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3화 〉 양자택일 #2
* * *
@@
파캉!
크윽!
스텔라의 채찍을 막아내고는 짤막한 비명을 터뜨린 청기수의 신형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콰아아앙!
나무와 늪으로 둘러싸인 아마존의 열대우림에 거대한 구덩이가 패일 정도로 큰 충격을 받은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어느 샌가 내려온 스텔라를 노려보았다.
자신을 네르갈이라고 소개한 그의 창백한 갑주를 바라보던 스텔라가 생각했다.
‘뭐지...?’
네르갈은 3기사 중에서 가장 강한 존재다.
3기사 모두와 맞상대를 해보았기에 잘 알고 있었다.
등장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뿜어내는 S급 마물이 네르갈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태가 메롱이었다.
초반엔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잘 싸웠다.
몇 합 제대로 겨루긴 했지만 그 이후부터 자신이 밀렸고, 경외심마저 들 정도로 빈틈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힘이 빠지는 듯하더니, 지금은 병에 걸린 나귀마냥 약하기 그지없어졌다.
자신을 봐주려 했던 건 절대 아니었다. 무기를 맞대보면 알 수 있다.
네르갈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진심이었다.
@#$&!@...
낫을 든 네르갈이 무어라고 말을 건네 왔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쳐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평소에 투레질을 하며 자신의 약을 올리던 군마는, 오늘 아무런 도발도 하지 않고 구덩이에 쓰러져 미약한 숨만 내쉬고 있었다.
이들에게 뭔가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하다.
“너 혹시 어디 아파...?”
조심스러운 스텔라의 물음.
#!&@$!!
그와 동시에 군마를 살피고 있던 네르갈이 불같이 화를 내며 달려들었다.
목소리 안에 섞여있는 동정심을 느꼈나보다.
‘너무 느린데... 진짜 아픈 거 아니야...?’
그 말마따나 쇄도해오는 네르갈은 저번에 싸울 때완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느렸다.
폭발적이었던 기운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낫을 휘두르는 속도마저도 눈으로 보고 피할 수 있을 정도다.
시간을 주고 싶지만 네르갈은 기사다.
명예로운 결투를 원하고 있을 터.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야 옳았다.
‘좋아...’
방금 동정했던 부분에 미안함을 느낀 스텔라는, 네르갈의 움직임을 잘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의 팔이 벌어지는 순간, 자신이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모아 옆구리 쪽에 채찍을 휘둘렀다.
철컥! 촤르르륵!
곡선을 그린 채찍이 낫을 교묘하게 피해가면서, 네르갈의 갑주 옆부분을 정확하게 타격한다.
투쾅!
그러자 마치 함포라도 쏘는 굉음과 함께,
커헉!
네르갈이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더니, 움직임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가 쓰고 있는 투구에선 진한 푸른색의 액체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마물 특유의 혈액이었다.
그 이질적인 색깔을 보았음에도 스텔라는 딱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심한 내상을 입은 것 같은 네르갈의 상태를 걱정할 뿐이었다.
진짜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궁금하고, 걱정된다.
그리 생각한 스텔라가 네르갈에게 가까이 가려고 할 때,
저 녀석이 도망가기 전에 마무리해.
착용한 통신기에서부터 세화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칫한 스텔라가 조용히 물었다.
“마무리요...? 혹시... 없애라는 뜻인가요...?”
맞아. 왜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절호의 기회라고 봐.
“아, 아직 전 경험이...”
저 마물의 이용가치는 이제 없어. 초반 결투를 보면서 느꼈어. 인간형 마물과 싸우는 건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해.
무려 세화가 해주는 칭찬.
그럼에도 스텔라의 기분은 꿀꿀했다.
마물을 처치하는데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만약 기사들이 처음 보는 마물이었다면, 세화가 말을 하기도 전에 없애려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다른 마물들과 사뭇 달랐다.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수없이 있었음에도 자신을 몇 번이나 봐주었고, 다음을 기약하며 물러났다.
앞선 두 번의 결투에선 갑주나 무기를 일부 떼어내서 선물로 주며 인정을 해주기도 했다.
자신과의 결투를 즐기는 게 느껴지기까지 할 정도였다.
‘나도... 나도 저들에게 많이 배웠는데...’
엄밀히 말해서, 자신이 원치는 않았지만 스승의 역할을 해준 마물들이다.
이성이 있는 자들.
어떨 땐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쾌하고 코믹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저들을 냉정하게 없앨 자신이 도저히 없었다.
