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7
운명의 재회
레이첼을 꼬신 방법.
사실 반쯤 우연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싫다는 티를 팍팍 내서.'
사람을 배척하는 아우라를 흘린다.
세상의 절반이 여자인데 굳이?
그렇기에 시도해본 것이다.
되면 좋은 거고, 안돼도 좋은 거고.
쪼옥!
벽에 몰아세운 자세.
그대로 덮치듯이 레이첼의 입술을 먹어버린다.
두툼하면서도 부드러운 아주 훌륭한 식감이다.
먹을 맛이 절로 난다.
'좀 두꺼워야 먹을 맛이 나지.'
작은 입술은 어디 찢어질까 조심스럽다.
그런 걱정할 필요도 없이.
쭈왑!
아랫입술을 살살 빨아 침을 묻힌다.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혀를 침투한다.
굉장히 당황한 듯한 낯빛.
하지만 어찌할 바 모르겠다는 듯 눈을 꾹 감는다.
'아다 맞다니까.'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어주자 자세가 안정된다.
레이첼의 턱을 잡은 채 키스를 이어나간다.
5분 남짓.
바깥에서 본다면 상당히 긴 시간이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또 그렇지가 않다.
"하아……, 하아……."
숨이 벅찰 때가 돼서야 입술이 떼어진다.
페이스를 조절하지 못한 레이첼은 더더욱 그런 모양이다.
짜악!
동시에 정신도 돌아온다.
반사적으로 나갔는지 모를 싸대기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돼있을 것이다.
"Look what you've done!"
또 흥분해서 모국어가 튀어나온다.
어깨를 들썩이며 진심으로 경멸스럽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런 것 치고 꽤 반응이 늦네.'
재미 볼 만큼 다 봐놓고.
키스할 때는 얌전히 받아들이더니 이제 와서 딴소리를 늘어놓는다.
"하, 할 말이 있어서 부른 거 아니었나요? 이런 짓을 하려고 부른 거였어요?"
"할 말이 있었는데."
"그게 뭔데요."
"까먹었어요."
"?!"
정말로 정신이 없던 걸 수도 있다.
적어도 당시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1회차 때는.'
그냥 했다.
이 고고하고 까탈스러운 여왕님의 입술은 어떤 맛일지 궁금했으니까.
후폭풍을 생각 안 한 건 아니다.
진심으로 정색할 가능성도 당연히 있다.
"당신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당신 앞에 서니까 아무 생각도 안 나더라고요. 키스하는 것밖에."
그렇게 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그래서 되도않는 변명을 쌌던 걸로 기억한다.
'의외로 먹히더라고.'
처녀의 머릿속은 정상인의 범주에서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이래서 길든 짧든 박아봐야 안다고 하는 걸지 모른다.
"그런다고 제가 봐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지금이 당장이라도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어요."
"네, 죄송합니다."
"사과로 끝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길로 바로 경찰서에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네, 네??"
생각지도 못한 빠른 사과와 자수 의사.
화를 내던 레이첼이 당황스러워한다.
"그,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우물쭈물하며 말꼬리를 흐린다.
어째서 저러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첫 키스를 한 사람이 범법자가 되면 그것만큼 미묘한 일이 없으니까.'
본인도 미안해 하는 것 같다.
화를 내면 자신이 이상해지는 기분이다.
"이런 짓을 평소에도 하시나요?"
"당연히 없죠. 맹세컨대 당신이 처음입니다."
"그, 그런……."
"당신이 너무 매력적이라서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습니다."
한 번 더 결정타를 박아 넣는다.
무미건조한 도자기 같던 그녀의 얼굴이 조금은 사람다워진다.
'아다 맞네.'
남자가 생긴 줄 알았더니 이번 생에서도 밋밋하기 그지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모양이다.
볼에 옅은 홍조가 뜬다.
헛기침을 두어번 내뱉더니 말을 이어온다.
"처음이신 것 같으니 봐드릴게요."
"괜찮겠습니까?"
"이런 일로 일일이 경찰서까지 드나들면 제 꿈자리가 사나워지니까요."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은 주제에 여유를 부린다.
내가 알고 있는 성격과 1도 안 변했다.
'사실 두 번째인데.'
이전 생에도 신세를 졌으니 말이다.
물론 그때는 잘 먹었습니다, 하고 토까는 흐름이었다.
경찰서 운운은 시간을 벌기 위함.
그것이 이렇게나 잘 먹힐지는 해보지 않았으면 몰랐다.
쪼옥!
허점 투성이다.
다시 한 번 레이첼의 턱을 잡고 다정하게 입맞춤을 나눈다.
"What, what are you doing now?!"
"괜찮다고 하시길래."
"괜찮다는 게. 그런,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를 내며 확실하게 볼이 홍조로 물든다.
이런 성격이었다.
'그때부터 먹을 만하겠구나 하고 비벼본 건데.'
이후로 여러가지 사건이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악연이 싹트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달라질 수 있다.
하나하나 천천히 공략해 나간다.
"Anyway, 더 하면 안됩니다. 진짜로 고소할 거에요."
"다음에는 꼭 허락 받고 할게요."
"누, 누가 허락을 해준다고!"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는 않는다.
생긴 것과 달리 첫 경험에 엄청난 망상을 품고 있다.
'처음은 실수일 수 있지만 두 번째는 변명의 여지가 없거든.'
절대 지워지지 않는 첫인상을 박아둔다.
* * *
첫 키스 이후.
