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8화 〉 새하얀 도화지에 번진 빨간 선혈
* * *
‘대서특필이 되어도 모자랄만한 대발견이지만...’
세계연합은 아이테르의 발견을 비밀리에 부치겠지.
그들의 입장에서, 아이테르는 지구상에 처음 발견된 신비한 에너지니까.
인간들이 으레 그렇듯, 독과점을 위해서 입을 꾹 닫고 있을 것이다.
“고작 며칠만 지났을 뿐인데 되게 오래 못 본 것 같다?”
내 뒤로 다가와 담배를 문 최승환의 말.
상념을 날려버린 내가 대답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스텔라는? 괜찮대?”
스텔라? 지금쯤 유리아의 차를 타고 훈련장소로 가고 있을 거다.
훈련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나와의 행위가 눈앞에 아른거려서, 몸이 계속 달아오르겠지.
“지금은 괜찮아졌어요.”
“넌? 다친 데는 나았어?”
“예. 애초에 많이 다치지도 않았어요.”
“하필이면 돌아오는 길에 괴물이 나타날 줄은 누가 알았겠어. 운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냐.”
“그러게 말입니다. 스텔라 스케줄은 뭔가요?”
“받아.”
한손에 있는 A4용지 한 장을 건네주는 최승환.
목록을 살펴보니 꽤나 한가했다.
바빠질 거라고 해서 빡빡하게 스케줄을 잡았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최승환이 우릴 배려해준 모양이었다.
아니, 야망이 큰 최승환의 특성상 자발적으로 이러지는 않았을 터.
더군다나 지금 표정을 보니 제법 탐탁찮아하고 있었다.
이건 보영이 압력을 줬다는 의미였다. 스텔라에게 너무 많은 스케줄을 주지 말라고 말이다.
바지사장다운 면모로구나. 불쌍한 놈...
“내일은 아침에 라디오, 점심에 추가 예능 회의만 들어가면 끝이네요? 주의사항은 없나요?”
“얘기는 다 해놨으니까 그냥 가기만 하면 돼.”
“알겠습니다.”
“메이크업은 필요한가?”
이거 꽤나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원래라면 내가 상황을 만들려고 했지만, 이렇게 떠먹여주는데 안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
“어차피 라디오라 필요 없을 것 같긴 한데... 이미지를 생각하면 하는 게 좋아 보입니다.”
“그렇지? 방송국이랑 샵이랑 머니까 출장으로 부를까? 스텔라 담당 쌤 이름이 뭐였지?”
“이지안요.”
“알았다. 연락해둘게.”
이지안은 스텔라 외에도 담당하는 연예인이 있다.
이른 아침부터 메이크업을 하러 오는 연예인들이 많은 이상, 우리 같은 중소 기획사의 부탁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다고 생각해 거절할 터.
그러나 내가 개인적인 부탁을 곁들인다면 높은 확률로 올 것이다.
왜? 그녀는 내게 호감을 갖고 있으니까.
순수한 호감이 아닌 게 문제지만.
“예, 형님.”
“식당 요리사 구했으니까 밥 먹고 싶으면 가서 먹어. 희주가 좋아하더라.”
“벌써요? 소속사에 직원도 거의 없는데?”
“이 새끼가... 지금은 별로 없는 거라고 해라. 애사심 몰라? 애사심.”
애사심은 단 하나도 없고, 스텔라를 향한 애정은 있어.
“전 먹고 와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내일 잘 부탁한다.”
“예.”
**
“앗 따가!”
아델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막 집에 도착한 나는 거실로 향했다.
아델이 소파에서 누군가가 물어뜯은 흔적이 있는 큼지막한 호랑이 인형을 꿰매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간 내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델.”
“안녕하셔요, 지혁 씨.”
“뭐하십니까?”
“메릴이 인형을 물어뜯어서 꿰매주고 있어요.”
“메릴이 왜 그걸 물어뜯었죠?”
“이갈이를 할 시기라서요.”
주위를 둘러보니 식탁 다리에 상처가 많이 나있었다.
메릴이 질겅질겅 씹어댄 모양.
내 눈치를 본 아델이 말을 이었다.
