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8화 〉 스파이를 만드는 법 #2
* * *
내 밑에 깔려있는 여자의 몸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공포로 인해 몸을 오들오들 떠는 것이다.
아무리 빡센 훈련을 받았다고는 해도, 입에서 피를 주르륵 떨어뜨리는 인간을 보면 오한이 들지 않을 수 없지.
많이 마셔. 몸에 좋은 거야.
여자의 초점이 사방팔방으로 흔들리는 것을 확인한 나는 피로 범벅이 된 손을 떼어냈다.
그러자 여자가 구석으로 가더니, 난 신경도 쓰지 않고 입에 손을 넣어 강제로 토를 하려고 했다.
정신력이 강한 인간이라 그런지 떨어지는 속도가 꽤나 느리구나.
본능적으로 이건 무언가 잘못된 거라고 느끼는 걸 보면, 감과 판단력도 뛰어나다.
허나 그녀는 인간이다.
아무리 훌륭한 인재라고는 해도, 내가 직접 주입한 마기엔 버틸 수가 없을 터였다.
“끄윽...! 아, 안...”
금세 속 안으로 침투해 꿈틀거리는 마기에 잠식된 그녀의 입에서 힘겨운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미 땅에 떨어진 총을 허겁지겁 주우려던 그녀는,
“.....”
고개를 갸웃하더니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마치 방금 자신이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헷갈린다는 듯 말이다.
얼마간 혼란스러워하던 그녀는, 인기척이 들려오자 움찔하며 골목 밖을 바라보았다.
“거기 누구요...?”
긴장감이 가득한 중년인의 목소리.
옆집 주인이 나와 여자의 소란을 듣고 밖으로 나온 듯했다.
그의 손엔 호신용으로 으레 볼 수 있는 샷건이 들려있었다.
말투가 공격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저 위협용,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새어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으로 골목의 상황을 파악한 중년인.
벽에 등을 기대고 걸터앉아있는 나와, 땅에 손을 짚고 엎드린 여자를 본 그의 눈살이 찌푸려지려는 순간,
“지금 여기서 무슨 짓...”
푸슉!
조용하지만 강렬한 소리와 함께, 중년인의 이마에 얇은 구멍이 뚫렸다.
순식간에 흰자위를 드러내며 앞으로 풀썩 쓰러지는 그.
여자의 순간적인 판단으로 인한 일이었다.
요즘 착하게 살려는데 세상이 날 음해하는구나.
어깨를 으쓱인 내가 물었다.
“여기 오면서 지원을 요청한 게 있다면 지금 해제해.”
그 말에 여자가 품에서 자그마한 통신장치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는 여러 개의 버튼을 불규칙적으로 눌렀다.
“경보를 해제했습니다. 지원은 오지 않을 겁니다.”
“좋아. 이름?”
“매디슨 스완입니다.”
온 얼굴에 묻어있는 피를 지울 생각도 하지 않고 순종적으로, 그리고 절도 있게 대답하는 모습.
뭔가 무섭다.
“소속은?”
“비밀경호국 소속 경호원입니다.”
“누굴 경호하지?”
“육군미래사령부 사령관입니다.”
미래사령부라... 최근 떠오르고 있는 부서인데, 그곳 사령관의 경호원이라?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무리 중요인물을 경호한다고는 해도 비밀조직에 대한 보안을 철저하게 유지하고 있으니... 일개 경호원에게 단서를 알려주진 않았을 터다.
마력을 일으켜 중년인의 몸을 골목 구석으로 던져버린 내가 말했다.
“세계연합에서 비밀리에 조직을 하나 신설하고 있다던데, 혹시 아나?”
“잘 모릅니다.”
예상대로였다.
“근무는 펜타곤 내부에서 해?”
“네.”
“지금은 뭐하느라 나왔고?”
“교대 후 퇴근하는 중이었습니다.”
“집은?”
“근처입니다.”
“혼자 살아?”
“네.”
너무 로봇 같아서 무섭잖아.
감정이 메말라있는 것 같다.
훈련을 받은 요원과 마기의 조합은 영 어울리지 않았다.
“사령관과의 사이는 어떻지? 사무실에도 들어갈 수 있나?”
“가까운 편입니다. 평상시엔 출입이 가능하지만, 중요한 업무가 있다면 출입할 수 없습니다.
혹시 제게 맡기실 임무가 세계연합에서 신설 중인 비밀조직의 정보 수집인가요?”
수동적이기만 한 줄 알았더니, 나름 능동적인 면도 있다.
“그래.”
