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6화 (156/450)

"……."

일등석에 대해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러다 보니 사소한 오해가 생긴다.

'나이 먹고 아가씨라 부르면 성추행 소지가 있어서.'

세상이 팍팍해진다.

어느 순간부터 말없이 부르게 되었다.

그것이 조금 재수 없게 보인 모양이다.

그런 사소한 오해.

식사를 하다 보면 풀릴 것이다.

잠시 기다리자 식전주가 나온다.

꼴꼴꼴~!

기포가 아름다운 샴페인이다.

부탁한 대로 칠링도 되어있어 마시기에 적절한 온도다.

『바롱드 로칠드 블랑 드 블랑 N.V.』

"논빈이라 걱정했는데 마셔도 될 만한 시기인 것 같네."

"논빈이 뭐에요?

"니 골빈이라고."

"씨발놈아."

논 빈티지.

샴페인은 QC(Quality Control)를 위해 여러 빈티지를 혼합하다 보니 몇 년산인지 안 써있는 경우가 많다.

'이건 병입된지 꽤 된 거라고.'

샤르도네 품종이라 마시기도 편하다.

바디감이 가벼운 게 흠이지만, 식전주 용도로는 나쁘지 않다.

아삭!

같이 나온 샐러드와 함께 씹는다.

샐러드도 샴페인도 텅 비어있어서 먹을수록 더 배가 고파진다.

"간단한 쿠키류와 캐비어입니다. 캐비어는 발라서 드시면 됩니다."

식욕을 돋우는 전채 요리의 역할을 해낸다.

다음으로 나오는 것은 빈 속을 달래줄 빵과 버터다.

'버터 대신에 캐비어나 테린이 나오기도 하고.'

결국 용도는 같다.

하지만 어떤 것이 나오느냐에 따라 마리아주도 달리 선택해야 한다.

"와인을 드릴까요?"

"와인 말고 조니워커 블루를 미즈와리로 주세요. 얘도."

"나도?"

캐비어는 와인이랑 마시기에 적절한 음식이 아니다.

보통은 보드카와 궁합을 맞춘다.

'앱솔루트는 급이 좀 떨어지지.'

오세트라 캐비어.

견과류 맛이 도드라진다.

조니워커 블루도 결이 비슷하다.

물로 희석하고 얼음으로 차게 해서 먹으면 대충 맞을 것이다.

예상대로 그럭저럭 먹을 만하다.

"저 캐비어 처음 먹어봐요."

"니가 처음이 아닌 게 어딨겠니."

"생각보다 엄청 크리미하네요. 조금 짜지만."

버터 대신 먹는 이유가 있다.

기름진 맛을 방해하지 않는 미즈와리로 혀를 깔끔하게 씻어낸다.

딸칵!

다음으로는 스프.

그에 대칭되는 게살된장죽이다.

슬슬 따듯한 음식을 먹을 시기가 다가온다.

'건더기가 풍부하니 레드 와인을 곁들여도 괜찮겠지.'

맛이 진한 스튜에는 레드 와인이 잘 어울린다.

게살된장국도 그런 느낌이라 주문했는데.

"이거 너무 떫어요."

"그러네."

"저는 와인 맛은 잘 모르겠어요."

소라가 얼굴을 찌푸릴 만하다.

와인이 열리는 시기가 아직 되지 않은 녀석이다.

『루이라뚜르 꼬똥 그랑크뤼 끌로 드 라 빈 오 생 2014』

'원래 그래.'

일등석에서 서비스되는 와인들은 맛보다는 브랜드를 중요시하는 측면이 있다.

어른의 사정 때문이다.

"네넹으로 새로 따라주세요."

"완전 진상이네요."

"돈 냈잖아."

"네넹."

원가 절감을 위해 하나의 빈티지를 대량으로 떼온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 좋은 빈티지가 아니다.

'하지만 가끔씩.'

괜찮은 것도 섞여온다.

이 샤또 네넹 포므롤의 2008년 빈티지처럼 말이다.

* * *

스튜어디스.

하게 되는 이유는 대부분 비슷하다.

'하아…….'

선택 받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나이 먹고 내뱉기에는 부끄러운 소리다.

"너 여기 어떻게 배속 받았어? 샴페인 따를 줄도 몰라?"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승무원 생활 끝나?"

적어도 학생 시절에는 그러했다.