“유리아 언니에게 여쭤보니, 수인 종족들이라면 다 겪는 자연스런 과정이래요. 그러니 혼을 내지는 마셔요.”
혼낼 생각은 하나도 없었는데. 혼자 김칫국을 들이켜는 모습이 귀엽다.
한동안 인형과 씨름하던 아델이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일찍 어쩐 일이시지요?”
“아델에게 부탁이 하나 있어서요.”
“막내를 훈련시키라는 부탁인가요? 이미 세화가 하고 있는데요.”
“그게 아닙니다. 스텔라는 오늘 무척 쑥스러워할 거예요. 마치 예전의 아델처럼요.”
아델의 귀가 메릴마냥 쫑긋했다.
흥미가 가득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인형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막내의 순결한 그곳에 지혁 씨의 사랑을 넣었군요.”
“그건 아직입니다. 조만간이긴 하지만... 어쨌든 아델이 옆에서 잘 케어해줬으면 좋겠어요.”
아델은 성적인 이야기를 상대방 기분이 나쁘지 않도록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여러 음담패설을 늘어놓음에도 저 순진무구한 얼굴과 진심어린 말투 덕에, 스텔라는 아델이 자신을 정말 위하고 있구나 생각할 테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번에 나타난 스텔라의 반응은 아델과 비슷했다.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사람과의 대화는 큰 도움이 된다.
만약 유리아나 실비아와 비슷했다면, 아델이 아니라 둘 중 한 명에게 부탁을 했을 것이다.
“흠흠... 그 정도는 일도 아니지요. 제게 맡기셔요. 그나저나 신도들을 관리하랴, 막내도 케어하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네요.”
생색내기는...
“새로이 입교한 신도들의 포교활동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콧대를 우뚝 세운 아델이 다시 바느질을 시작하며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벌써부터 한 마리의 어린 양이 걸려들었어요.”
지금 우린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나, 힘든 사정이 있는 사람들 위주로 포섭하고 있다.
왜? 상대적으로 잘 걸려드니까.
허나 규모가 조금 커지게 된다면 유명인사들이나 지식인들에게도 손을 뻗을 것이다.
크나큰 부와 명예를 가진 연예인들도, 똑똑한 지식인들도 얼마든지 세뇌할 수 있다.
큰 사건이 연달아 터지고, 그로 인해 주변사람들이 떠나가고...
대중들의 관심이 욕으로 뒤바뀌며 멘탈이 박살나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우울증이 오고...
그렇게 사회에서 낙오된다.
그리고 요즘 세상은 낙오자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어, 회생이 쉽지 않다.
그런 사람들에게 내미는 구원의 손길과 재사회화의 기회는 뿌리치기가 쉽지 않다.
쉽게 말해, 나는 이들을 구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들을 살피는 선한 신으로서.
“그거 잘됐군요. 그런데 거긴 그렇게 꿰매면 터질 것 같습니다.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바늘을 집어넣는 게 좋아 보여요.”
“이렇게요?”
“간격이 너무 넓잖아요. 제가 조금 도와드릴까요?”
“아니요. 제 힘으로 직접 고친 다음 메릴에게 줄 거예요.”
마음씨가 곱다.
말없이 아델의 머리를 헝클어뜨려준 나는 주방으로 향했다.
나중에 스텔라에게 저녁을 갖다 주기 위해서였다.
겸사겸사 아델이 먹을 만한 간식도 만들어야지.
**
슬슬 해가 지기 시작하는 저녁.
훈련장으로 쓰는 폐건물에 도착한 나는 제법 놀라고야 말았다.
그곳이 완전히 초토화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이젠 폐건물이 아니라 잔해가 흩뿌려져있는 공터라고 해도 믿을 정도.
‘열심히 했구나.’
심지어 허공에 백색과 푸른색의 기운이 서로 맞물려 여기저기 움직이고 있었다.
저번에 예상했던 대로, 훈련 때만큼은 진심으로 임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이 정도로 오래 훈련했다면 아이테르 에너지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을 텐데, 뒷일은 생각하고 있는 걸까?
조용히 차를 주차시키자, 공중을 날아다니던 두 사람이 땅으로 내려와 변신을 풀었다.
태연한 표정의 세화, 그리고 디바이스를 체크해보는 스텔라.
