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9화 〉 새하얀 도화지에 번진 빨간 선혈 #2
* * *
“지혁이 오랜만이네?”
세련된 복장을 입고 소속사로 들어온 이지안.
나는 날 향해 화사하게 손을 흔드는 그녀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대표님이랑은 인사하셨어요?”
“오자마자 했지. 근데 소속사가 좀 작다... 아침밥도 메뉴가 하나뿐이고...”
뒤에서 컴퓨터를 하던 천희주가 발끈했다.
자그마한 목소리임에도 거리가 가까워서 들린 것이다.
무어라고 할만도 하지만, 천희주는 아무 말도 못하고 표정만 굳히고 있었다.
이지안의 분위기가 약간 무서운 듯했다.
어깨를 으쓱인 내가 반박했다.
“운영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소속사치고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네 말이 맞아. 겉모습보단 내실이 중요한 거니까. 그치?”
지금까지 직원들도 구하지 않고 뭐했냐는 뜻으로 들리는데 맞나?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리는데, 연예인들을 많이 만나는 직종에 있다 보니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아는군.
마치 이런 거다.
값비싼 외제차 딜러가 되었는데, 유복한 사람들을 위주로 상대하다보니 자신조차 그런 부류가 된 것 같은 느낌.
허영심에 찌들어있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다.
빨리 써먹고 버리던가 해야지.
“내실 중요하죠. 지금도 잘 쌓아가고 있습니다.”
“잘 쌓아가고 있다고? 그건 무슨 소리야?”
“보영이 누나가 여기 소속이잖아요.”
이지안이 움찔했다.
채보영이 ABC엔터 소속이 되었다는 건 유명했다.
한국 전체가 들썩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연예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
국민가수가 소속되어있는 소속사.
이보다 더 큰 내실이 어디 있겠는가?
이지안 또한 이것을 아주 잘 알고 있을 터.
괜히 언급했다가 역풍이라도 맞으면 큰일이 나니, 물러나고 싶겠지.
예상대로, 잠시간 조용히 있던 그녀가 화제를 돌렸다.
“회의는 언제 끝나?”
“금방 끝나요.”
말하기가 무섭게, 회의실 문이 열리더니 최승환과 스텔라가 함께 나왔다.
스텔라는 이지안을 마주치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여기 온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은 그녀가 이지안에게 간단한 목례를 했다.
예전에 힘차게 인사를 하던 것과는 상반되는 태도.
이지안을 껄끄러워한다는 방증이었다.
그저 나와 친한 것 같다는 추측 하나만으로 이 정도 반응이라... 아주 좋다.
“기다리시느라 수고 많으셨고... 바로 이동할까요?”
피곤한 기색을 띠고 있는 최승환의 말.
이지안이 자신의 백을 챙기며 대답했다.
“네, 대표님.”
“오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돌아가는 대화가 미심쩍었을까?
스텔라가 날 올려다보며 설명을 요구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스텔라의 등을 어루만져준 나는 최승환을 불렀다.
“대표님.”
“응?”
“10분 정도만 뒤에 움직여도 괜찮을까요? 보영이 누나가 스텔라한테 전화하라고 했거든요.”
“언제?”
“30분 전에요. 신곡과 관련된 이야기라서 중요하대요.”
“그래...?”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최승환이 이지안을 바라보았다.
“죄송하지만 잠깐만 대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물론이에요.”
“감사합니다.”
과할 정도로 숙이고 들어가는 최승환을 못마땅한 눈으로 쏘아보는 스텔라.
자리를 살짝 옮겨 그런 스텔라의 눈을 가린 나는, 그녀를 데리고 빈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스텔라는, 문이 닫히자마자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방금 그거 무슨 소리야?”
“뭐가?”
“대표님이 왜 이지안 선생님한테 잘 부탁한다고 하셔?”
“아, 그거? 선생님께서 우리랑 같이 이동하면서, 네 메이크업을 봐주실 거거든.”
“뭐...?”
스텔라가 거의 경악을 하듯 입을 벌렸다.
입술을 뻐끔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던 그녀가 날 향해 따졌다.
