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6
운명의 재회
새 학기.
더없이 유쾌할 수밖에 없는 출발이었다.
"요즘 물로켓 안 쏴?"
"쏘면 뭐해 쏠 때마다 다 막히는데."
그 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쑥덕거리는 학생들 목소리가 들린다.
'씨발.'
내가 교수들한테 시비를 걸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서 무료 변호를 해준다.
덕분에 교수들은 살 판이 났다.
강의실 내 분위기가 바뀔 수밖에 없다.
"안 하네."
"쫄았나 봐."
"조교님한테 질까 봐 그렇지~."
분위기라는 건 휙휙 바뀌기 마련이다.
그 년한테 붙어 먹으려는 애들이 늘었다.
'아니, 시발 그 짓도 목숨 걸고 하는 건데!'
리스크.
당연히 높다.
학생이 교수에게 대들어서 좋은 일이 있을 리가.
그것을 감수하고 하는 일이다.
이렇게 방해가 들어오면 아무리 나라도 하기가 애매하다.
끼익−!
학생들을 포섭하는 판을 다시 짜야 할지 모른다.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릿속을 더 복잡하게 만들려는지.
"오늘은 제가 교수님 대신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부족하더라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 년이 나타난다.
미시경제학 조교답게 미시스러운 엉덩이를 흔들면서 말이다.
'원래 미시 같은 년을 뽑는 건가?'
물론 조교의 일이기도 하다.
때로는 교수를 대신해 강의를 진행한다.
보통은 짬이 찬 조교에 한한다.
학생들도 썩 좋아하지 않지만.
"저희가 잘 부탁하죠~!"
"조교 언니 사랑해요!"
"눈나 나 죽어!"
레이첼에 한해서는 달랐다.
나와의 싸움이 좋은 인상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외모도 그렇고.'
영향이 당연히 있다.
같은 말을 해도 외모가 빼어난 사람이 하면 신뢰가 간다.
외모는 상관없는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 치고 정말로 상관없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럼 바로 강의를 진행하는 걸로……."
"쌤!"
"절 말씀하시는 건가요?"
"저희가 쌤에 대해 모르는데 강의를 진행하는 건 이른 것 같아요."
"맞아, 맞아!"
"옳소!"
무엇보다 궁금하기도 하다.
외국인.
금발벽안의 미인에게 관심이 안 간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이태원 골목이 아니다.
한국대다.
유학생이 드문 건 아니지만 그래도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제가 어떤 걸 해야 하는 거죠? 아직 한국 문화에 익숙지 않아서……."
"바로 그 점이요!"
"저희가 가르쳐드릴게요!"
"어떻게 그렇게 한국어를 잘해요??"
한국어가 유창하다.
지식도 비범해 보인다.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내가 잠자리에서 가르쳐준 건 있는데.'
따먹어주세요, 박아주세요를 중심으로 한 스피킹 강좌였다.
그 부단한 노력이 싹을 피운 결과물은 아니어 보인다.
"제가 한국어를 잘하나요?"
"네!"
"진짜 한국인 같아요!"
"여자 타일러."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온 것인데,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으니 틀리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꺄아~!""
독학.
레이첼이라면 하고도 남는다.
언어뇌가 꽤 뛰어난 편이고, 한국어는 스피킹만 따지면 어렵진 않다.
'혹시 한국 남자가 생겼나?'
그리고 언어를 가장 쉽게 배우는 방법은 연애다.
만약 그것 때문이라면 지금까지의 상황이 전부 이해가 된다.
"미국에서는 무슨 일하셨어요?"
"여러분과 같은 학생이었습니다."
"어디 대학 다녔어요?"
"어디 대학, 어디 대학!"
"하버드 경제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와!""
"하버드?!"
가만히 놔두는 게 더 이상한 몸매다.
음탕한 엉덩이를 흔들어 대는데 남자가 꼬이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느닷없이 한국에 온 게 이상하긴 해.'
과거라고 내가 아는 것과 100% 똑같이 진행되리란 법은 없다.
투자의 세계에 몸담고 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만약 내가 매집을 한다면?
그 순간부터 세력이 눈치를 챈 세계선과, 눈치를 못 챈 세계선으로 나뉘게 된다.
레이첼의 선택 또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한국 남자와 사귀게 된 세계선으로.
"쌤 남친 있어요?"
"?!"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그것과 별개로 궁금한 것도 사실.
한 눈치 없는 학생이 다이렉트로 물어본다.
'단골 질문이긴 하지.'
얼타는 교생이 반드시 거쳐가는 통과의례이기도 하다.
레이첼이 과연 어떤 반응을 할지.
"수업과 관계 있나요?"
"쌤에 대해 알기 위해……."
"그렇다면 제 개인적인 질문에 국한해주시기 바랍니다."
"국한도 알아?"
"와, 그냥 한국인이네."
"한국어 패치가 한컴오피스로 되었네."
무덤덤했다.
여기까진 안 넘어오는구나.
일반 학생들이라면 능청스럽게 넘어가겠지만.
'음?'
내 눈에는 보인다.
레이첼을 씹고 뜯고 맛보고 따먹어봤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다.
미간이 움츠러들었다.
싫은 소리를 들었거나 당황을 했을 때 저런 반응을 하곤 한다.
"뭐죠?"
"응?"
"혹시 제 강의에도 지적할 사항이 있나요?"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나의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갑자기 말을 걸어온다.
'나 츤데레입니다. 하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무시를 할 거면 무시를 할 것이지 귀찮게 군다.
성격이 까다롭기 그지없는 년이다.
"아직 들은 것도 없는데?"
"없다면 이대로 수업 시작하겠습니다. 할 말이 있다면 언제든지 손 들어주세요."
