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450)

투자.

미래에 더 큰 자산을 얻기 위해 현재의 구매력을 포기하는 행위.

그것을 하는 사람을 '투자자'라고 부른다.

<당신은 청산 당하였습니다.>

그 투자자들의 성지.

월가에서는 심심찮게 벌어진다.

자신의 자산이 0원에 수렴하는 일 말이다.

'본인이 당할 거라고는 보통 생각하지 않지만.'

나도 마찬가지다.

1조 달러.

내가 운용하고 있는 자산의 총액이다.

세계를 뒤바꿨던 하이퍼 인플레이션 이후 가치가 줄어들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엄청난 금액이다.

게다가 레버리지를 병행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운용하는 건 그의 10배가 넘어간다.

그 높은 레버리지가 발목을 잡았다.

<예측할 수 없는 사고였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복구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도요. 하지만 저희 은행도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리스크를 짊어질 수 없다는 점, 이해하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아니, 잡혔다.

레버리지의 위험성.

당연히 모를 리가 없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절대 실수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대가리 불러."

<네?>

"니 대가리 부르라고! 뒤에서 음침하게 일 꾸민 그년 말이야."

<무, 무슨 말씀이신지;; Mr.lee, 잠깐 진정을 하시고…….>

증권 시장에 뛰어든지 20년.

지식으로 배운 것도 많지만,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이 살얼음 같은 판에서 살아남게 해준 것은 후자다.

그 감이 미친 듯이 울부짖는다.

'아니, 빼박이지.'

확실한 증거가 없을 뿐.

자잘한 증거나 심증은 한두 개가 아니다.

모든 정황이 한 가지 사실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내뺀다면 별 수 없지만.

<대, 대표님!>

<괜찮습니다. 제가 다 설명하죠.>

이미 여기까지 온 마당이다.

그토록 원했던 목적은 이뤘을 터다.

비대면 화상 회의.

왼쪽 아래 갑작스레 나타난 얼굴은 낯이 익다.

'다 보고 있었잖아 이 요망한 년.'

레이첼 비거.

밝은 금발과 새하얀 피부가 인상적인 여성 헤지 펀드 CEO다.

그 외모 때문에 월가의 마녀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실적이다.

그녀가 운용하는 펀드는 매년 시장 수익률의 두 배 이상을 내며 마법 같은 성장을 해왔다.

<폭정은 끝났습니다. 당신의 비협조적인 시장 참여에 우리는 넌더리가 났어요.>

"폭정? 그러니까 짜고 쳐서 날 끌어내렸다 이거지?"

<어떻게 생각하시든 자유입니다. 당신은 패배자고, 이 시장에서 퇴출 당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표면적으로는 말이다.

실상을 알고 있다.

용담호혈의 월가에서 그녀가 빠르게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

'가문빨로 빽이란 빽은 다 동원했겠지.'

로스차일드.

미국 정재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유대계 가문이다.

그녀는 그곳의 핏줄을 잇고 있다.

나도 우연한 기회가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도와줘?"

<비록 당신의 펀드는 청산되었지만 당신의 인생이 끝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초대형 펀드다.

그리고 나의 능력을 감안하면 어지간한 태풍도 받아낼 수 있다.

예상이 다섯 번은 더 어긋났다.

시장의 움직임이 기형적이었던 이유를 확실하게 알겠다.

아그작!

아니, 다 알고서 대비했다.

그럼에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가문이 가진 돈과 힘은 그만큼 거대하다.

"닥쳐."

"너 따위가 껴들을 레벨이 아니니까 닥치라고."

<…….>

나의 담당 직원.

앤드류가 영업본부장으로 있는 BOA도 10조 달러 규모의 은행이다.

그조차 하나의 말에 불과하다.

저 빌어먹을 계집애가 꾸민 거대한 사기극에서 말이다.

"제2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라도 일으키고 싶어? 나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닐 텐데."

<그건 당신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정부와 협의해서 만반의 대비를 해뒀으니까요.>

"나 하나 엿 맥이려고 백악관까지 움직였어? 아주 오지랖이 대단하시네?"

<칭찬 고맙습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서브프라임 은행이 파산하며 세계 경제가 흔들렸던 2008년경의 대사건이다.

미국인들이 체감한 충격의 크기는 한국의 IMF에 준했다고 한다.

그것이 다시 한 번 일어날지도 모른다.

내 펀드의 운용 자산은 당시의 서브프라임 은행과 맞먹는다.

한순간에 청산되면 여파가 엄청날 수밖에 없는데.

'이 영악한 년.'

인간은 학습을 하기 마련이다.

동물도 그럴지언데, 세계의 중심인 미국은 더더욱 그러하다.

제도적인 안전 장치가 확보돼있다.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 만에 하나 터져도 여파를 최소화시킨다.

한 술 더 뜬다.

