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2화 〉 조금 황당한 세 번째 결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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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까지 마쳤고, 지혁과 좋은 분위기 속에서 야릇한 일을 하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마물이라니... 하필 이 때 마물이 나타나다니...!
성질이 뻗친다. 마구 쏟아지는 비도 화가 나는 요소 중에서 큰 축을 차지했다.
슈트는 방수가 되긴 한다.
하지만 얼굴과 머리, 그리고 드러난 맨다리는 아니었다.
날아가면서 허벅지 뒤쪽 부분에 빗방울이 닿아 묘한 느낌을 일으키는 건 덤.
오늘 전투가 끝나면 지혁에게 슈트를 다시 제작해달라고 말해봐야겠다.
속으로 계속 꿍얼거린 스텔라는 마물이 나타나려는 장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응...?”
먼저 출발했을 거라던 세화가 보이질 않았다.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
기다란 나무가 촘촘하게 박혀있는 나무가 즐비한 이 산엔 자신, 그리고 징그럽게 열리려는 마물 포탈밖에는 없었다.
‘아직 주무시고 계시는 건가...?’
쏴아아아! 투둑! 투둑!
빗방울이 이파리를 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비바람이 매우 차다. 뭔가... 무섭다.
고오오오...!
마물의 아가리에서부터 괴이한 소리가 들려오자, 스텔라가 어깨를 움찔했다.
“히익!”
뭐 저리 징그럽게 생겼는지...
안 그래도 꾸덕한 산의 분위기가 저것 때문에 더욱 음침해졌다.
꿀꺽.
목젖을 크게 꿀렁거린 그녀는 무기를 들고 자세를 잡았다.
만약 마물이 나타났는데, 세화를 비롯한 동료들이 도착하지 않았으면 어쩌지?
혼자 싸워야하나?
머릿속에서 온갖 고민을 하던 스텔라는,
쩌어어억!
마물의 아가리가 큼지막하게 벌어지자 잡념을 날려버렸다.
침착해야했다. 지금은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
화아악!
포탈과 마주선 스텔라에게로 악의가 가득한 바람이 빗발쳤다.
비바람을 반대로 날려버릴 정도로 강맹한 강풍.
그것을 정면에서 마주한 스텔라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바짝 긴장한 채 채찍을 꼬나쥐었다.
포탈 안에서부터 칠흑과도 같은 갑주를 두른 기수가 검은 기운을 줄줄 뿜어내며 천천히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압도적으로 강해보이는 외관. 심지어는 타고 있는 군마마저도 무섭게 생겼다.
스텔라 자신의 몸에서 발산하는 빛 외엔 아무것도 없는 깜깜한 산이라서 위압감이 더해지는 것도 같다.
생김새는 예전에 나타났던 적기수, 청기수와 흡사했다.
그렇다면 이 흑기수는 그들의 동료임이 확실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긴장이 아주 약간 풀렸다.
또 다시 자신에게 결투를 요청할 것 같아서였다.
다만 흑기수의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무서운 건 여전했다.
꽈아악...!
채찍을 쥔 스텔라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흑기수가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
흑기수의 목소리를 들은 스텔라의 미간이 좁혀졌다.
쇠를 긁는 것 같은... 너무나도 듣기 싫은 목소리였다.
한 차례 심호흡을 하여 마음을 안정시킨 스텔라가 물었다.
“겨, 결투하자는 거지...?”
@&!#$&@#.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지만, 결투를 하자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손을 내민 채로 가만히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예상했던 행동에 저도 모르게 안심한 스텔라가 말했다.
“알았어... 하면 되잖아... 그러니까 무섭게 굴지 말아줄래?”
#!&@*$?
“뭐라는 건지 잘 모르겠어... 지금 질문을 하는 거야? 지구의 언어로 말해주면 안 돼? 아니면 그냥 조용히 해... 목소리가 너무 소름끼쳐...”
&!*@$ #$&@#.
“응...? 뭐라고?”
#$&@#.
통하지 않는 대화를 이어나가던 스텔라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흑기수의 음성에서 반복되는 패턴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 &!*@$ ‘#$&@#’.
자세히 들어보니 발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집중해서 들어보자.
‘#$&@#’.
“다... 르...”
‘@#’.
“니르...? 닐...? 다르닐?”
흑기수의 투구가 위아래로 한 차례 흔들렸다.
긍정의 표시였다.
큼지막한 두 눈을 끔벅거린 스텔라가 물었다.
“다르닐...? 이름이 다르닐이야?”
@*#.
그렇다고 말하는 게 분명했다.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를 이해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낀 스텔라.
자신도 소개를 하는 것이 예의라는 생각이 든 그녀가 왼손을 가슴에 얹었다.
“나는 ‘스텔라 헤일리’라고 해. 스텔라 헤일리.”
스$$@#$ 헤!&$@?
오... 알아듣는 것 같다.
천천히 말해주자.