자존심이 매우 세다.
남에게 지는 걸 싫어한다.
그 고고한 성격 때문에 남자들이 접근하지 못한다.
'기가 죽거든.'
너무 잘난 여자는 의외로 인기가 없다.
본인으로서도 연애를 할 만큼 한가한 인생을 살지 않았다.
이번 생에서도 그러한지.
100%는 아니어도 그럴 만한 확신이 점점 쌓여만 간다.
"조교 누나 너무 예쁘다……."
"몸매 시발 미쳤어."
"몰카 아니야? 어떻게 저렇게 예쁜 조교 누나가 왔지."
"오늘은 서양물로 대리 만족해야겠다."
남학생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보고 있다.
그럴 때마다 미간이 티 안 나게 조금 꿈틀거린다.
'아직 아다 맞는 거 같은데.'
그렇다면 써먹을 수 있다
* * *
"예. 예, 예. 알겠습니다. 그럼 처리가 된 것으로……, 네?"
레이첼은 한국에서 대학원 생활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순수한 학업 목적이 아니다.
매달 한 번씩 보고서를 보낸다.
애시당초 동북아시아까지 온 이유는 이곳 동태를 파악하기 위함이니까.
<빌 카타리나 의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더군.>
"그렇게 되었군요."
<아마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게 될 것이야. 증거가 모여지는 6개월 후쯤에.>
보고서의 내용이 좋을수록 레이첼 자신에 대한 평가도 올라간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도움이 되는 면도 있나 보네요.'
찬욱과의 언쟁은 의미가 있었다.
그가 지적한 부분들은 한 번쯤 심사숙고해볼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빌 카타리나 또한.
정치인의 목줄을 쥐는 것은 정재계를 컨트롤하는 가문의 입장에서 큰 소득이다.
<어째서 그 작은 나라를 택했는지 의문이 있었지만……, 자네라면 잘 해낼 거라 믿겠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전화는 빠르게 끊긴다.
통화는 도청 가능성을 고려해 1분 이하로 짤막하게 한다.
두근! 두근!
그럼에도 레이첼의 심장은 두근 댄다.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는 포커페이스지만.
'저는 잘하고 있는 거겠죠 할아버지.'
일반적인 길이 아니다.
비교할 사람은 커녕 의지할 지인조차 전무하다.
할 수 있는 것은 하나하나 쌓아 올리는 것 뿐.
그렇기에 인정을 받는 것은 기쁘다.
자신이 제대로 나아가고 있다.
그 사실을 인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안녕하세요!"
"조교 언니 어디 가요?"
"안녕. 교수님이 전해 달라는 게 있어서."
한국에서의 생활도 적응되고 있다.
학생들이 먼저 살가운 인사를 건네온다.
'나도 해야 할 텐데 아직 힘드네.'
미국에서도 인간 관계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머나먼 한국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언제 또 강의해줘요?"
"그때는 교수님이 세미나가 있으셔서……."
"또 해줘요!"
"솔직히 교수님보다 더 잘 가르치는 것 같아요."
다행히 현지 사람들이 친절하다.
한국어를 미리 배워온 것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그 사람 덕분이려나.'
한국어를 배운 것.
한국으로 유학을 오게 된 것.
찬욱의 영향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인격이 그렇게 개차반인 줄은 몰랐지만, 능력 자체는 기대 이상이었다.
개인이면서 자금도 빠른 속도로 불리고 있다.
'저도 너무 색안경을 끼고 본 걸지도 몰라요.'
가끔씩 그런 사람이 있다.
성격적으로 많이 모가 나도 능력으로 하나로 인정 받는 부류.
월가나 실리콘밸리에서는 의외로 흔하다.
트럼프와 나일론 머스크가 대표적인 사례다.
말이 안 통하는 부류도 아니다.
조금 더 대화를 하다 보면 접점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만한 가치가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요.'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
인재라면 스카웃하기 위함이다.
그 나라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 해당 나라에 대한 가장 쉬운 공략법이다.
어쩌면 그 이상도 가능할지 모른다.
코인 사태 때 보여줬던 기량이라면 월가에서도 먹힐 수도 있을 텐데.
'쓸데없이 고평가 할 필요도 없겠죠.'
악감정이 아주 꺼진 것은 아니다.
적어도 사과 정도는 받아야, 자신에게 굴복해야 이야기를 진행해줄 것이다.
"오."
"?!"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시는지."
갑작스레 장본인을 마주치게 되었다.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평소처럼 포커페이스를 유지한다.
'여전히 무례한 사람이네요.'
인기척도 없이 나타나더니 껄렁한 소리를 내뱉고 있다.
그나마 오른 평가까지 내리려던 찰나.
"시간 있으시면 저랑 잠깐 이야기 좀 하죠."
"제가 한가하지 않아서요."
"할 말이 있다면 언제든지라고 했지 않나요?"
"읏."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걸어온다.
그것도 강의에서와 달리 정중한 태도다.
'무슨……, 일이지?'
궁금함이 생긴다.
자신이 그에 대해 생각을 했듯, 그도 생각이 있었던 걸지 모른다.
고민 끝에 레이첼은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다.
잠깐 정도는 시간을 못 내줄 것도 없으니까.
"무슨 이야기인진 몰라도 빠르게……."
"잠깐 저쪽 좀 봐주실래요?"
아무도 없는 빈 강의실.
찬욱이 시키는 대로 칠판 방향을 쳐다봐준다.
아무것도 쓰여져 있지 않다.
근처의 사물 배치도 이전에 봤던 그대로다.
자신을 놀리기라도 하려는 건지.
어이가 없어 다시 고개를 돌아본 레이첼은.
"??!!!"
첫 키스를 경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