내 펀드가 청산될 걸 알았기 때문에 미리 자금 흐름에 여유를 만들고, 정책적 협조도 얻어두었을 것이다.

거의 트루먼 쇼급이다.

대국민 사기극도 유분수다.

나 하나를 엿 먹이기 위해 수고를 들인 이유.

<아쉽게 되었네요.>

"뭐?"

<오만하고 불손하고 협조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당신이지만, 한 명의 투자자로서는 꽤나 인정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사적인 감정이다.

그러니까 저 빌어먹을 계집애는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해 국가 예산급의 자금과 권력을 움직인 것이다.

'하아…….'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악연의 끝이 파멸이라는 사실 말이다.

"야 이 시발련아."

<……네? 뭐라고 하셨죠?>

"니가 살면서 인정하는 게 니네 동네 집값밖에 더 있냐? 연준 의장한테도 말대답 따박따박하는 년이. 결국 니가 날 시기해서 인맥으로 조졌다는 거잖아."

투자자로서 파멸을 선고 당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잃을 게 없는 사람이다.

'이 시발년이 진짜!'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나도 저년도 한참 파릇파릇하던 시절에 접점이 있었다.

<당신은 언제나 천박하네요. 극단적이고, 충동적인 말로 대중들의 심리를 흔들어 시장에 균열을 만들죠. 다시 생각해도 당신을 시장에서 퇴출한 건 최고의 결정이었어요.>

"천박한 건 침대에서의 니 모습이겠지."

<뭐, 뭐……?>

한 번 잤다.

남녀 사이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한 가지 오산이었던 건.

'그 나이 먹고 무슨 처녀야 시발!'

물론 그때는 맛있게 먹었다.

곱게 자란 규중처녀만큼 맛있는 희귀 매물이 없다.

콧대 높은 여자를 농락하고 내 흔적을 새긴다.

남자 삶에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다.

<두 분이 가까웠던 과거가…….>

<아, 아니야! 저 미치광이가 헛소리하는 거라고!>

"니 아다 존나 맛있더라 씹년아."

<닥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게 되는 강렬한 고음.

순간 고막이 떨어져 나간 줄 알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눈을 뗄 수 없는 것이 있다.

레이첼,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허, 헛소리하는 거에요. 절대 믿지 마세요. 저 인간 바, 발악하는 거라구요!>

<알고 있습니다 Ms.레이첼. 과도한 반응은 상대가 원하는 바라는 걸…….>

<세, 세상에 어이가 없어서. 내가, 내가 뭐가 아쉬워서 니 따위랑.>

간만에 얼굴에 핏기가 도는 모양이다.

처음 박아줬을 때도 대충 저런 얼굴이었던 것 같다.

'불 끄고 따먹은 게 천추의 한이네.'

아무래도 오래된 일.

증거라고 할 만한 건 남아있지 않다.

그녀 본인이 인정할 일은 더더욱 없다.

하지만 표정이 무엇보다 생생한 증거다

포커 페이스로 유명한 월가의 마녀가 체면이 말이 아니다.

"이년 처음 만났을 때도 존나 싸가지 없었는데 좆맛 본 후부터 캬아~."

<꺄, 꺄아아아!!>

"왜 그러시나. 헛소리면 적당히 무시하면 될 텐데."

한동안 잘 즐겼다.

어디 헐리우드에서나 볼 법한 미인상인데, 몸매도 잘 빠지고 피부도 깨끗하다.

물론 예쁜 년들은 많다.

세상에 돈으로 안되는 게 어디 있을까?

하지만 머리 좋은 처녀는 보기가 드물다.

'……먹다 체할 줄은 몰랐지.'

문제는 머리가 좋아도 너무 좋았다는 사실이다.

가문 이야기도 그때는 장난인 줄 알았다.

《채, 책임 안 져요? 설마?》

엄청난 집착.

고작 처녀 하나 잃었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안다.

적당히 무시하고 연락 끊었다.

그것이 길고 긴 악연의 시작이 될 줄이야.

<흠, 흠! 제가 학생 시절 교우 관계에 실수가 있었던 점은 인정하겠습니다.>

"오늘은 집값 말고도 인정을 잘하네."

<……닥치세요.>

그때부터였다.

처녀라고 하면 학을 떼기 시작한 게 말이다.

'내가 이년 때문에 김치도 종갓집은 안 먹어.'

명문가+처녀.

PTSD가 올 지경이다.

적당히 잊으면 되지 무슨 평생을 간직하고 있어.

아그작!

결국 이 지경까지 오고 말았다.

1조 달러?

그보다 더 화가 나는 건 내가 이런 기지배한테 졌다는 현실이다.

<그럼 두 분이 알고 지내셨던 건 사실……?>

<단순히! 알고 지냈을 뿐이에요. 제가 저런 돼지 새끼랑 사귀었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

암퇘지처럼 앙앙거리던 년한테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레이첼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아그작!