“사령관은 붙임성이 좋은 사람이라, 절 자신의 집으로 식사초대를 하고는 합니다. 사령관은 중요한 안건은 집에 있는 서재에서 처리하는 편인데, 그때 주인님께서 원하시는 정보를 얻어 보겠습니다. 주소는...”
사령관의 집 주소는 물론 그의 가족관계와 주변인물까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얘기하는 매디슨.
모진 고문을 당해도 입을 다물고 있어야할 중요한 신상정보가 그녀의 입에서 술술 나오고 있다.
마기는 참 편리한 힘이다.
너무 순종적이 되어버려서 문제지만.
“.... 이상입니다.”
“연락처 하나 남겨놓을 테니까, 뭐 알아낸 게 있으면 바로 보고해.”
“네. 만약 비밀조직에 대한 정보를 얻어낸다면 사령관은 제거할까요?”
“아니, 정부 쪽 인물들은 누구도 죽어선 안 돼. 세계연합에서 수상쩍은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여야한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엄지로 내 어깨 뒤를 가리켰다.
방금 죽은 중년인이 살던 집이었다.
“뒤처리 하고, 저기서 옷도 좀 갈아입고, 얼굴도 씻은 뒤에 돌아가. 사람 있으면 알아서 처리하고.”
“네.”
구석에 나자빠진 시체를 무감정한 눈빛으로 쳐다본 매디슨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중년인의 이마에 박힌 총알을 빼내기 시작했다.
능숙한 솜씨로 증거를 인멸한 그녀는 곧 망설임 없이 중년인이 살던 집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우리 덜렁이는 왜 연락도 없나.
한 시간마다 연락한다더니... 서운하게.
@@
머리가 너무 띵하고, 제대로 된 생각을 못하겠다.
동료들이 너무 잘해주니 흥이 돋아서, 술을 주는 대로 마셨더니 이렇게 됐다.
거의 해본 적 없던 술도 제대로 마셔보니 너무 달았고 말이다.
‘어지러워...’
지혁에게 연락을 해야 한다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린 스텔라는, 지금 어느 장소에 누워있었다.
시뻘개진 얼굴로 거친 호흡을 내뱉던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 아델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오자 헤실헤실 웃었다.
“선배니임...! 여기 어디에요...?”
“여기? 네가 좋다고 했잖아. 우리 막내... 많이 취했구나.”
“네에... 저 취한 것 같아요...!”
“여기가 어디인지 알고 싶어?”
“알고 싶어요... 얼른 알려주세요...!”
앙탈을 부리는 모습이 귀여웠는지 까르르거리는 아델.
스텔라의 양 볼을 꾸욱 꾹 누르던 그녀가 대답했다.
“여긴 네 겉모습을 깨끗하게 해줄 신성한 곳이야.”
“그게 무슨 뜻이에요...?”
“네가 지혁 씨에게 더 큰 예쁨을 받기 위한 장소지. 기다려보면 알아.”
“그래요...?”
수상쩍기 그지없지만 지혁에게 더 큰 예쁨을 받을 수만 있다면야 뭐... 잠자코 기다리자.
그리 생각한 스텔라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편안하기 그지없는 침대 위에 누워있는 자신, 향긋한 냄새가 퍼지는 방 안.
그리고 선반 위에 있는 여러 종류의 물품.
그것들에 호기심을 보인 스텔라가 물었다.
“저건 뭐에요...? 스파츌라인가요? 메이크업할 때 쓰는 거랑은 조금 다른데... 뭐에 쓰는 거예요?”
“기다리면 알 수 있을 거라고 했잖니.”
“네... 그럴게요... 그런데 선배님, 다른 선배님들은 어디 계세요?”
“다른 사람들? 전부 집으로 돌아갔어.”
“아하... 그런데 선배님, 선배님은 왜 집에 안 가셨어요?”
“당연히 너랑 같이 있으려고 그러지. 다른 사람들은 우리 막내를 제대로 챙겨주지도 않는데, 나는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최고지? 다른 선배들보다 내가 더 좋지?”
스텔라의 눈가가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아델의 감정은 너무 알기가 쉬웠다.
현대사회의 삭막함에 찌들지 않은 순수한 사람.
그래서 좋다. 아델이라는 사람이.
“네, 저는 아델라인 선배님이 제일 좋아요.”
망설임 없는 답에 푸흐흐 하며 웃는 아델.
뭔가 수상쩍어 보이는 웃음이었지만,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는 것만큼은 다 드러났다.
그렇게 만취한 상태에서 아델과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던 스텔라는,
똑똑.
절제된 노크소리가 들리자 흠칫했다.
곧이어 문이 열리더니 노출이 꽤 있는 옷차림을 한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여자가 들어와, 아델과 스텔라를 향해 상체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아델라인 님, 스텔라 님.”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여자.