무언가 친구 같은 느낌이 들었기도 했고 말이다.
크흐... 크흐윽...
쇳소리를 내며 힘들어하는 네르갈을 지그시 바라보던 스텔라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한동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그녀는 굳은 결심을 한 듯 눈을 부릅뜨더니, 세화에게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못하겠어요... 그럴 수 없어요...”
너 지금 마물에게 연민을 느끼는 거야?
“연민이 아니에요. 저 기사들은 인명피해를 입힌 적이 없어요. 오직 저와의 결투만을 위해서 나타났고, 결투가 끝나면 바로 물러났어요... 다, 다른 마물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 네가 그렇게 답할 줄 알고 있었어. 실력은 많이 늘었는데 마음이 여린 건 여전하네. 유리아 언니더러 대신 처리하라고 할게.
“네...? 안 돼요...! 그러지 마세...”
다급해진 스텔라가 세화를 만류하려고 할 때,
쐐애애액!
하늘에서부터 공기를 찢어발기는 파공성이 들려왔다.
유리아가 쏜 화살이 네르갈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네르갈의 갑주 방어력이 아무리 튼튼해도, 그 속에 있는 얼굴은 튼튼하지 않을 것이다.
정확도가 경이로운 유리아의 화살은 100퍼센트 확률로 네르갈의 투구 사이에 있는 빈 공간에 꽂힐 텐데, 현 네르갈은 그 화살을 피할 기력이 전혀 없다.
맞으면 무조건 사망 확정이다.
‘아, 안 돼...!’
다급해진 스텔라가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손을 놀렸다.
촤륵!
그러자 바닥에 떨어져있던 채찍이 살아 움직이면서 공중으로 솟구쳤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간 그 채찍의 날은,
카아앙!
화살의 몸통을 간신히 때려, 날아가는 경로를 반대로 틀었다.
화살이 하늘을 뚫어버릴 듯 높이 승천하는 것을 확인한 스텔라가 네르갈에게 소리쳤다.
“도, 도망가...!”
#$&@$?
“뭐라는 거야...! 도망가라구! 네가 사는 곳으로 가버려!”
.....
미동도 없는 네르갈.
아무리 기력이 없다고는 해도 포탈을 탈 정도는 남아있을 텐데... 왜 가만히 있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스텔라가 거의 호소하다시피 하며 말했다.
“제발 도망쳐...! 제발...!”
그럼에도 네르갈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보였다.
겸허히 죽음을 맞이하려고 하는 듯한 모습.
그에 엄청난 답답함을 느낀 스텔라가 재차 소리를 지르려고 할 때였다.
쩌어억!
네르갈의 옆에서 마물들만의 포탈이 열리더니, 빨간색과 검은색의 우람한 손이 불쑥 튀어나오면서 네르갈의 팔과 군마의 고삐를 잡았다.
그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둘을 끌고 사라졌다.
‘아...!’
다르닐, 그리고 베르그가 네르갈을 데리고 갔구나.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그러면 왜 유리아가 화살을 쏠 때 포탈을 열지 않았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말 다행이었다.
안도하던 스텔라가 돌연 침을 꼴깍 삼켰다.
눈앞에서 세화가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텔라는 땅으로 내려온 세화가 자신의 코앞까지 걸어오자 바짝 긴장해 몸이 굳어버렸다.
정말 크게 혼이 날 것이다.
어쩌면 뺨을 맞을 수도 있었다.
지구를 위협하기에 충분한 S급 마물을 죽일 수 있는 찬스를 스스로 걷어차고, 심지어는 그냥 보내주기까지 해버렸으니까.
‘어쩔 수 없어... 내가 감수해야 돼...’
그리 생각한 스텔라는 정색하고 있는 세화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처분을 기다렸다.
가라앉은 눈으로 스텔라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세화.
이윽고 그녀의 입이 열렸다.
“미치겠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 죄송합니다...”
“잘못한 건 알고 있어?”
“.....”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무엇을 말한들, 세화에겐 변명으로 들릴 것이다.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러니 그냥 가만히 있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이리와.”
세화가 스텔라의 몸을 지그시 껴안았다.
스텔라의 입이 벌어졌다.
지금 자신을 포옹한 건가?
잘한 게 하나도 없는데 대체 왜?
믿어지지 않는 상황에 눈동자를 데굴 굴리던 스텔라는, 이어지는 세화의 말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우리 스텔라... 물러 터져가지고... 어떡하면 좋니...”
