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요!"
그 빡대가리년.
가슴만 뒤지게 큰 년.
우유통 하나는 봐줄 만한 아이.
'처자, 우유통은 마음에 드오.'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관성의 법칙이 작용한다.
바로 원위치를 하는 게 탄력도 있다.
"방금 저한테 한 소리인가요?"
"미안한데 바빠서."
"확실히 들었는데요. 빡대가리 같은 년이 트레이더 한다고."
"……."
하지만 머리쪽 탄력은 부족해 보인다.
그냥 없던 일로 넘어가면 되지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난리야.
5초 경과.
그제서야 다른 사람들도 상황을 파악한다.
나와 빡대가리녀한테 시선이 쏠리게 된다.
'어디서 하늘 같은 선배한테 말이야.'
역관광 맛을 봐야 하나?
니가 아무리 신입생 수석에, 얼굴도 반반하고, 우유통이 커다래도 한국은 장유유서의 나라다.
"근데 쟤 누구야?"
"쟤 아니야. 나이 많아."
"12학번이라고 들었는데."
"12학번이 아직도 졸업 안 했어?"
"……."
일반적으로는 말이다.
안타깝게도, 아니 필연적이게도 학과 애들과 교류가 없었다.
'이런 빡대가리들이랑 내가 왜?'
한국대가 명문대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 말이 능력이 있다는 말의 동의어는 아니다.
까놓고 말해서 성적 맞춰서 온 거잖아?
남들 눈 의식하는 인간은 가치가 없다.
"우리 학과 선배님……, 맞으시죠?"
"맞아 이 새끼야."
"네?"
"아냐, 맞다고."
투자자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사고방식이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조금은 싹이 보인다.
'증권사에서 일하고 싶다는 년이 여길 왜 와?'
그런데 고심해서 고른 학과가 경제학과라니?
업계인 입장에서 어이가 없을 만도 하다.
"아무리 선배라고 해도 선 넘으신 것 같은데요."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다고요……?"
연한 화장.
그럼에도 이목구비가 뚜렷한 게 미인상이다.
발칙한 몸매가 안타까울 정도의 밋밋한 차림도 말이다.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어요. 제가 부족하다면 어느 부분이 어떻게 부족한지 설명을 해보세요."
"그걸 내가 설명까지 해야 돼?"
"하세요. 아니면 사과하던가."
본인이 완강히 주장하던 대로 공부만 열심히 하고 싶은 건 사실인 것 같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진로 상담 마렵네.'
차라리 여캠을 하면 안정적인 고수익이 가능한데.
도박이나 다름없는 트레이더를 지향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미안. 무심코 본심을 꺼내버렸어."
"그래요, 사과를……."
"빡대가리한테 빡대가리라고 하면 안되는데. 듣다 보니 너무 빡대가리 같은 소리라 참을 수가 없었다. 너가 이해해."
"???"
내가 입이 좀 험한 건 사실이다.
이쪽 업계 종사자들이 원래 다 에고가 세고, 자기 말이 무조건 맞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없는 말을 지어내서 하진 않는다.
듣다 보니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내뱉었을 뿐이다.
'너가 이해하면 되잖아.'
귀찮다.
무슨 설명을 하고 앉아있어.
"너의 잘못도 있는 거야. 쌍방과실이라고. 서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자."
"그게 무슨 싸이코 같은 소리에요?"
"뭐가? 아니, 알잖아. 증권사 들어가려고 경제학과 왔다는 게 무슨 빡대가리 같은 소리야."
"……네?"
경제학과를 누가 써?
홀짝으로 돈 벌던 쌍팔년도 증권사도 아니고.
내가 한 말은 어디까지나 상식에 근거한 소리지만.
"증권사가 왜?"
"트레이더 돈 많이 벌지 않나……."
"빡세서 그렇지! 경쟁 엄청 심하잖아 거기."
"저 선배 말은 그런 게 아닌 거 아니야?"
그 상식이 다른 사람도 있다.
뒤에 병풍들.
중얼거리는 소리를 잠자코 듣고 있자니 머리가 띵해진다.
'……아니, 잠깐만.'
상식 (常識).
[명사]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
어떤 사회에 속한 사람이 반복된 문화와 지식을 통해 기본 교양이라고 믿게 되는 개념이다.
그러니까 다를 수 있다.
