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7화 〉 송지혁 없이는 못살아
* * *
“너 좀 서운하다? 너한테 급한 일이 있는 걸 왜 보영이한테 들어야 되냐?”
“죄송합니다. 그때 진짜 급해서... 보영이 누나한테도 문자로만 남겨놓은 거예요.”
“지금은? 잘 해결됐고?”
“이제부터 해결해야죠. 이틀이면 될 것 같아요.”
한숨을 푸욱 내쉰 최승환이 손을 내밀었다.
“그래... 차키 줘.”
“예. 임시 매니저는 어디 있나요?”
“지금 오고 있어. 내가 씨... 하아... 그래도 경력 있는 매니저로 땜빵하려고 얼마나 뛰어다닌 줄 아냐? 지금 매니저가 구인난이란다.”
월급은 쥐 좆만 하고, 쉬는 시간도 거의 없는데 누가 하려고 하겠냐...
나 같은 경우는 실세인 보영 덕에 편하지만, 다른 매니저들은 다르다.
이 바닥에서 버티는 매니저들은 존경해도 된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됐고, 일이나 잘 처리하고 와. 이틀이면 된다고 했지?”
“예.”
“스텔라는? 보영이랑 같이 있나?”
“네. 보영이 누나랑 같이 스케줄 소화하고 있어요.”
“이야... 채보영이 걔가 스텔라를 아끼긴 진짜 아끼나보다. 사적인 시간도 내서 케어해줄 정도면. 그치 않냐?”
뭐... 앞으로 왕비님으로 모셔야할 사람이니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러네요.”
“그래서 말인데... 차라리 보영이한테 스텔라를 맡기는 게 좋지 않겠어? 네가 한 번 말해볼래?”
“매니저 이미 구하셨다면서요.”
“아니... 어차피 땜빵 끝나고 다시 돌아갈 사람인데 보영이가 하면 더 좋잖아.”
“말해볼까요?”
“됐다, 됐어. 네가 말하면 보영이가 나한테 와서 또 바가지를 긁어댈 거야.”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요즘 최승환의 대가리가 약간 이상해진 것 같은데 착각인가?
여기저기서 스텔라를 섭외하려고 하니 정신이 피곤한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웃는 낯으로 놈에게 인사를 한 나는, 천희주에게 다가가 말했다.
“나 없는 동안 스텔라 잘 챙겨줘.”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해결해.”
“고마워, 누나. 나중에 밥 살게.”
“진짜?”
“진짜.”
까르르거리며 좋아하는 천희주를 뒤로하고, 나는 소속사를 나왔다.
한창 스케줄을 하고 있는 스텔라에게 톡을 남겨놓고 기지개를 켰다.
햇살이 밝다. 이제부터 잠깐 자유의 몸인데 뭘 할까?
라고 생각하던 찰나, 박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응.”
통화 가능해?
“가능해.”
저번에 말했던 그 전투요원 명단 있잖아. 그걸 알아보다가 발견했는데, 모든 국가의 중추시설에서 인사이동이 알음알음 일어나고 있어.
“인사이동?”
응. 대상은 대부분 내근 직원들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지?
박사의 설명을 들은 나는 눈을 빛냈다.
모든 조직엔 내근직이 필요하다.
이는 세계연합이 새로이 만든 조직도 똑같다.
과학자, 전투요원, 비스트 슬레이어만으로는 그곳을 운영할 수 없다.
다양한 역할의 내근 직원들이 있어야 본부의 정보를 공유 받고 조직에 흡수시킬 것 아닌가?
그러니 세계연합은 뒤가 깨끗한 사람들을 추려 조직으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설립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으니까.
“의외네. 그 정도는 이미 끝내놨을 줄 알았는데.”
비밀리에 움직이다보니 조심스러웠던 거겠지. 그리고 세계연합이 내근직을 모으고 있다는 건, 아이테르 연구가 완전히 끝났다는 뜻과도 같아.
“그렇지.”
일단 내가 알아낸 건 여기까지야. 더 알아볼게.
“응, 고마워.”
전화를 끊은 나는 마르셀라와 매디슨에게 문자를 남겨놓았다.
‘미국으로 가야겠다.’
박사의 정보 수집이 원활할 수 있도록, 한 명의 스파이를 더 만들어야겠어.
인사이동이 일어나는 지금이 딱 적기이기도 하니, 바로 움직이자.
**
내근직원을 스파이로 만들 수 있다면 아주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복제 아이테르에 어떠한 능력이 있는지는 미지수다.
아델처럼 마기를 감지하고 정화시킬 수도, 아니면 세화처럼 강한 힘만 주고 끝날 수도 있다.
내가 우려하는 건 전자.
로사리오의 신성력이 복제 아이테르에 깃드는 것.
만약 스파이가 비밀조직 침투에 성공했는데, 복제 아이테르의 적합자에게 마기를 감지당한다면?
우리가 했다는 건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세계연합은 극도의 경계상태로 돌입하게 될 것이 뻔하다.
