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0화 〉 새하얀 도화지에 번진 빨간 선혈 #3
* * *
“팬들이 걱정 많이 했습니다. 괴물이 나타난 곳에 마침 딱 계셔서 큰 사고로 이어진 게 아닐까 하고요. 혹시 그때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어... 일단은 엄청 무서웠어요. 괴물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시퍼런 빔 같은 게 절벽을 완전 박살내면서 해안도로까지 무너뜨렸고, 그렇게 밴이 뒤집혔어요.”
“밴이 뒤집혔다? 그런데도 경상에 그쳤다는 말씀이신가요? 정말 천운이네요.”
“부모님께서 튼튼한 몸을 물려주셔서요...”
훌륭하게 넘어갔다.
마물과 얼굴을 맞대고 싸우기까지 했던 스텔라였는데, 거짓말을 하는 모습을 보니 웃기기도 했다.
스텔라는 처음 몇 번의 질문에 버벅거린 것을 제외하면 태연하게 잘 행동하고 있었다.
솔직히 들어가기 전에 내가 했던 스킨십 때문에 어버버거릴 줄 알았는데 예상외다.
그만큼 연예계 생활에 진심이라는 뜻이겠지.
아니면 내가 스텔라를 덜 만졌거나.
“하하! 긍정적인 모습이 정말 보기 좋네요. 뉴스도 나왔던데 보셨나요?”
“아뇨. 뉴스는 보진 못했어요.”
“그렇군요. 이제 잘 회복하고 돌아오셨는데, 다시 활발하게 활동하실 건가요?”
“신인인 만큼 그래야죠. 먼저 기다려주신 팬 분들께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질문과 답변이 이어진지 1시간.
MC의 마무리 멘트가 끝나자마자, 스텔라는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내가 건네주는 가디건을 입은 그녀가 물었다.
“나 잘했어?”
“무난했어.”
“그냥 무난하기만 했어?”
기대감이 잔뜩 서려있는 눈빛.
사사건건 내게 기대고,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은 저 행동이 기꺼워서 미치겠다.
말없이 스텔라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그녀의 입꼬리가 축 쳐졌다.
“왜 대답 안 해? 별로여서 그래?”
“아냐. 잘했어.”
“마지못한 듯이 말하네...?”
“정말 잘했으니까 말하는 거지.”
“거짓말.”
“거짓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데?”
“오빠 나 속였잖아. 그것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비스트 슬레이어로 변신하기 전의 일을 말함이었다.
사실 그것 외에도, 내 인생 자체가 거짓말로 점철되어있기는 한데...
저렇게 말하니까 할 말이 없어진다.
입맛을 다신 내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말다툼하려는 거야? 난 하기 싫은데.”
“나, 나도 하기 싫거든...? 그냥...”
“그냥?”
“.....”
우물쭈물 입만 오물거리는 스텔라.
피식한 나는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었다.
“투정 부리고 싶었어?”
그에 스텔라가 아주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빈도가 늘어서 좋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그녀의 머리를 살살 헝클어뜨렸다.
“차에서 얘기할까? 우리 바로 출발해야 안 늦는데.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
“아, 응...”
순식간에 홍조가 핀 그녀의 뺨.
집에서 벌어질 일을 상상이라도 하는 건가 싶다.
상상보다 더 큰일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쩌나.
**
지금 세계연합에서 비밀리에 인간들을 모으고 있어.
“무슨 소리야?”
임상시험 단계로 들어갔나 봐. 그저께 세계연합이 우리 몰래 그리스에 있는 이블리언 탐색기를 조사했거든? 복제 아이테르에서 탐색기에 서려있는 아이테르 에너지를 발견한 것 같아.
제법 빠른 속도로 연구가 이뤄지고 있구나.
하긴, 그곳에 박사와 마르셀라만큼의 천재는 없다고 해도...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 포진되어있는 만큼 당연한 수순이긴 했다.
우리가 그들이 쉽게 조사,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일부러 손을 놓고 있는 것도 한몫했겠지.
덜컥.
박사와 한창 통화를 하고 있던 나는, 밴의 문이 열리며 스텔라가 들어오자 음량을 확 줄였다.
“나중에 통화해요.”
존댓말을 듣자마자 어떠한 상황인지를 눈치챈 박사가 짧게 대답했다.
응.
통화를 마친 나는 스텔라를 돌아보았다.
죽상인 얼굴. 회의 때 제대로 집중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라디오는 잘 해놓고 이번엔 이러다니...
집에 갈 시간이 다가오면서 슬슬 긴장을 하는 듯싶었다.