“스, 텔, 라, 헤, 일, 리.”
스테...ㄹ... 라... 헤... 리...
“받침 발음이 잘 안 돼? 다시 말해줄게. 스텔라, 헤일리.”
스테라... 헤리...
귀찮았는지 제 식대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다르닐.
제 이름에 들어가는 ‘닐’ 자는 잘만 발음했으면서, 서운하게 하고 있다.
그나저나 스테라는 그렇다 치고, 묵음처리는 대체 왜 하는 건데.
마음에 들진 않지만 뭐... 나름 비슷하게 발음했으니까 대충 넘어가야겠다.
언젠가는 잘 부르겠지.
자포자기한 스텔라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다르닐이 음산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그리고는 언성을 높였다.
스테라 헤리... #*, 다르닐#@ @#** !$#@!...!
스텔라 헤일리. 나, 다르닐이 결투를 신청한다.
라는 말을 하고 있는 거겠지?
기사들이 하는 대사가 다 그렇지 뭐...
그나저나 이러다가 마계의 언어를 다 이해하게 되는 거 아닌가 몰라.
라고 생각한 스텔라가 힘없이 답했다.
“그래... 싸우자... 싸우려고 왔잖아... 싸워야지...”
스스스...
스텔라의 대답을 이해한 것일까?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르닐이 뻗은 오른손 아래에 검은 기운이 몰려들었다.
그 후 꿀럭거리며 점점 어떠한 물건의 모습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텔라는, 완성되어 다르닐의 손에 들려진 그 물건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저울...?’
다르닐이 든 것은 검은색의 자그마한 저울이었다.
오랜 옛날 사람들이 사용했던 양팔저울 말이다.
무시무시한 외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깜찍한 무기.
어안이 벙벙해진 스텔라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저기... 그, 그걸로 싸울 거야...?”
요요처럼 빙글빙글 돌리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던지기...? 이도 아니라면 뭐 대상의 몸무게를 늘린다던가... 이런 건가?
뭔가 웃고 싶은데... 웃으면 기분 나빠하려나...?
이름을 알려준 것도 그렇고, 지금 소환한 무기도 그렇고...
목소리는 재수 없는데다, 지혁과의 야시시한 분위기마저도 깬 녀석이지만... 어쩌면 지금까지 만난 마물들 중에서 가장 정감이 갈지도...?
헌데 지금 자신이 뭘 하는 걸까?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살 수 없는 적의 언어를 이해했다고 뿌듯해하기까지 한 것도 모자라, 열심히 통성명이나 하고 앉아있고...
어이가 없다. 이러다가 정이 들어버리는 건 아닐지 걱정될 지경이다.
‘안 돼...! 집중하자...!’
풀려버린 긴장의 끈을 다시 조이며 전의를 불태우려던 스텔라는,
사아아아아...!
“허억!”
저울에서 모래가 굴러다니는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주변의 나무들이 순식간에 삐쩍 말라비틀어지자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곧 푸스스 거리는 소리와 함께 먼지가 되어 사라진 나무들.
심지어 자신이 딛고 있었던 땅은 물론, 그 근처에 있는 식물들이 모조리 소멸했다.
범위 안의 생명력을 모조리 빨아들인 것 같은 느낌.
예상치도 못했던 흉악한 능력에 등골이 오싹해진 스텔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정감이 간다는 건 취소다.
저놈은 적기수, 청기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악독한 녀석이 분명하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최악의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
전투기를 높은 상공에서 호버링시킨 나는 스텔라와 다르닐의 결투를 쭉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에 통성명을 할 땐 빵 터져버렸다.
두 사람이 서로의 이름을 알려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양립할 수 없는 적과 대화의 물꼬를 트게 한 건 아주 칭찬할만하다.
이건 오직 다르닐의 공이었다.
음습한 놈이 자신의 이름까지 밝혀가며 메소드 연기를 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어지간히 살고 싶었나보다.
어쨌거나 스텔라는 결투가 시작된 지 30분이 지난 지금까지 아주 잘 싸우고 있었다.
머리 전체를 가린 갑주의 특징을 생각해서, 다르닐이 볼 수 없는 사각에서 과감하게 공격을 감행했다.
일부러 군마의 이동이 불편한 땅에서 싸우는 것 또한 플러스 요소 중 하나.
은닉할 장소가 없는 공중에서 싸웠다면, 스텔라는 이미 다르닐의 특수한 능력에 당해버렸을 터였다.
지형지물과 무기의 특성 또한 잘 활용했다.
기둥이 넓은 나무 뒤에서 다르닐의 시야를 가리고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채찍으로 원거리 공격을 쏟아 붓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날 정도였다.
다르닐의 능력이 능력이라 그다지 큰 효과는 보고 있지 않았지만 말이다.
밤과 비 때문에 제한된 시야, 지원이 없다는 심리적인 압박감, 처음 보는 능력...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겁을 먹었던 초반과는 완전히 딴판.