책망하는 말투가 전혀 아니다.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고 있는 듯한... 그런 인자함이 담겨있는 말투였다.
가슴속에 맺혀있던 응어리가 풀어지는 느낌이 난다.
긴장이 확 풀려버린 스텔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저는... 흐윽... 죽일 수 없었어요... 죄송합니다... 허어어어엉... 죄소해여... 흐아아앙!”
대성통곡을 하며 사과만 반복하는 스텔라.
힘없는 웃음을 터뜨린 세화는, 말없이 스텔라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
“스텔라는 정이 많은 사람이야. 냉정하게 대하려다가도 저 순둥한 얼굴을 보면 그럴 수가 없어져.”
세화의 말에, 본부 상황판에 앉아있던 나는 흘끗 휴게실을 쳐다보았다.
아델에게 위로를 받으며 훌쩍거리고 있는 스텔라가 보인다.
아직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구나.
마물을 그냥 보낸 부분에 대해서.
“애가 많이 순하긴 하지.”
“알렉산더인가 뭔가 하는 애를 만나게 할 생각 아니었어? 마물을 보내준 지금 저 상태로 만나게 했다가는 멘탈만 더 부서질 텐데... 어쩌려고 그래?”
“마물을 보내준 것과 동생이 범죄조직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달라서 괜찮아. 전자가 죄책감이라면, 후자는 배신감이지. 결과적으로 스텔라는 더욱 굳건한 정신력을 갖게 될 거야. 처음엔 엄청 힘들어하겠지만.”
“그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싫은데... 며칠 말미를 두고 진정이 될 때까지 기다리면 안 돼?”
세화가 여태까지 이렇게 강력하게 주장을 한 적이 있던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스텔라를 정말 아끼고 있는 듯한데, 다른 아내들도 세화와 마찬가지라서 질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그럴 생각이야. 악의만 크게 키워놓으면 나머진 시간이 해결해주니까, 일이 끝나면 잘 위로해줘.”
“응.”
세화와의 대화를 마친 나는 휴게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아델이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스텔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물러났다.
그리고 스텔라는, 띵띵 부은 눈으로 날 보더니 그대로 달려들어 안겨왔다.
“오빠아...”
정말, 진심으로 미안했나보다.
아직까지 울음을 못 그칠 정도면.
스텔라의 엉덩이를 토닥여주자, 그녀가 날 올려다보며 물었다.
“흐으윽... 기사들은 날 죽이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그래서 나도 똑같이 한 것뿐인데... 내가... 내가 나쁜 거야...?”
“아니, 잘했어.”
“그런 거지...? 나 잘했지...? 내가 옳은 판단을 한 거 맞지이...?”
“응. 너답게 대처했어. 세화는 뭐래?”
“.... 그냥... 이해한다고... 하셨어... 잘했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유, 유리아 선배님은 뭐라셔...? 내가... 네르갈을 도망치게 하려고 공격까지 막았는데... 화내지는 않으셨어...?”
“유리아 씨도 세화와 똑같은 의견이야. 정 불안하면 직접 말해봐.”
“무, 무서운데...”
말투를 들어보니, 동료들에게 밉보일까 걱정하는 것 같다.
너는 모두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는 막내란다.
네가 걱정하는 일 따윈 절대 일어나지 않아.
“지레 겁부터 먹으면 유리아 씨도 실망할 걸?”
“.... 알았어... 근데 오빠... 오빠를 습격한 사람들 그거... 들었지?”
“응. 박사님한테 들었어.”
“나도 가면 안 돼...? 실비아 선배님께서 나중에 얘기하자고 하셨는데... 오늘 내가 잘못을 저질러서... 왠지 허락해주지 않으실 것 같아...”
무조건 허락할 거야.
이번 사건 때문에 약간 미덥지 못한 척은 하겠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러니까 마음을 추스르는데 집중하렴.
“굳이 가야겠어?”
“꼭 가고 싶어... 오빠랑 가장 가까운 사이인데 빠질 수는 없다고 생각해... 어, 어차피 사람이잖아... 마물들보다 훨씬 쉬운 상대야...”
은연중으로 인간을 무시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서 쉬자.”
“응...”
“그 기사를 보내준 건 후회하지 않아?”
“.... 후회하지 않아... 내가 잘못한 건 맞다고 생각하지만... 다시 그 상황이 온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거야...”
단호하구나. 소신 있어.
이 정도라면 스텔라가 타락한 후, 3기사를 그녀의 호위로 둬도 되겠다.
스텔라도, 3기사도 좋아할 테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