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6화 〉 좋은 향기
* * *
철컹!
밥구멍을 연 나는 말없이 아침을 넣었다.
“누나...! 오늘은...”
여전히 다급하게 스텔라를 찾던 알렉스의 입이 다물렸다.
밥구멍에서 튀어나온 손이 누나의 것과 다르자 순간 혼란에 빠진 듯했다.
“.... 송지혁...?”
설마 하는 말투를 들은 나는 밥구멍에 얼굴을 가져다댔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지? 스텔라는 지금 쉬고 있어서, 내가 대신 가져다주러 왔어.”
“네가... 네가... 왜... 아, 아니... 지혁이 형! 저랑 얘기 좀 해요...!”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는 알렉스.
날 설득하면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방심시켜서 날 죽이러 달려들 생각이거나.
“할 말 있어?”
“있어요! 시간을 조금만 내주시면 진짜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들어갈까?”
“그, 그래주실래요?”
“아니. 내가 뭘 믿고 거길 들어가겠냐. 난 스텔라 같은 힘이 없는데.”
“.... 역시 형도...”
“스텔라가 비스트 슬레이어인 걸 알았냐고? 당연하지. 내가 스텔라를 변신시킨 장본인인데.”
“.....”
밥구멍으로 보이는 알렉스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어지간히 놀란 모양.
놈의 눈빛에 증오심이 깃들기 시작한다.
자신과 스텔라의 관계가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게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잠시뿐이었다.
날 죽일 듯 노려보던 알렉스의 눈은 이내 순한 양처럼 돌아왔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물었다.
“형은 본부 사람이었어요...?”
“맞아. 스텔라한테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야. 비스트 슬레이어의 적합자인 걸 알아서.”
“적합자라니... 그건 무슨...”
“그런 게 있어. 할 말은 이것뿐인가?”
“아, 아뇨...! 그... 제가 싫으시죠? 하도 쓰레기 짓만 해대니까 형도 참지 못하고 절 대하는 태도를 바꾸신 거잖아요. 맞죠?”
아니, 애초부터 가식이었단다.
“글쎄.”
“지,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저 반성하고 있어요...”
“여길 나가기 위해 가면을 쓴 게 아니라?”
“아뇨. 정말입니다. 믿어주세요.”
“그래? 갑자기 설득되려고 하네? 들어가 볼까?”
“드, 들어만 와주신다면 무릎 꿇고 정식적으로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어디 한 번 확인해보자고.
내게 바로 달려들지, 아니면 탈출할지,
나는 망설임 없이 도어락 비밀번호를 입력한 뒤 문을 열었다.
철컥!
문을 연 내가 본 것은... 침대에 앉아 얌전히 대기를 하는 알렉스였다.
마음만 먹으면 날 밀어내고 도망가려는 시도를 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
스텔라에게 들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고 있나보다.
“가만히 있네?”
놀랍다는 듯 말하자, 알렉스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더 이상 누나와 멀어지기 싫습니다.”
“스텔라와의 관계를 위해서다?”
“궁극적인 목표는 그게 맞지만, 형과도 사이좋게 잘 지내고 싶습니다.”
굳건한 결의가 느껴지는 눈빛이다.
아까 증오심을 가라앉힌 것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각성이라도 하기 시작하려는 건가?
‘안타깝군.’
조금만 더 빨리 스스로를 다스리는 방법을 찾았다면 기회가 있었을 텐데, 불쌍하구나.
스텔라는 이미 늦었단다.
음문이 생겨버렸거든.
아직 미완성이긴 하지만, 이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0에 수렴할 거다.
“형... 아니, 형님. 제가 지금 무릎을 꿇어도 될까요?”
당장 침대에서 내려와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려는 알렉스.
상당히 비굴해 보이는 모습이다.
스텔라가 좋아할 것 같다.
한손을 들어 그를 만류한 내가 말했다.
“더 이상너한테 투자할 시간이 없네. 바빠서.”
움찔.
알렉스의 어깨가 격하게 떨렸다.
노기가 피어오르고 있구나.
각성은 개뿔... 넌 역시 답이 없다.
“.... 이해합니다.”
“필요한 물건은 있고?”