성장했다는 게 확실히 보였다.
그리고 세화 또한 나와 똑같이 생각한 듯했다.
흑기수가 봐주고 있다는 걸 감안해도 실력이 많이 는 게 눈에 보여. 지금도 싸우면서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고. 이정도면 A급 마물과 붙어도 밀리지 않겠는데?
다른 아내들과 함께 멀리서 몸을 숨기고 있던 그녀의 감상평.
뒤이어 아델의 개구쟁이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쭉쭉 성장하는 우리 막내 로제... 가 아니라, 스테라 헤리를 보니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나오려고 해요.
다르닐의 발음을 따라하는 게 웃기다.
이걸 가지고 스텔라를 놀려대겠구나. 눈에 훤하다.
실소를 터뜨린 나는 다시 다르닐과 스텔라의 결투에 집중했다.
짧게 끝내라는 내 명령이 있었기에, 적당히 스텔라와 어울려주던 다르닐은 본격적으로 이빨을 드러냈다.
유려하게 움직이는 채찍 끄트머리를 뛰어난 동체시력으로 잡아채고는 확 당겼던 것이다.
엇!?
당혹스런 탄성을 터뜨린 스텔라가 가공할 힘에 의해 몸의 중심을 잃고 앞으로 넘어졌다.
땅이 생긴 물웅덩이를 가르며 엄청난 속도로 끌려가는 가녀린 몸.
순백색의 머리카락과 슈트가 질척한 진흙으로 더러워지는 게 안타까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꼴린다.
이익...!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은 스텔라가 채찍 손잡이에 주렁주렁 달린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다르닐이 잡고 있는 채찍의 상단부가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분해되었다.
그렇게 몸의 자유를 되찾은 스텔라는 재빨리 일어나 허리춤에서 수류탄을 꺼내 던졌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발과 함께 사방팔방으로 튀는 진흙.
서로의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탄 스텔라는, 멀찍이 떨어진 초목이 무성한 곳으로 몸을 숨기고 숨을 고르며 장비를 체크했다.
하아... 하아... 음파진동수류탄 두 개... 그리고...
옷과 머리는 물론 얼굴까지 더러워졌음에도 개의치 않아 하고 있다.
왜 지원이 오지 않는지 의아해하는 모습도 없다.
오로지 다르닐과의 결투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증거. 기특해서 깨물어주고 싶다.
빨리 돌아가서 예뻐해 줘야지.
사아아아...!
스텔라의 근처에서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
눈을 부릅뜬 그녀가 팔을 휘두르자, 채찍이 소리가 난 쪽으로 매섭게 쇄도했다.
퍼석! 카앙!
나무를 종이마냥 뚫고 튀어나가 다르닐을 맞춘 채찍.
좋은 시도였지만 안타깝게도, 공격은 살짝 빗겨나가 견갑을 조금 부서뜨리는데 그쳤다.
푸르륵! 푸륵!
주인이 공격에 당하여 성질이 난 걸까?
다르닐이 탄 군마가 투레질을 하며 앞발을 들어올렸다.
그 틈을 타 다시금 거리를 쫙 벌린 스텔라는 다르닐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그러다가 그가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소리쳤다.
너 지금 날 봐주는 거야!?
.....
대답해! 날 얕보고 있는 거지!?
꽥꽥 소리를 질러대니 귀가 아프군. 약자들이 자신의 힘이 들통 나는 것을 감추기 위해 허세를 부리고는 하지.
방금 말은 스텔라가 이해했다면 상당히 화냈겠는데?
무, 뭐라는 거야...! 길게 말하지 마! 이해가 안 된다구!
스테라 헤리.
뭐! 왜!
그래도 듣던 것보다는 강하구나. 오늘은 이만하겠다.
호의적인 투로 그리 말한 다르닐이 부서진 갑주를 집어 들더니, 스텔라의 발 앞으로 휙 던졌다.
그리고는 말고삐를 돌려 포탈을 타고 사라졌다.
쏴아아아!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줄기 특유의 소리만 들리는, 전투로 인해 황폐해진 산.
멍하니 다르닐이 사라진 자리를 쳐다보던 스텔라가 진흙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긴장이 확 사라져 다리에 힘이 풀린 듯했다.
.... 아파...
거의 울먹거리는 듯한 말투로 자신의 손목을 만지작거린 그녀는, 눈앞에 있는 견갑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것을 빤히 바라보는 스텔라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피어나있었다.
다르닐이 무슨 의미로 이것을 던져준 건지 눈치챈 것이다.
강맹한 힘을 가진 적의 진심어린 인정을 받은 자신.
기쁘지 않을 수가 없겠지.
다음번엔 더 잘해보겠다는 승부욕 또한 생길 테고.
그래, 그렇게 정을 쌓아가는 거란다.
속으로 흐뭇해한 나는 전투기를 천천히 하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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