안 그래도 비밀이 많아서 캐내기가 힘든데, 여기서 더 꽁꽁 숨어버리면 짜증이 나잖은가.
그래서 마르셀라의 기계가 필요한 것이다.
이를 이용해 내근직원을 세뇌하여 수하로 만드는 거다.
악의를 집어넣는 건 위험요소가 너무 크고, 구원진리교를 포교하기엔 포교된다는 보장이 없었거니와 시간도 많이 걸린다.
하지만 마르셀라의 기계라면? 시간도 단축되고 위험부담도 최소화할 수 있다.
물론 세뇌장치가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조직에 들어가기 전의 적성검사나 정신 문제에서 뭔가 발견될 수도 있다.
쉽게 말하자면 이 또한 도박이고, 실패할 수도 있으니 전투요원 명단 수집은 계속 하고 있어야겠지.
‘그래도 앞선 방법보단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딱 한 명만 세뇌시키고 비밀조직 투입에 성공한다면 앞으로의 일이 굉장히 순탄해질 터.
마르셀라의 실력을 믿기도 하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주인님.”
약속장소에 앉아 핫도그를 우걱우걱 처먹고 있던 나는, 뒤에서 매디슨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옆에 앉아.”
“네.”
또각거리는 구두소리와 함께 내 앞으로 온 메디슨은 베이지색의 트렌치 코트를 입고 있었다.
겉보기엔 평범하... 진 않고, 뉴욕에서 잘 나가는 세련된 직장인처럼 보였다.
스파이답지 않게 눈에 띄는 외모이긴 하지만 선글라스로 가렸고, 이곳은 한국과 달리 밤인데다 근처에 인적이 전혀 없어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마치 연인인 양 나와 바짝 붙어 앉은 매디슨이 서류 몇 장을 꺼냈다.
“주인님께서 말씀하신 인간들의 정보입니다.”
서류를 보니 세 명의 인간들의 정보가 사진과 함께 쓰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국방, 치안, 사법, 정보, 외교기관 등의 중추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주 유망한, 소위 천재라고 불리는 인간들.
성별은 당연히 내 모토대로 여자였다.
젊고 예쁜 건 기본 옵션이고 말이다.
그녀들의 이력을 살펴본 내가 물었다.
“자연스럽게 유인할 수 있나?”
“한 명은 가능하지만... 나머지 두 명은 납치해야할 것 같습니다. 저와는 소속 자체가 달라요.”
“납치해야할 두 명이 누구지?”
그 말에 매디슨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서류상에 있는 두 명을 집었다.
“이렇게 둘입니다.”
“현재 위치는?”
“집에 있습니다. 주인님의 말씀대로 전부 독신인 여성들로만 추렸습니다.”
내일 출근해야할 테니, 일단 한 명만 데려와야겠다.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맞은편의 허름한 건물을 가리켰다.
“이 중에서 한 명을 먼저 데려와야겠다. 너는 저 창고에 들러라. 마르셀라가 있으니 간략한 설명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네, 주인님.”
이제부터 힘을 좀 써야겠는데...
오랜만에 바삐 움직이는 것 같아서 좋다.
@@
“안녕하세요, 스텔라 씨. 이효섭입니다.”
보영과 헤어지고 소속사로 돌아온 스텔라는, 낯선 청년이 반갑게 인사를 해오자 흠칫했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오늘부터 임시매니저가 있을 거라는 말을 보영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저 분이...’
일단 인상은 합격점. 지혁의 발톱 때만큼도 안 되는 못생긴 외모지만, 순박하게 생겨서 성실할 것 같다.
아무렇게나 입은 옷과 덥수룩한 머리가 조금 답답해 보이긴 하는데, 일만 잘한다면야 뭐...
“안녕하세요? 스텔라 헤일리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틀간 제가 잘 모실게요. 스케줄 없으신 거 확인했는데, 댁으로 바로 모셔다드릴까요? 차키는 받아놨습니다.”
“네...? 저희 소속사 차로 이동하나요?”
“예...?”
당황스러워하는 이효섭.
스텔라는 자신의 실책을 알아차렸지만, 따로 정정하지는 않았다.
지혁과 자신만의 보금자리에 타인이 들어오는 것이 정말 싫어서였다.
특히 운전석... 지혁의 지정석인 그곳에 임시매니저가 탄다고?
끔찍하다. 죽어도 싫다.
재빨리 머리를 굴린 스텔라가 이효섭에게 양해를 구하고, 최승환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대표님, 대표님 차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갑자기? 왜?”
“아, 그게... 소속사 차량이 고장 난 것 같아서요... 지혁이 오빠가 오늘 아침에 데려다주면서 그랬는데, 브레이크가 잘 안 먹힌대요.”
“그래...? 그거 큰일이네. 잠깐만 있어봐.”
다행스럽게도, 최승환은 스텔라 자신의 말을 믿어주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최승환이 지혁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스텔라가 엄지손톱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 깨작깨작 물어뜯었다.
만약 지혁과의 통화내용에서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최승환은 자신의 사정을 잘 모르긴 하지만,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오빠... 제발...’