사탕.

스트레스를 받으면 당분을 섭취한다.

머리 쓰는 일의 특성상 필요하기도 하다.

그것이 조금 과하다.

최근에는 특히 스트레스 받을 일이 많았다 보니.

'시발.'

변명이다.

그전부터 뒤룩뒤룩 쪄버렸다.

젊은 날의 그 시절과는 한참은 달라졌다.

<돼지씨, 다시 한 번 나불거려 볼래요? 누가 누구랑 사귀었다고요?>

"뭐래, 찌찌도 늘어진 할매년이."

<아, 안 늘어졌거든?!>

레이첼도 마찬가지.

빛이 바랬다.

세월의 흔적을 피해갈 수는 없다.

주름도 패이고, 턱선도 굵어졌다.

아무리 미용 기술이 발달해도 숨기는데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가려지지 않는 미인의 아우라가 흐른다.

나이를 먹으며 붙은 관록은 위엄을 더한다.

<흠, 흠! 당신과의 대화는 실로 불쾌해요. 천박한 말을 쓰지 않으면 대화를 진행할 수 없나 보죠?>

"그러니까 천박한 건 니가 박힐 때 내는 소리."

<아니라고!!>

그러한 세월의 변화.

알고 있기 때문에 더 그지 같을 수밖에 없는 악연이다.

성질 괴팍한 노처녀가 되어서 내 앞을 가로막을 줄이야.

그 길고 긴 관계도.

"이년이 평소에나 까탈스럽지 침대에서는 또 그렇게 순종적일 수가 없어. 자지 박히면 그냥 꼼짝 못하는 거지."

<아…….>

<당신도 듣지 마요! 고소할 거야. 지금 당장 입 안 닥쳐?>

끝이 날 것이다.

이곳의 세계는 돈이 전부다.

천문학적인 시드를 전부 잃어버리게 되었다.

<저, 정말 믿을 수가 없네요. 마지막 바, 발악이 성희롱이라니 당신도 정말 떨어질 대로 떨어졌군요!>

"왜 옛날 생각 나서 후끈후끈해? 또 박히고 싶어?"

<……한때나마 당신과 교우했던 저의 과거를 흑역사로 묻어두고 싶습니다.>

월가의 마녀.

'다섯 마녀의 날'이라는 주식 시장의 새 공포를 만들어낸 그녀가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다.

긴 속눈썹이 부들부들 떨린다.

아랫입술을 씹으며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누른다.

<아 혹시 재기할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그 잘난 세 치 혀로 투자자들을 농락해 자금을 조달할 궁리를 하고 있는 거군요. 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절대…….>

"니가 도와주면 혹시 모르지."

<네?>

"섹스 비디오라도 한 편 찍어주면 말이야. 폰허브의 주가를 단기 3배, 아니 언플만 잘하면 10배까지도 끌어올릴 재료가 될 텐데.>

<야 이 #$^$%$!>

진귀한 광경이다.

만약 인터넷에 올라간다면 투자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이슈가 될 게 분명하다.

<조금이라도 동정했던 제가 어리석었어요. 자~알 알겠습니다 앤드류.>

<네, Ms.레이첼.>

<이런 저급한 대화 절대 유출되지 않도록 보안 분야 1등 주 전부 매입하세요.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을 때까지 지금 당장!>

'어지간히 불안한가 보네.'

딱히 해코지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 신세인 내가 떠들어도 아무도 믿어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마지막으로 한 번만 하고 싶었다.

과거의 추억이 떠오르게 만드는 그녀와의 농담 따먹기.

"한 마디만 해도 되냐?"

<흥! 이제 와서 빌어도 늦었어요. 당신이 절대 증권가에 복귀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니 보지 쩔더라."

<씨발 새끼야!>

그리고 진짜 따먹기.

저 건방진 년의 볼기짝을 치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다.

'여자 앞에서는 센 척을 하고 싶은 게 남자라는 생물이거든.'

재기?

그것도 어느 정도일 때의 이야기다.

산전수전 다 겪은 나도 오늘 같은 날은 힘이 푹 빠진다.

그래서 놀리기라도 한 것이다.

사실 악을 쓰고 있었던 건 나다.

일에는 열정이라는 게 필요하다.

'돈이 부족한 건 아니야.'

가진 돈의 99.99%를 잃어도 일반인은 평생 꿈도 꿀 수 없는 부를 축적한 게 월가의 거부다.

지금 내 앞에 보이는 이 술만 해도.

『Macallan 1946』

맥캘란.

위스키계의 롤스로이스라 불리는 명품이다.

그리고 이것은 맥캘란 중에서도 극히 희소한 빈티지다.

전세계에 3천 병이 있었지만 긴 긴 시간 동안 소비돼 이제는 딱 1병만이 남았다.

그 가치는 글자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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