“나는 방송국에서 따로 만나는 건 줄 알았는데?”
“선생님 자동차가 퍼졌대. 카센터에 맡긴 상태래.”
“말이 안 돼. 출장도 자주 가시는 분이 차를 빨리 고치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 그러면 선생님은 누구 차로 이동하는데? 설마 우리 차는 아니지? 대표님께서 따로 데려다주는 거지?”
나는 일순 할 말을 잃은 척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스텔라가 답답한 듯 가슴을 쿵쿵 치더니, 화를 꾹 눌러담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표님이 이렇게 하자고 하신 거지? 오빠는 승낙한 거고?”
“그게...”
“오빠는 내가 우리 차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알면서, 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안 된다고 말했어야지. 물론 대표님이 구두쇠이긴 하지만, 내가 민감해한다고 하면 다른 방법을 생각하셨을 텐데...”
“음... 그건 생각 못했어.”
“오빠가 그걸 생각하지 못했다고? 그것도 말이 안 되는데?”
당당하게 따지고 드는 모습... 보기 좋아.
계속 그렇게 해주렴.
죄인마냥 침묵한 채 가만히 있자, 스텔라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왜 대표님이 선생님한테 저런 태도를 보여? 공짜로 와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대표님께서 계약서까지 쓰셨잖아. 그럼 오는 사람이 맞춰야하는 거 아니야?”
음음... 네 말이 맞단다. 백번 옳아.
머리를 긁적인 내가 핑계를 대었다.
“이지안 쌤한테 메이크업을 받고 싶은 연예인들이 많아서... 실력 좋잖아.”
“겨우 그런 이유 때문에 숙이고 들어가?”
“겨우 그런 이유라니... 대표님께서도 네가 잘 됐으면 좋겠으니까 그런 거지.”
“계약까지 끝냈고, 계약서에 갑은 우리라고 쓰여 있기까지 했어. 그랬는데도 우리가 을인 것처럼 행동하면 이지안 선생님이 소속사를 뭐라고 생각하겠어? 호구... 아니, 엄청 쉽다고 생각하겠지...!”
속사포처럼 입을 놀리는 스텔라.
이지안을 태우는 게... 아니, 이지안과 함께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무척 싫은 것 같다.
잠자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듣고 보니 그러네. 미안해.”
자신의 말투가 무척 공격적이었음을 자각했을까?
스텔라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화를 누그러뜨렸다.
하지만 가슴만큼은 계속 두드리고 있는 채였다.
얼빵하고 눈치 없는 남자친구인 척은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메이크업은 여기서 받고, 이지안 선생님은 바로 돌려보내자고 할게.”
그제야 표정을 푼 스텔라가 날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도 돼...?”
“거짓말 조금 하지 뭐.”
“어떻게...?”
“보영이 누나를 들먹이면서 얘기하면 어떻게 잘 될 것 같아.”
“보영이 언니한텐 뭐라고 말하려구?”
보영이는 내 명령이라면 무슨 일이든 하는 충성스런 권속이란다.
뭐라고 말할 필요는 전혀 없어.
그냥 문자 한 통만 날려주면 돼.
“내가 다 알아서 할게 그건.”
“.... 응.”
화가 완전히 풀린 스텔라는, 어제처럼 내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당황스러운 척을 한 나는 스텔라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녀가 젖 먹던 힘을 다하면서까지도 떨어지려 하지 않자 조곤조곤하게 나무랐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얼른 풀어.”
“싫어... 봐도 상관없어... 그리고 칭얼대서 미안해... 이지안 선생님이 싫어서 그랬어...”
“왜 싫은데?”
“.... 그냥 싫어... 샵도 옮길래...”
이지안을 싫어하는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을 테지.
전부 나와 관련된 것들일 테고.
아아... 나만의 덜렁아.
네 무르익은 질투가 내 가슴을 마구 뛰게 해주는구나.
참을 수가 없다.
그래서 오늘, 무조건 스텔라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
절대 도망갈 수 없도록, 도망갈 생각도 못하게 몸에도, 마음에도 내 흔적을 잔뜩 뿌려놓을 것이다.
