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말이다.
옛 숙적과의 싸움에 치사한 짓을 하고 싶지 않다.
'그래야만 인정을 할 녀석이고.'
한두 번 부딪힌 게 아니니 잘 알고 있다.
이 고고한 여왕님의 콧대를 꺾는 방법은.
짜악!
박수 소리.
혜리가 중재를 위해 나온다.
동아리장으로서 싸움을 두고 볼 수 없다.
"그럼 딱 코스피 지수로만 승부 하는 거에요? 결과가 나오면 서로 깔끔하게 인정하고."
"좋아."
"괜찮습니다."
"또 싸우면 동아리장 권한으로 두 사람 다 출입 금지시킬 거에요."
""…….""
의외로 똑부러진다.
내가 없는 사이에 주식 동아리를 잘 이끌었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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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달 후 코스피 지수가 기준이 된다.
2. 내려갔으면 찬욱 오빠 승리, 올라갔으면 조교 언니 승리.
3. 진 쪽이 이긴 쪽에 승복하고, 시키는 대로 따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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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보드에 룰을 적는다.
내가 따로 시키지도 않았는데.
'3번이 참 마음에 드네.'
이미 내 여자라서 그런지 나의 마음을 아주 쏙 꿰뚫고 있다.
"나는 조교 언니편!"
"그래도 코스피는 선배가……."
"조교 누나 설명이 더 납득이 가던데?"
부원들끼리도 서로 내기를 한다.
주식 동아리 차원에서도 건설적인 방향이다.
"오빠는 오빠가 이길 거라 생각하는 거죠?"
"당연하지."
"어느 쪽이 이기든 둘이 더 안 싸웠으면 좋겠어요."
"날 응원하는 거 아니었어?"
"말다툼 하는 두 분이 즐거워 보였거든요."
"내가? 착각이겠지."
혜리가 알 수 없는 말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