휴대폰을 거치대에 올려놓는 내게, 스텔라가 물었다.
“누구랑 통화했어?”
“박사님.”
“아 진짜? 무슨 일 있으시대?”
“본부 일인데, 별 거 아니야. 그냥 정기적인 정산 같은 거지. 너야말로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왜 그래?”
침울해져선 담요를 목까지 올려 덮은 스텔라가 설명했다.
“아, 그게... 회의 때 피디님이랑 작가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어...”
“왜?”
“그냥... 집중이 잘 안 돼서...”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다행인 점은, 최승환에게 전화가 오지 않았다는 거다.
눈에 띌 정도로 딴생각을 했다면 피디가 그에게 전화를 해서 따졌을 텐데 말이다.
이는 스텔라가 회의에 집중하려고 최대한의 노력을 곁들이긴 했다는 방증이었다.
“왜 집중을 못했는데?”
“.... 오, 오빠는 몰라도 돼... 오늘 춥다는데 얼른 가자... 집에 들어가서 보일러 꺼야 돼... 오늘 까먹고 나와서 난방비 많이 나가...”
덜렁아. 이 마왕님께서는 머릿속에 성욕만이 가득 차있는 상황이라, 그런 말을 하면 아랫도리가 마구 부푼단다.
이제부터 땀을 잔뜩 흘리게 될 테니까 보일러는 없어도 된다고 하는 거지?
알았어. 그렇게 이해하고 있을게.
**
다시 한 번 찾아온 스텔라의 집은 여전했다.
내가 준 블랙체리 방향제 냄새가 거실 전체에 은은하게 퍼져있고, 그 냄새에 섬유유연제 특유의 향이 섞여있었다.
물론 예전에 맡았던 대마초 특유의 쩐내도 포함이다.
코를 킁킁거린 나는, 총총걸음으로 건조대로 향하는 스텔라를 보며 지나가듯 말했다.
“아직도 그 냄새가 나네.”
그러자 자신의 속옷을 바구니에 마구 집어넣던 스텔라가 고개를 돌렸다.
“진짜? 저번에 그거?”
“응. 너는 안 나?”
“나는... 음...”
귀엽게 코를 킁킁거리는 스텔라.
거실을 쏘다니며 한참을 그러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안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덜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냄새에 적응해서 그런 걸지도 몰라. 코가 둔해진 거지.”
“그런가...?”
“맡다보니까 거슬릴 정도인데... 알렉스한테 한 번 물어봐봐.”
“그 정도야...? 알았어. 시간 날 때 물어볼게.”
알겠다고 대답한 나는 스리슬쩍 스텔라의 방을 보았다.
굳게 닫혀있는 그녀의 문이 마치 성역 같다.
이런 내 반응을 캐치한 스텔라의 주변에서 꼴깍하는 소리가 났다.
“무, 뭐해...? 왜 거기 쳐다봐?”
“방 구경해도 돼?”
“뭐...?”
태연스런 내 태도에, 안 그래도 큼지막한 스텔라의 눈이 더더욱 커졌다.
아무런 전조 없이 말해서 당혹스런 면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앞으로 벌어질 나와의 끈적한 행위에 대한 긴장감이 더욱 커서 저런 반응이 나왔으리라.
잠자코 미소만 띤 채로 스텔라를 주시하고 있자, 그녀가 입술을 잘근 씹더니 돌연 내게 따지고 들기 시작했다.
“오빠 이런 적 한두 번 아니지...? 다른 사람한테도...”
“다른 사람 누구?”
“.... 저, 전에 나랑 비슷한... 그런 사이였던 여자분들한테...”
물론이지.
세화한테도, 유리아한테도, 실비아한테도, 아델한테도... 그리고 박사한테도 비슷한 일을 했단다.
그나저나 이런 금기사항을 직접 물어올 정도라니.
스텔라의 집착이 높은 수준까지 올라왔구나 싶다.
“딱히 이랬던 적은 없어.”
“또... 또 거짓말...”
“정말 내가 네게 솔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네가 그냥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거야?”
“.....”
정곡을 찌르는 듯한 질문을 던지자, 스텔라의 입이 앙다물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자신의 실책을 반성한 스텔라가 내게 가까이 오더니, 손을 꼭 잡고 깍지를 꼈다.
그리고는 사과했다.
“미안해...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괜찮아.”
“드, 들어갈래...? 원래는 알렉스한테도 못 오게 하는 곳인데... 걔는 그냥 문 열고 들어오긴 하지만...”
친동생조차도 출입을 잘 허락해주지 않는 곳에 특별히 날 초대한다?