“아... 혹시 칫솔... 새거 주실 수 있나요...?”
“스텔라한테 물어볼게.”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 혹시 누나가 아픈 건 아니죠...?”
“피곤하기만 한 거니까 걱정하지 마라. 이만 간다.”
“.... 들어가십시오.”
고개를 한 번 까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나는 알렉스의 방을 나갔다.
철컹!
문을 제대로 잠그고 안방으로 들어가 보니, 얌전히 누워있는 스텔라가 보였다.
아마 오늘까진 쭉 잘 것 같은데, 이참에 신전이나 들렀다 와야겠다.
@@
할짝.
뺨에서 느껴지는 촉촉한 촉감.
천천히 눈을 뜬 스텔라는, 자신의 눈앞에 메릴이 보이자 안색을 환하게 폈다.
“메릴...?”
“스떼라 헤이리! 안녕하셔요!”
여전한 발음으로 자신을 부르는 메릴.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 스텔라가 말했다.
“안녕...? 아델라인 선배님은 어디 계시고 혼자 왔어?”
메릴은 스텔라의 물음에 답할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그저 스텔라의 주위를 아장아장 돌며 귀를 쫑긋하거나, 코를 킁킁거렸다.
무언가를 맛보듯 맨다리와 팔을 핥기까지 했다.
‘뭐하는 거지...?’
그런 메릴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낀 스텔라는, 설마 자신의 몸에 지혁의 정이 남아있나 싶어 황급히 침대를 둘러보았다.
‘깨끗한데...?’
정사의 흔적이 전혀 없다.
지혁이 청소를 끝내놓았다는 뜻.
심지어 자신이 자고 있는 사이에 샤워까지 시켜놨는지, 머리와 몸에선 샴푸, 바디워시 냄새밖에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메릴은 왜 호기심 어린 아이마냥 자신의 냄새를 맡고, 맛을 보는 것일까?
인간들이 쓰는 목욕용품이 궁금해서는 아닐 테고... 미스터리다.
여전히 자신의 주변을 도는 메릴을 바라보며 고민을 하던 그녀는, 살랑거리는 꼬리가 자신의 팔을 스쳐지나가자 웃음을 터뜨렸다.
“간지러워... 하지 마...”
참지 못하고 메릴을 안아든 스텔라의 나긋나긋한 부탁.
커다란 귀를 쫑긋거린 메릴은, 얌전히 스텔라의 품에 안겨 문 밖을 바라보았다.
문은 왜 쳐다보는 걸까?
스텔라가 그러한 생각을 하던 찰나,
스으으...
어떠한 기운이 그녀의 몸으로 스며들어왔다.
그건 기운이라기 보단 향기였다.
아주 익숙하면서도 향긋한... 가족 같은 향기.
굳게 닫힌 문 밖에서부터 안으로 들어온 그것은, 아직까지 잠에서 깨지 못한 스텔라의 정신을 맑게 만들어주었다.
‘뭐지...?’
그러고 보니 메릴에게서도 미약하지만 같은 향기가 나는 것 같다.
메릴의 정수리에 코를 묻고 숨을 훅 들이켜 보던 스텔라는,
똑똑.
“일어났니? 들어가도 돼?”
밖에서부터 세화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화들짝 놀라선 대답했다.
“아, 네...! 물론이에요, 선배님...!”
덜컥.
곧이어 문이 열리면서, 세화가 들어오더니 일어나려는 스텔라를 만류했다.
“앉아있어.”
세화는 같은 여자가 봐도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킨 스텔라는, 세화가 침대에 걸터앉아 자신에게 물컵을 내밀자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내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궁금하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메릴과 세화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두 사람이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알 리가 없을 텐데도 말이다.
“어... 네. 궁금해요...”
“지혁이가 알려줬어. 잠시 볼일이 있어 나가봐야하는데, 네가 점심시간이 지나도 일어나지 않아서 걱정되니 우리더러 살펴봐달라고 하더라.”
“아... 그랬구나...”
“혹시 기분이 나쁘다면 바로 나갈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오히려 좋았다. 가족과도 같은 사람들이 자신을 걱정해줘서.