화들짝 놀란 스텔라가 아델의 팔을 잡았다.
“서, 선배님...! 저분이 제 이름을 알아요...! 저는 저분을 처음 보는데...”
“아이 참... 네가 예약할 때 이름 말했잖아. 기억 안 나?”
“제가요...? 저는 전혀...”
“어휴... 우리 막내한테는 앞으로 술 같은 건 주지 말아야겠다. 자, 이제 시작할 테니까 얌전히 있어야 돼. 알았지?”
“네에...? 뭘 시작하는데요...?”
두 눈을 끔벅거리며 질문을 던지는 스텔라가 귀여웠을까?
아델이 스텔라의 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왁싱해도 좋다고 말했었잖니. 잘 참을 수 있지?”
왁싱...? 자신이 좋다고 했다고?
기억을 열심히 더듬어보았지만 무리다.
눈을 데굴 굴리는 스텔라가 안쓰러웠는지, 아델이 설명했다.
“지혁 씨는 아래가 깨끗한 여자를 좋아한다고 하니까, 네가 당장 가자고 했잖아.”
아... 자신이 그랬던가?
아델이 말한 거니까 사실이겠지.
그럼 저 사람은 왁싱샵의 직원인가보다.
‘왁싱...? 내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데, 뭔가 무섭다.
했던 말을 번복하고 싶지만, 지혁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니 용기가 난다.
이참에 그냥 받아보고, 아프면 그만해달라고 해야겠다.
헌데 보통 손님들에게 ‘님’이라는 호칭을 붙이나?
‘씨’가 정석 아니던가? 예의가 과해도 너무 과한 것 아닌가?
그 전에 샤워부터 하는 게 먼저 아닌지?
게다가 왁싱은 일대일로 받는 게 일반적인 일인 것 같은데, 아델은 마치 참관을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여러 의심을 하던 스텔라는,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이미 취할 대로 취해버려서 제대로 된 상황판단을 할 수 없었거니와, 자신이 믿고 있는 아델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델이라면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을 하지 않는다는 믿음.
그러한 생각이 스텔라의 가슴속에 깊이 박혀있었다.
‘아니... 잠깐만...’
이대로 그냥 넘어가면 안 될 일이 하나 있다.
미간을 좁힌 스텔라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선배님... 선배님께서 지혁이 오빠의 취향을 어떻게 아세요...?”
그 말에 아델의 눈동자가 일순 위아래로 움직였다.
자신의 실책을 알아차린 아델이 순식간에 핑계거리를 생각해냈다.
“내 말은, 대부분의 남자는 아래가 깨끗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뜻이었어.”
“그렇죠...?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거죠?”
“물론이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절대 아니야. 네가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발언을 했구나. 내가 미안해.”
“아, 아니에요... 제가 더 죄송해요. 선배님을 의심하면 안 되는데, 제 실책이에요.”
“우리 막내는 착해도 너무 착하구나. 용서해줄게. 자, 이거 꽉 붙들고 있어. 창피하면 눈을 감아도 되고, 나한테 말을 걸어도 돼.”
스텔라의 가슴께에 커다란 인형을 올려놓은 아델.
그녀가 침묵하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시작하셔요.”
“네, 그럼...”
여자는 곧 선반 위에서 왁싱에 필요한 물건을 꺼내 스텔라의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
“스텔라 님,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그러더니 스텔라가 입은 청바지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에 까무러칠 정도로 놀란 스텔라가 양팔로 허공을 마구 더듬었다.
본능적으로 지혁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 자리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남자가 없다는 것을 생각해낸 그녀는, 차선책으로 아델을 바라보았다.
“서, 선배님... 원래 이렇게 하는 거예요...? 안 씻어도 돼요...?”
“누워만 있으면 알아서 다 해주는 곳이야. 우리 막내 긴장했구나? 창피하지? 나도 처음엔 그랬어. 괜찮아. 옳지, 옳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아델의 손길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다소 안심한 스텔라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크롭 티를 입은 왁서의 하복부에 뭔가 보이는 것을.
문신인 것 같은데, 일부분만 보여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자유로운 세상이라지만 저쪽 부위에 새길 생각을 하다니...
자신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라 존경스럽기까지 할 정도다.
그나저나 방에 있는 향에 알코올 같은 거라도 섞여있나?
안 그래도 어지럽던 머리가 더욱 빙글빙글 돈다.
구름 위를 노니는 것처럼 몽롱하기까지 하다.
‘아... 몰라...’
향에 흠뻑 취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스텔라는 아델이 준 인형을 힘껏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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