월가에서 수십 년 굴러 먹은 나의 상식과 아무런 실무 경험도 없는 경제 새내기들의 상식은 말이다.
"너무 막말하시는 거 아니에요?"
"진정 좀 해."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왜 화를 내는 거야. 사람이 왜 이렇게 화가 많아."
체온도 뜨끈하겠네.
그런 잡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상황은 생각 이상으로 복잡할지 모른다.
주위의 시선.
조금 따갑게 꽂히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니다.
마치 내가 대역죄인이라도 된 것마냥 쳐다본다.
'이래서 대학이 싫어.'
특유의 집단주의.
내가 가장 혐오하는 부류다.
남들과 같은 생각만 하는 인간 말이다.
증권 업계에서 일하려면 바꿔야 한다.
어떻게든 남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니까.
"그럼 내가 설명해서 납득을 하면 떨어져 줄 거지?"
"무슨 떨어져요. 무슨 껌딱지도 아니고."
"껌딱지는 아니긴 하지."
"?"
자아가 없다.
남들이 그렇다고 하면 고개를 끄덕끄덕.
모르긴 몰라도 졸업생들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었을 것이다.
'경제학과라고 액면 그대로 경제 관련된 일을 할 줄 알아.'
막연하게 금융쪽 일을 하지 않을까?
그런 인생 꿀 빠는 세대는 너희 윗세대에서 끝났다.
4차 산업 혁명에서 바로 갈려나간다.
기계가 인간보다 숫자 잘 세고 통계 잘 뽑는데 인간을 왜 뽑아.
증권 업계도 마찬가지다.
컴퓨터 프로그램이 트레이딩 인력을 대체하기 시작하는 시기가 온다.
"더 이상 트레이더가 필요한 시대가 아니야. 너 졸업할 때쯤 되면 사람 뽑지도 않을 걸."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으라는 거에요?"
"안 믿으면 어쩔 건데?"
"트레이더가 우습게 보여요? 컴퓨터가 어떻게 트레이더의 일을 대체해요."
RPG 게임으로 따지면 매크로.
프로그램만 돌려 놓으면 알아서 돈을 번다.
'너무 이상적이지.'
그게 돼?
연구가 된지는 꽤 오래되었다.
성공만 하면 인건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트레이더마다 적게는 수억, 많게는 조 단위로 연봉이 나간다.
딴 만큼 버는 구조라 어마어마하다.
"맞아, 맞아!"
"나도 안된다고 들었어."
"그게 되면 사기지……. 자동으로 돈 복사하는 건데."
메리트는 차고 넘친다.
2000년대 초반부터 연구를 진행했다.
하지만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나온 결과물은.
'절대로 안된다는 거지.'
주식 시장은 단순히 저평가 주식을 매입해서 파는 게 끝이 아니다.
컴퓨터가 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인간의 심리가 부딪힌다.
탐욕과 욕망.
그 더러운 감정을 컴퓨터는 이해하지 못한다.
"저의 아버지께서 월가에서 근무하다 현재 여의도 증권사 상무를 보고 있어요. 당신보다 훨씬……."
"월가에서 여의도로 갔다고?"
"네."
"도망쳐 나온 걸 잘못 말한 거겠지."
"……네?"
컴퓨터의 인간 대체가 불가능한 이유다.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수요가 폭발하게 된다.
'인간을 연구한다니. 돈을 쏟아부을 가치가 있잖아.'
월가에서 새로이 뽑히는 인력.
대부분 수학과 아니면 뇌과학 관련 종사자다.
인간의 심리가 문제라면, 그 심리 자체를 연구하는 것이다.
바로 탑급 트레이더의.
"지금 제 아버지를 모욕하신 거에요?"
"단순히 사실을 말한 것 뿐인데?"
"당신이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런 덜떨어진 인간보다 100배, 1000배는 낫지."
"!!"
컴퓨터는 인간을 답습한다.
트레이더는 보다 나은 학습 환경을 제공해야만 한다.
즉, 미래의 트레이더는 인간이 아닌 컴퓨터와 경쟁한다
고작 인간 사이의 경쟁에서 도태됐을 정도면.
'알아서 짐 싸고 지네 나라로 가는 거지.'
기준은 날이 갈수록 올라간다.
어중간한 애들은 도망쳐 나온다.
월스트리트, 괴물들의 소굴에서 말이다.
"사과하세요."
"Apple."
"제가 농담하는 걸로 보여요?"