"미국의 금리 인상 기조는 경제 사이클을 둔화시켜 물가 안정에 도움을 줍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겠지."
"무슨 할 말이 있나요?"
"실제로는 물이 가득 찬 컵이 흘러 넘칠 때까지 똑, 똑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행위에 지나지 않지."
별다를 바 없이 지내고 있다.
강의에서 마주쳤을 때 시비를 거는 정도.
"또 저러네 저 선배."
"조교님도 힘들겠다."
"지기 싫어서 그래 지기 싫어서!"
학생들의 반응은 이전과 다르다.
특히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레이첼의 팬클럽 같은 게 생겼다.
'여풍당당 하잖아.'
확실히 인기가 많을 캐릭터다.
교수들 이상으로 능력이 빼어난데 외모까지 쿨뷰티 그 자체다.
"금리 인상은 컵에서 물을 빼는 행위입니다."
"정치인들은 물을 넣지 못해 안달인데?"
"기대 인플레이션을 잡을 수 있습니다."
"저열한 눈속임이지."
하지만 본인의 반응은 조금 다르다.
겉으로는 치고 박고 싸우는 것처럼 보여도.
'애가 좀 꽉 막혀있어서.'
타인과 교류할 줄 모른다.
유일하게 감정을 표출할 때는 격한 논쟁을 할 때 뿐이다.
"그쪽의 의견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금일 강의 방향과 어긋나게 된 것 같으니 정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면 강의가 끝나고 찾아오시길 바랍니다. 더 하실 말씀이라도?"
"없네요."
사실은 애정에 목 말라있다.
누군가 자신에게 진심 어린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의외로 귀여운 성격이지.'
방금도 찾아와 달라는 말을 돌려 표현한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학생들에겐.
"또 까였네."
"본인이 물로켓 아니야?"
"물로켓 찌익!"
"……."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최근 장이 워낙 하락장이니까.'
주식 초보자.
어설프게 입문해봤자 데이기만 할 확률이 높다.
대대적인 모집을 하는 것보다는 골라 받으면서 기존 인원을 키우는 게 나을 것이다.
"선배도 참 별 지랄을 다 하네요."
"넌 좋겠다."
"제가요?"
"어차피 물려서 아무것도 안 해도 되잖아."
"야."
소라만 해도 여전히 물려있다.
매수 버튼 한 번 잘못 누르면 손가락 자르고 싶은 게 하락장이다.
"그래서 조교 언니랑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보면 몰라?'
"물이 넘친다느니 뺀다느니 비유적으로 말하는데 어떻게 알아요."
그만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간이기도 하다.
평소에는 신경도 안 쓰던 것들에 관심이 생긴다.
'물 빼주는 거엔 관심이 많네.'
연준의 대차대조표.
금리 등을 만져서 시장에 돈을 풀거나, 반대로 돈을 거둬들이는 역할을 한다.
"지금은 금리 인상기니까 거둬들이는 거 아니에요?"
"지들이 말한 대로 지킨다면 말이지."
"?"
경제가 불황일 때 돈을 푼다.
경제가 호황일 때 돈을 거둬들이다.
이론적으로는 정말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것이 제대로 지켜지지가 않거든.'
돈을 거둬들이면 시장에서는 당연히 안 좋아한다.
유권자들의 심리에도 영향을 미친다.
내 표가 줄어드네?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 돈을 퍼줄 다른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그래서 금리를 인위적으로 조절하게 된 이후 단 한 번도 의미 있는 수준의 축소가 된 적이 없지. 미국, 일본의 부채가 천문학적이다. 그런 이야기 들어본 적 있을 거야."
"부작용은 없는 거에요?"
"글쎄."
물론 정책 입안자들도 무작정 벌이는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경제 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MMT라는 썩은 동아줄을.'
현대화폐이론(MMT).
기축통화국은 돈을 찍어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미국, EU, 일본 등 세계 강대국들이 쓰고 있다.
한때는 경제학의 뉴노멀이라는 소리도 들었지만.
"실패하면 엄청난 인플레가 일어나겠지."
"아, 그래서……."
"응?"
"물이 넘친다고 표현한 거군요?"
코로나를 기점으로 그 정체가 탄로나게 된다.
아주 위험한 장난이었다.
'독도 치사량 이전까지는 의외로 멀쩡한 경우가 많지.'
양을 조절하면 약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은 꼭 일을 저지른다.
지금도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다.
미래를 아는 입장에서는 씁쓸하다.
"너랑은 상관없겠지만."
"그야 뭐……."
"처물려있으니까."
"우씨 진짜!"
위기는 곧 기회가 될 수 있다.
투자자는 그 순간을 기다리며 자기 자신을 갈고 닦는 것이다.
타악!
소라는 몸매만 갈고 닦고 있다.
패딩을 입은 허리에 손바닥을 갖다 대자 쏙 하고 들어간다.
"저도 가만히만 있는 건 아니거든요."
"그럼?"
"선배가 정기적인 수입이 있는 편이 좋다고 해서……."
드디어 재능을 뽐내려고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일전에 말을 했었다.
'코인 내기를 했을 때.'
유민이 이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 말이다.
정기적인 수익이 있으면 마인드가 편해진다.
"그래서 저도 유튜브를 하려고요!"
"여캠이 아니라?"
"에이, 그런 건 안 하죠."
"하아……."
대놓고 답안지를 알려줘도 받아적지를 않는다.
그냥 엉덩이만 흔들어도.
'니가 주식 하는 것보단 많이 벌 수 있다고!'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진로 상담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