항공서비스학과에 다닌다고 하면 남자들이 줄을 섰다.

명문대생과의 소개팅이 줄줄이 잡힌다.

서울대, 고려대, 한국대 입맛대로 골랐다.

"비행기가 갑자기 흔들리는 바람에……."

"지금 변명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죄송을 왜 나한테 해?"

그때가 인생의 전성기.

스튜디어스로 취업하고 나서는 매일매일이 지옥이다.

'퍼스트 클래스에서 일하면 좀 다를 줄 알았는데.'

혜연은 어떻게든 버텼다.

모범 사원만이 올 수 있는 퍼스트 클래스에 배속되었다.

신입 때는 하늘의 별처럼 보였다.

당사자가 되자 별 다를 게 없다는 걸 깨닫는다.

"너 나 엿 먹이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지?"

"그럴 리가요 언니."

"그럼 하필 회장님 샴페인을 쏟는 게 말이 돼? 막말로 옷에 묻은 거 배상하라고 했으면 니 월급 다 털어도 부족한 거 말해줘야 알아?"

간호사는 태움.

승무원은 시나어리티를 당한다.

여초 직장에서 흔히 있는 직장 내 괴롭힘이다.

그것이 차라리 나았다.

사무장 언니가 불같이 화를 내는 이유가 있다.

꿀꺽!

일등석에는 진상이 없다.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이코노미에 비하면 말이다.

그래서 더 무섭다.

차라리 말을 해주면, 뭐가 문제인지 지적해주면 편할 것이다.

"니가 알아서 해. 난 모르는 일이니까."

"네, 제가 하겠습니다."

"너 때문에 나 사무장 밀리기라도 하면 비행기 생활 평생 편하게 해줄 테니 기대하고."

"……."

클레임?

그런 것이 아니다.

그냥 항공사를 바꾼다.

일등석 고객들은 대부분 하나의 항공사를 쭉 이용한다.

그 편이 마일리지도 쌓이고 이점이 많다.

'바꿨다는 건 무언가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니까.'

VVIP들은 그들만의 세계가 있다.

불만을 가진 한 명 뿐만 아니라 몇 명이 단체로 이탈해버린다.

그렇게 되면 난리가 난다.

보직이 대거 개편되는 등 승무원들 사이에서는 피바람이 분다고 표현한다.

자신이 그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심각한 생각을 가지고 서비스에 임하고 있었는데.

"논빈이라 걱정했는데 마셔도 될 만한 시기인 것 같네."

"논빈이 뭐에요?

"니 골빈이라고."

"씨발놈아."

젊은 커플.

딱 봐도 부모 덕에 잘 사는 금수저와 그 금수저한테 기생하는 반반한 여자다.

'여자 실리콘 오지게 넣었나 보네.'

뽕으로는 불가능한 크기다.

의느님한테 남자 꼬시고 싶다며 닦달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객.

서비스는 해야 한다.

웃는 얼굴로 와인을 따라주려던 찰나에.

"와인 말고 조니워커 블루를 미즈와리로 주세요."

술을 고르는 남자의 표정이 제법 진중하다.

상상치도 못했던 선택을 한다.

그때부터 신경이 쓰였다.

술을 교육 받은 혜연이기에 헛소리가 아니라는 걸 안다.

"이건 입맛에 맞아요!"

"네넹이 영바인이라서 훨씬 힘이 있지. 2008년이면 포므롤 지역이 그레이트 빈티지에 필적했던 해이고."

"선배 완전 씹덕 같네요."

영바인 (young vine)은 젊은 포도나무라는 뜻이다.

그레이트 빈티지는 특별히 포도가 잘 자란 해.

지식적으로는 배웠다.

VVIP 고객들을 상대하는 만큼 회사 차원에서 교육을 시킨다.

'이게 좋은 와인이었구나.'

하지만 도저히 이해는 안된다.

학창 시절 수학처럼 공부할수록 더 모르겠다.

그런 세계다.

자신 같은 일반인과 부자 사이의 벽을 깨닫게 된다.

"양식도 있는데."

"전 한식이 좋아요."

"가슴은 뒤지게 커가지고."

"그 소리가 왜 나와!"

남자는 한식을 시켰다.

와인은 아까의 샤토 네넹을 시킬 거라 생각했다.

'화이트 와인?'

주요리는 보통 레드 와인과 먹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따져봐도 그럴 것이다.