**
“이지안 선생님이 싫다더니... 해준 메이크업은 마음에 들었나보네.”
혀를 끌끌 차는 내 말에, 얼굴이 붉어진 스텔라가 거울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애꿎은 대기실 천장을 바라보며 툴툴거렸다.
“시, 실력은 싫어한다고 한 적 없는데... 괜히 트집 잡지 말지...”
그 말마따나 이지안의 메이크업 실력은 진심으로 인정할만한 수준이다.
특히 눈화장을 무척이나 잘했는데, 약간 스모키하게 그려진 아이라인 덕에 순둥순둥하던 스텔라의 이미지가 섹시하게 뒤바뀌었다.
뭔가 사악해 보이는 느낌을 풍겨서 몹시 마음에 드는 수준.
스텔라가 타락하면 이지안을 잡아놓고 화장만 하게 시켜볼까 싶다.
둘만이 있는 대기실.
나는 계속 투덜거리고 있는 스텔라에게 바짝 다가가,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당겨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그녀.
삐죽 내민 입술에 발라져있는 진한 빨간색 틴트가 눈에 띈다.
색 이름이 뭐랬더라... 무슨무슨 로즈였는데 기억이 잘 안 난다.
“덜렁아.”
“응.”
“오늘 끝나고 너희 집에 들러도 돼?”
어깨가 가벼워진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깨에서 머리를 떼어낸 스텔라가 놀란 낯을 하고 있다.
내가 먼저 제의한 적은 처음이라 당혹스런 모양이었다.
“우리 집에...?”
“잠깐 쉬고 싶어서. 왜 그런 표정이야? 알렉스 있을까봐 걱정돼?”
“아... 그게 아니라... 갑자기 들으니까 당황해서... 알렉스는 아마 없을 거긴 한데...”
“그러면 된 거지?”
“응... 돼...”
스텔라의 손은 어느 샌가부터 딱 붙인 허벅지 사이에 들어가 있었다.
이러한 스텔라의 반응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내게 밥 먹고 돌아가라며 몇 번이나 권유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부끄러워한다는 건,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렴풋하게나마 예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 예상이라고 해봐야 키스 같은 스킨십이 끝이겠지만... 지금은 비밀로 하자.
똑똑.
어딘가 야해진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눈을 마주치던 우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재빨리 거리를 벌려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송국 직원이 들어와 말한다.
“스텔라 씨, 준비되셨으면 5분 뒤에 이동하실게요.”
“아... 네...!”
휘청거리며 일어나는 모습이 안쓰럽다.
굳어진 몸으로 일을 해야 하니 쉽지가 않지?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만 질문할 거예요.”
제 멋대로 스텔라의 표정을 살피고 오해한 직원의 말이었다.
침을 꼴깍 삼킨 스텔라가 대답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생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직원은, 내게 5분 뒤에 바깥으로 나오라고 말한 뒤 자리를 떠났다.
다시금 조용해진 대기실 안.
스텔라에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그녀의 등허리에 손을 대었다.
이후 손을 내려 그녀의 둔부를 살살 쓰다듬었다.
“힉...!”
예상치 못한 상황에 간드러지는 소리를 내고는, 어깨를 팍 움츠러뜨리는 스텔라.
“아 오빠... 지금 이러면 어떡해애...”
더 만져달라는 듯 자신의 엉덩이를 슬쩍 뒤로 뺀 주제에...
말과 행동이 전혀 맞지 않다.
이건 내 손길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학습한 그녀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웅... 우웅...!
곧바로 튀어나오기 시작한 디바이스의 소음.
오늘 저녁... 아니, 점심부터 있을 대사건을 예견이라도 했는지, 마치 비명 같은 소리를 내고 있다.
무릎을 약간 굽혀 스텔라와 어깨선을 맞춘 나는, 그녀의 귀에 나직이 속삭였다.
“대표님이 점심에 예능 회의 끝나면 바로 퇴근하래.”
“.....”
가쁜 숨만을 내뱉으며 침묵하는 스텔라를 보니, 오늘 라디오는 망했구나 싶다.
출연료가 꽤 비쌌을 텐데... 피디가 울상을 짓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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