간절한 마음을 담아 지혁에게 보낸 스텔라는, 최승환이 통화를 시작하자 귀를 쫑긋했다.
“어, 지혁아. 일은 잘 해결하고 있냐? 그래? 다행이네... 다른 게 아니고, 소속사 차량 고장 났어? 여보세요? 내 말 들려?”
지혁이 침묵하고 있는 것 같다.
갑자기 고장 이야기를 꺼내서 혼란스러운 게 틀림없었다.
망했다 싶은 스텔라가 눈을 질끈 감으려고 할 때,
“아... 전체적으로 고장이 심해? 왜 얘기 안 했냐?”
최승환의 입에서부터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얘기했다고? 언제? 그래...? 난 왜 못 들은 것 같지? 아니... 야.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라? 아는 형님이 새 차 같은 중고 준다길래 업어온 거야. 잔소리는... 뭐? 뭘 어떡해? 일단 내 차 쓰라고 해야지. 스텔라가 말해주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네. 알았어. 수고하고.”
스텔라의 낯빛이 더 이상 밝아지지 못할 정도로 확 펴졌다.
최승환의 말을 들어보니, 지혁은 방금 침묵했던 그 짧은 시간에 모든 전말을 파악한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마음이 통했구나! 역시 지혁은 사려가 깊은 최고의 사람이다!
전화를 끊은 최승환이 서랍을 뒤적거리더니 차키를 꺼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이효섭에게 내밀었다.
“매니저가 말하는데 차가 전체적으로 맛탱이가 갔다네? 미안한데 오늘은 내 차 타고 가라. 밴 옆에 주차되어있어. 먼저 대기하고 있을래?”
“그럴게요. 말씀 나누시고 천천히 내려오세요.”
공손히 인사를 한 이효섭이 소속사를 나갔다.
문이 짤랑거리며 닫히는 것을 확인한 스텔라는, 내일 스케줄을 설명해주려는 최승환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해요, 대표님! 저 진짜 열심히 해서, 대표님한테 자동차 선물해드릴게요!”
순식간에 싹싹해진 스텔라의 태도.
최승환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마음가짐 좋다. 우리 같이 열심히 해보자고. 내일은 방송국에 가자마자, 효섭이가 작가들한테...”
보영에게 대강이나마 들은 내용이었지만, 스텔라는 행여나 최승환이 기분 나빠할라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 오케이, 여기까지. 이해했지?”
“네.”
“피곤할 텐데 얼른 집에 가서 쉬어. 오늘 수고 많았다.”
“대표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희주 언니, 저 가볼게요!”
두 명에게 작별인사를 한 스텔라가 밖으로 나오자,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이효섭이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소속사 앞에 있는 팬들에게 간단하게 손을 흔들어준 스텔라는, 조신한 몸짓으로 차에 탔다.
그러자 운전석에 앉은 이효섭이 비닐봉지를 뒤적거리더니, 스텔라에게 모과차를 내밀었다.
“이거 드세요.”
스텔라의 미간이 이효섭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약간 구겨졌다.
“모과차네요...?”
“네. 기존 매니저가 매일 모과차를 줬다고...”
“아 진짜요...? 누가 그래요?”
“채보영 씨가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지혁이 보영에게 말을 하고, 보영은 또 이효섭에게 그 말을 전달했다는 건데...
짜증이 확 올라온다.
지혁은 왜 둘만의 비밀스런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다닌다는 말인가.
물론 자신의 목 상태를 걱정해서 말했겠지만, 서운하다.
억지웃음을 지어낸 스텔라가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요. 안 마실게요.”
“그럼 매실차나 생강차라도 사올까요?”
“아뇨. 바로 돌아갈게요.”
“네, 차 온도는 괜찮으세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가고 싶은데, 질문이 너무 많다.
잠깐 텀을 둔 스텔라가 대답했다.
“좋아요. 감사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출발할게요. 아,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저랑 동갑이에요.”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스텔라는 그냥 어색하게 웃어주기만 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곧이어 움직이기 시작하는 최승환의 자동차.
창문 밖을 바라보던 스텔라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벌써부터 지혁의 모습이 아른거리는데, 내일은 어떻게 버틸지...
이효섭과 함께 움직인다고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나오려고 한다.
‘진짜 싫다아...’
차 안에서 희미하게 풍기는 담배 냄새도 싫고, 이효섭의 몸에서 나는 약간의 땀 냄새는 특히나 더 싫었다.
방금까진 기분이 정말 좋았었는데... 왜 이럴까?
이게 다 모과차 때문이다.
돌아가서 잠깐 지혁을 만날 수 있으면, 이에 대해서 당당히 따져야겠다.
아니, 생각은 이렇게 해도 지혁을 만나면 헤벌쭉해져선 그의 품에 안기겠지.
‘담요도 없고... 춥고... 배고파아...’
지혁이 만들어주는 베이컨 샌드위치를 먹고 싶다.
남몰래 입맛을 다신 스텔라는 긴 속눈썹을 아래로 내렸다.
잠이나 자려고 노력하자. 집에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