『피에르 스파르 맘부르그 게뷔르츠트라미너 2013』

화이트 와인은 주요리 전에 마신다.

한국항공 담당 소믈리에도 그렇게 지시했다.

"향은 좋은데 별 맛은 없네요?"

"청주처럼 향은 달큰하고, 맛은 드라이하지. 그래서 한식과 잘 어울려."

하지만 들어보니 납득이 간다.

한식은 와인과 궁합을 맞추기 굉장히 껄끄럽다.

남자는 몇 안되는 선택지 중에서 자연스럽게 찾아냈다.

아까 남겨버린 와인조차도.

"마실 때가 됐네."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와인을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는 혜연은 단박에 이해한다.

"주문하신 한식 나왔습니다. 비빔밤과 미역국, 반찬과 소갈비입니다."

"고마워요."

바로 다음 고객에게 서비스를 해야 한다.

사무장님이 으름장을 놓았던 그.

"그리고 와인도 드릴까요?"

"네, 이번에는 흘리지 않고 부탁드릴게요."

"무, 물론입니다 고객님."

"어디 보자……. 와인이 조금 많네요."

표정은 인자한다.

방금도 전혀 화내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농담이다.

꿀꺽!

하지만 회장님.

그것도 한국항공과 긴밀히 관련이 된 기업이라 실례를 범하면 안된다.

"괜찮으시면 추천을 해드릴까요?"

"그래주시면 고맙죠."

"이쪽의 게뷔르츠트라미너는 어떠십니까?"

"화이트 와인이군요?"

급박한 상황.

정규 대응이라면 레드 와인, 혹은 있는 와인을 전부 다 따르는 것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무책임하다.

조금이라도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혜연은 스스로도 놀랄 선택을 한다.

꼴꼴꼴~

남자가 좋다고 했던 화이트 와인.

이번에는 흘리지 않고 따랐다.

과연 입맛에 맞으실지.

"오, 마치 청주 같네요. 음식이랑 잘 어울리겠어요."

"감사합니다. 즐거운 식사 되십시오."

"레드 와인도 하나 추천해줄래요?"

"네!"

다행히 성공이었다.

이어서 따른 레드 와인도 훌륭하다며 미소를 짓는다.

'열리는데 시간이 걸리는 와인이었구나.'

정규 대응대로 새 와인을 따랐다면.

접객을 실패했을 거라는 생각에 오싹하다.

큰 도움을 받았다.

누군가에게는 별 게 아닐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구원이나 다름없다.

"와인 필요하시나요 고객님? 주요리도 추가 서비스 가능합니다."

자신의 권한 내에서는 서비스해주고 싶다.

간접적으로 보답을 하려고 했는데.

"알딸딸한 게 기분 좋네요. 헤헤."

"한 병에 20만 원짜리야. 뽕 뽑고 가야지. 더 줘봐요 병째로~."

"……."

그냥 알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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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뮌헨 국제공항.

"진짜 부끄러웠어요."

"뭐가?"

"식사 때마다 와인을 물처럼 퍼마시고!"

도착하자마자 소라가 입을 대빨 내민다.

기내에서의 식사가 마음에 안 든 모양이다.

'이상하네.'

분명 맛있었다.

레토르트 식품인 만큼 고급 레스토랑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기내식 치고는 괜찮다.

"아니, 음식 말고 선배요."

"니도 퍼마셨잖아."

"저는……, 선배 때문에 억지로 마신 거거든요."

마리아주를 해내니 더욱 말이다.

와인은 음식의 풍미를 배로 이끌어낸다.

소라도 잘 먹었다.

그런 주제에 동정 킬러(억지로 먹음)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맛있었던 건 인정하지만."

"그치."

"얼마나 쪽팔렸는지 알아요? 스튜디어스 언니도 한심하게 쳐다보고."

"크흠."

그리고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기내식과 와인은 소믈리에의 기본 지침이 있기는 해도.

'소믈리에 그거 그냥 폰팔이 같은 거거든.'

소믈리에는 한 마디로 세일즈맨이다.

각 와인 회사에 고용되어서 자사 와인들을 판다.

전문가격인 면모도 기대하기 힘들다.

니 따위가 와인 맛을 알아? 주는 대로 먹어.

"잘난 척하는 직업이거든."

"완전 소믈리에포비아시네요."

"니가 좀 더 머리가 크면 알게 될 거야."

와인 시장은 굉장히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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