저 말이 야하게 느껴지는 건 착각인가?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묵묵히 고개만을 끄덕이자, 어느 샌가부터 얼굴이 새빨개져있던 스텔라가 조심스레 방 문을 열었다.
덜컥. 끼이이...
기름칠이 잘 되어있지 않아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와 동시에 달콤한 향기가 확 날아와 코에 꽂힌다.
복숭아와 비슷한 향인 것 같은데...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눈을 가라앉힌 나는, 스텔라가 전등을 켜자 방 내부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스텔라의 가녀린 몸엔 어울리지 않는 더블 사이즈 침대에 진한 분홍색의 커버가 올라가있다.
이불마저도 같은 색. 베개는 특이하게도 커버와 이불과 어울리지 않는 회색이었다.
대충 보영이 주는 대로 사용하는 모양인데... 이제부터 내 취향으로 커스텀해야겠다.
“무, 뭘 그렇게 자세히 봐...”
자신의 방 내부가 부끄러웠는지 내 눈을 가리려는 스텔라.
목을 쭉 빼어 손쉽게 스텔라의 방어를 파훼한 나는, 몸으로 그녀를 툭툭 밀었다.
그리고는 스텔라가 몇 걸음 뒷걸음질을 치자, 방 문을 닫고 문을 잠갔다.
이후 전등 스위치를 딸깍거려보다가, 주황색의 은은한 불빛이 감도는 취침등만 켜놓았다.
철컥.
“오빠... 뭐하는 거야...?”
당황한 스텔라의 물음.
목소리가 오들오들 떨리고 있다.
어깨를 으쓱인 내가 답했다.
“충전.”
“충전이라니... 지금...?”
나는 말없이 스텔라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발자국을 옮겼다.
내 보폭에 맞춰 뒷걸음질을 치는 스텔라를 보니, 실비아와의 관계가 생각난다.
그녀도 스텔라와 비슷했었는데... 감회가 새롭다.
하염없이 물러날 것만 같던 스텔라는, 침대 모서리에 오금이 걸려 털썩 주저앉았다.
그 틈을 탄 나는 성큼 걸어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그대로 쓰러뜨렸다.
“힉...!”
짤막한 신음을 터뜨린 스텔라의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듯 떨리고 있었다.
그윽한 눈으로 스텔라를 바라본 나는, 그녀의 귓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오늘 다 채울 거지?”
“무, 무슨 소리야... 오빠... 나 지금 무서워... 장난하지 마...”
장난 아닌데.
이런 식으로 약간 강압적이게 들이대는 모습도 필요하다.
왜? 난 스텔라가 여러 성벽에 눈을 떴으면 좋겠으니까.
“못 참겠어.”
“뭐가...? 뭐가 못 참겠다는 건데...? 응?”
“아까부터 참고 있었는데, 이젠 안 되겠어.”
“그러니까 뭘...!”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스텔라의 목 라인에 얼굴을 파묻은 나는, 그쪽에 따스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햑...!”
생각지도 못하던 자극이 찾아왔는지, 그녀의 몸이 잔뜩 움츠러든다.
동시에 내 뒷머리가 바짝 당겨지는 느낌이 일었다.
스텔라가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잡아 힘을 준 것이다.
“오빠...! 잠깐만...”
애처롭게 부탁을 하고 있는 스텔라를 무시하며 계속 애무를 하니, 반항을 포기한 그녀가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로 부탁을 했다.
“나 세수... 세수 먼저 하고 오고 싶은... 허어억!”
하지만 내가 그녀의 목에 혀끝을 대고 핥기 시작하자, 깜짝 놀라선 말을 하다 말고 내 티셔츠를 확 잡아당겼다.
투둑!
실밥이 뜯어지는 소리.
옷이 약간 늘어난 듯하다.
스텔라 또한 그 소리를 들었는지, 당황해하다 말고 내게 사과를 했다.
“미안해... 미안...”
이래서 스텔라가 좋다.
착하고, 사려 깊고, 순수하기까지 하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심하게 물들이고 싶다.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깊디깊은 심연 속으로.
나는 스텔라가 입은 원피스의 허리끈을 푸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르륵거리며 부드럽게 풀리는 리본.
이제 정확히 3초 정도 있으면, 그 소리가 들릴 것이다.
트드드득! 트득!
그래, 이제는 완전히 습관으로 굳어진, 스텔라가 무언가를 긁는 이 소리 말이다.
이번엔 침대 커버구나.
하긴, 쥐어뜯을 게 그것밖에 없기는 하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