"나도 농담 아닌데."
고이고 고인 기존 인력조차 버티지 못한다.
신규 인력은 1000에 999명은 갈려나간다.
'얼굴은 반반한데 정말 아쉽게 됐어.'
파프리카TV에서 만났으면 좋은 인연이 됐을 텐데.
지금이라도 진로를 재고해봤으면 좋겠다.
"너도 도망가지 말고 빨리 포기하는 것도 한 방법이야."
"도망가신 것도 아니고, 댁이 뭔데……."
"증권사 트레이더 말고 다른 직업도 있잖아. 그 뭐……, 헬스 트레이더라던지 ○켓몬 트레이더라던지."
키도 크고 몸매도 쭉빵하다.
돈 많은 아저씨들 꼬시면 더 쉽고 간단하게 돈을 벌 수 있다.
"풋!"
"○켓몬 트레이너래."
"아직 신입생이면서 좀 당돌하긴 했지."
"아, 웃으면 안되는데."
진로를 상담하자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일부 병풍들도 내 생각에 동조하는 모양이다.
'트레이너였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몸을 부들부들 떠는데 우유통도 같이 흔들린다.
나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아무튼 ○켓몬 트레이너 열심히 하고."
"증권사 트레이더거든요?"
"그래, 지우처럼 언제언제까지나 태초마을에서 놀 수는 없잖아."
어수선해진 분위기.
빠져나가기 안성맞춤이다.
○켓몬 트레이너의 어깨를 톡 치고 음식점 밖으로 빠져나간다.
주식이었다면 최고의 설거지 매매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인간 관계에서는 다소의 후폭풍이 있을 수 있다.
'사람이 진실되게 살기가 어렵다니까.'
20년만의 복학을 조금 조진 거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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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투자자들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인데.
'도박장 문 열 시간에!'
학교를 가야 한다.
학생의 본분.
그런 빌어먹을 주입식 교육에 불만이 매우 많다.
경제학과라며?
그러면 1학년 때부터 도박장 빠릿빠릿 돌려서 인생을 실전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야지.
'도박장……, 아니 코스피 열리는 시간에 무슨 학교를 가라고.'
빌어먹을 전공 수업은 꼭 오전에 있다.
경제학과면 도박 시간을 준수해서 강의 시간을 오후에 잡아주던가.
한국 교육 시스템은 글러 먹었다.
어렸을 때 경제 교육을 시켜야 한다.
약간 도박 영재 느낌으로 국가적 인재를 육성하는 거지.
드르륵−!
잡생각을 하는 사이에 도착했다.
강의실 뒷문은 아무리 조심스럽게 열어도 소리가 나는 구조다.
<가격이 올라가면 수요량은 감소합니다. 이런 걸 우리가 수요의 법칙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다행히 교수님은 강의에 집중하고 계신다.
화장실 다녀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으면 되는데.
"다른데 앉아 주실래요?"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가 들린다.
한기가 풀풀 풀리는 게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어쩌라고.'
들어오면서 확인한 강의실 내부.
여기가 아니면 다 교수님 앞의 매우 부담스러운 위치 뿐이다.
적당히 무시하고 앉는다.
친구 자리?
자리를 맡아줘도 되는 건 딱 메이플스토리까지다.
"앉지 마라니까요!"
"니가 뭔데."
"저……, 기억 안 나요?"
남의 자리에서 사냥하면 길드 척살령 떨어지고 난리도 아니다.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아직 룸빵을 다녀온 기억은 없는데.'
반반하다.
그리고 큼지막하다.
두꺼운 스웨터를 입고 있어도 무식하게 솟은 존재감이 가려지지 않는다.
"아, 그 포켓몬 트레이너?"
"아니라니까!"
발작 버튼이라도 누른 듯 리액션이 훌륭하다.
하지만 작은 소리도 크게 울리는 강의실 안.
<거기 조용!>
교수님에게 한 소리 듣는다.
분필로 딱 우리가 있는 위치를 가리킨다.
"또 당신 때문에……."
"화가 많네 화가."
"화를 안 내게 생겼어요?"
신입생 환영회에서 장래 희망을 밝힌 처자.
아무래도 뒤끝이 상당한 모양이다.
"젠장, 태초마을부터 만만치가 않네."
포켓몬 트레이너의 꿈을 응원해줬을 뿐인데.
이런 식으로 악연이 생길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