상반된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살핀 나는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세화가 다가오더니 날 반긴다.
“왔어?”
“응.”
스텔라를 슬쩍 쳐다보니, 나와의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칠칠치 못하게 조수를 뿜어냈던 그때 일이 생각난 듯했다.
속으로 끅끅댄 내가 세화에게 물었다.
“스텔라는 잘하고 있었어?”
“응. 집중력도 좋았고, 학습속도도 빨랐어. 오늘은 만족스러워.”
우리 근처에서 우물쭈물 거리던 스텔라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세화에게 듣는 칭찬이 그리도 듣기 좋았던 모양이다.
“개선할 사항은?”
“공격을 받을 때 멈칫하는 습관이 있어. 짧은 시간에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아. 자꾸 지적했는데도 고쳐지지가 않아.”
조용히 말하고는 있었지만 거리가 가까운 상태라, 세화의 어깨 너머로 축 늘어지는 스텔라가 보인다.
알기 쉬워도 너무 쉬운 거 아닌가 싶다.
“그 외엔 다 좋았어. 멈칫하는 버릇도 경험이 쌓이면 자연스레 고쳐질 거야.”
“알았어. 수고 많았고... 같이 밥 먹을래?”
스텔라의 몸이 흠칫했다.
이후 날 거의 죽일 듯 노려보는데, 왜 세화에게 그런 말을 했느냐고 묻는 것 같다.
그녀와 등을 지고 있던 세화가 피식했다.
내가 무슨 의도로 저리 물었는지 정확히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스텔라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주 작게 혀를 찬 세화가 대답했다.
“난 됐어. 대학 동기들이랑 먹기로 했거든.”
“그래? 데려다줄까?”
“포탈타고 가면 돼. 나 간다?”
“잘 가.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응.”
고개를 꾸벅 숙이는 스텔라에게 한손을 흔들어준 세화는, 포탈을 타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스텔라에게 다가간 나는, 그녀를 꼭 껴안으려고 했다.
하지만 스텔라가 가슴 사이에 손을 넣어 날 밀어냈다.
“왜 그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나를, 스텔라가 마구 쏘아본다.
당장 날 나무랄 것 같지만 그러지 않고 있다.
괜히 쪼잔한 사람이 될까봐 우려스러운 모습.
잠시간의 침묵 끝에, 그녀가 마음속에 있는 감정을 솔직히 얘기했다.
“오빠 이세화 선배님 좋아해?”
좋아하다뿐이랴? 사랑하지.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나랑 둘이서만 먹으려고 도시락 싸온 거 아니야? 왜 이세화 선배님한테도 먹자고 해?”
최근 스텔라의 용기가 가상하다.
예전이었다면 이런 얘긴 속에만 품고 있었을 텐데... 장하다.
“그리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하는 건 뭐야?”
“그건 본부의 동료니까...”
“아무리 동료라고 하지만 너무 사적인 얘기 아니야? 이세화 선배님이 자기 앞가림 하나 못하실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선배님은 남자친구도 있으신데...”
그 세화의 남자친구... 아니, 남편이 나란다.
풋풋한 썸이 지나고 본격적인 애정행각을 할 관계.
이때의 질투심은 하늘을 치솟는다.
그리고 지금의 스텔라가 그랬다.
큼지막한 눈망울에 습기까지 낀 채로 서러움을 토로하고 있다.
내 행동에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조심스럽게 스텔라의 눈 밑을 닦아낸 나는, 그녀를 껴안고 어깨에 턱을 괬다.
“그런 뜻으로 한 얘기 아니야.”
그러자 스텔라가 내 허리를 꼬옥 껴안았다.
“믿을게...”
“믿어줘서 고마워. 오늘 수고 많았어.”
“.... 응... 나 땀 냄새나...?”
“하나도 안 나.”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마치 아이를 달래듯 하는 말이 마음에 들었을까?
내 허리를 두른 팔에 힘을 잔뜩 준 스텔라가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사랑해, 오빠...”
아아... 저 목소리로 사랑고백이라니... 빠져든다.
동시에 스텔라가 감미로운 신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보고 싶다.
내일 스케줄만 끝내놓으면 도전하자.
내가 갖고 있는 스텔라를 향한 마음을 전부 보여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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