거실에 있는 알렉스의 방이 켕기기는 하지만...
세화는 딱히 그곳을 궁금해하지 않는 눈치였기에, 무탈하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손사래를 친 스텔라가 말했다.
“아니에요...! 걱정을 끼쳐드려서 죄송할 따름이에요.”
그 말에 온화하게 웃은 세화는, 어느 샌가 스텔라의 품에서 뛰쳐나온 메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곧 있으면 유리아 언니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올 텐데, 실비아 언니의 집에서 간단하게 맥주라도 할래?”
“지혁이 오빠는요...?”
“일거리가 꽤 많이 생겨서, 박사님이랑 처리 중이야. 조금 늦는대.”
지혁과 떨어져있는 건 정말 미칠 정도로 싫지만, 지금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들 덕에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을 것 같다.
“혹시 지금 몇 시인가요?”
“저녁여덟 시.”
“여덟 시... 요...?”
“응.”
그렇게나 오래 잤다는 말인가?
스케줄이 있는 날에 이런 미친 늦잠을 잤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나저나 알렉스에게 밥을 줄 시간이 꽤 많이 지났다.
하지만 지혁이 점심을 챙겨주었을 테니, 한 끼 정도는 먹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었다.
알렉스는 최근 자주 굶잖은가?
퍼질러 누워만 있어서 살도 찌는 상태일 테니, 다이어트를 시킬 겸 오늘은 주지 말아야겠다.
아주 자연스럽게 동생의 처우를 결정해버린 스텔라가 말했다.
“갈래요. 맥주 마시고 싶어요.”
“응. 그리고...”
말끝을 흐린 세화가 돌연 스텔라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축하해. 우리 조금만 더 힘내자.”
“네...? 무슨...”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던 스텔라의 얼굴이 확 풀렸다.
세화의 품이 정말 따뜻했기 때문이다.
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 같은 느낌.
게다가 아까 맡았던 향기까지 나서, 기분이 정말 좋아지고 있다.
왜 자신을 축하하는지, 왜 힘을 내자고 하는지 궁금하긴 하지만,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다.
나중에 설명해주겠지.
자신도 모르게 환히 웃은 채로 세화에게 안겨있던 스텔라는 지혁을 생각했다.
왠지 그에게서도 세화와 같은 향기가 날 것 같았다.
아니, 더욱 진할 거라는 직감이 느껴졌다.
남녀가 똑같은 향기를 풍긴다?
원래라면 외도를 의심해야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스텔라는 그런 천박한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사람... 아니, 다른 동료들마저도 같은 향기를 풍겨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행복할 것 같아...’
녹아내린 얼굴로 헤실거리던 스텔라는,
우웅!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리자 세화에게 양해를 구하고 화면을 확인해보았다.
[일어나면 연락해.]
두근!
왜 이럴까.
고작 메시지 하나를 본 것뿐인데, 심장이 좋은 쪽으로 마구 뛴다.
오랜 시간 자다 일어났는데 사랑하는 이가 없어 그리움이 된 건지, 지혁을 보고 싶어서 미치겠다.
이러한 스텔라의 마음을 알아차렸을까?
세화가 인자한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지혁이 문자지?”
“네...”
“얼른 돌아오라고 해봐. 네 말이라면 무조건 들을 걸?”
솔깃하다.
하지만 지혁의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
또한 자고로 오랜 시간 헤어져있던 커플이 다시 만날 때, 그 만족도가 대단한 법이다.
동료들과 함께 있으면서 참고 참다가, 지혁이 돌아오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어야지.
그리 생각한 스텔라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어보였다.
“아니에요. 제가 지금 오빠를 부르면 일이 미뤄지겠죠. 보고는 싶지만 참을 거예요. 나중에 일이 끝나면 박사님도 데리고 오시라 말하고, 같이 놀면 좋을 것 같아요.”
“엄청 어른스러워졌네? 착하다.”
세화에게 듣는 칭찬은 지혁 다음으로 좋다.
아이처럼 헤실거린 스텔라는, 세화의 나가자는 말을 듣자마자 침대에서 일어나 메릴을 안아들었다.
그리고는 동생이 있는 방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두 사람과 함께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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