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4화 〉 참패
* * *
@@
박사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마물 주제에 자신과 결투라니... 웃기지도 않았다.
‘마물 주제에...!’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하지만 자신은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상태.
세화를 바라본 스텔라가 물었다.
“선배님, 어떡하실 거예요?”
“같이 공격해야지. S급 마물은 상대하기 버거워.”
역시 저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
믿음직한 세화의 옆에 선 스텔라는, 그녀와 함께 자신의 무기를 꼬나쥐었다.
그때,
@*#*!&@@!
적기사가 괴성을 터뜨리더니, 주변에 피보다 더 진한 불길하기 짝이 없는 기운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쩌어엉! 콰아앙!
노르웨이가 가진 천혜의 자연환경이 무참히 파괴되고, 하늘이 적기사가 내뿜은 기운으로 인해 적빛으로 변한다.
놈의 행패를 두고 보지 못한 세화가 곧바로 짓쳐가 대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카아아앙!
세화의 공격을 쉽게 막아낸 적기사가 고삐를 잡아당기더니,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그리고는 다시 스텔라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지껄이고 있지만,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만큼은 알겠다.
혹시나 싶었던 스텔라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께를 가리키자, 놈이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이더니 검을 좌우로 두 번 휘둘렀다.
분명히 싸우자는 의미였다.
벙 찐 스텔라의 손에 자연스레 힘이 풀렸다.
그러자 스텔라에게 전의가 없다고 판단한 적기수의 투구에 시뻘건 안광이 맺히고...
푸히히히힝!
녀석이 타고 있던 적마가 앞다리를 들며 힘차게 울부짖었다.
다시 한 번 난동을 부리려는 모양새.
그러나 아까처럼 주변에 해악을 끼치지는 않았다.
말의 앞다리가 내려오자마자 다시 검을 내미는 적기수.
이젠 적기수가 원하는 바를 완벽하게 이해한 스텔라의 입이 떡 벌어졌다.
“미, 미친 거 아니야...?”
박사의 말대로, 저 마물은 진심으로 자신과의 일대일 대결을 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거절하면 주변을 마구 공격하겠다고 협박을 하고 있었다.
방금 했던 파괴행위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고 강짜를 부렸던 게 틀림없었다.
뭐 저딴 마물이 다 있지? 그렇게 결투가 하고 싶은가?
고지능 생명체라는 얘긴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생각 외로 훨씬 영악... 이 아니라, 어린아이 같았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떼를 쓰는 철없는 아이 말이다.
“왜... 왜 하필 나야...?”
아니, 옆에 자신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 떡하니 있는데, 결투를 하려면 세화와 하지...
무기도 같은 검이면서 왜 뜬금없이 채찍을 쓰는 자신을 선택하고 난리인지 모르겠다.
저놈의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들었을까?
진심으로 궁금해진다.
내 말이 맞는 것 같지? 일단 유리아가 올 때까지 요구를 들어주는 게 좋겠어. S급 마물이 마음먹고 난동을 피우면 정말 위험해.
통신기에서 들려오는 박사의 말.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짜증을 한숨으로 토해낸 스텔라가 따졌다.
“저보고 S급 마물을 혼자 상대하라구요...? 이세화 선배님께서도 혼자 상대하기 힘든 마물이에요. 제가 주, 죽을 지도 모르는데요?”
그에 대한 대답은 세화가 해주었다.
“위험하면 내가 나설게.”
“하, 하지만 저 마물은 저와의 일대일 결투를 원하고 있잖아요. 선배님께서 난입하면 아까처럼 주변을 파괴할 수도...”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지. 네가 죽는 것보단 낫다고 봐.”
“왜 그렇게 살벌한 말씀을 하고 그러세요... 무섭잖아요...”
“최대한 원거리에서 공격해. 틈을 보고 있다가 합세할게.”
틈 하나만 만들면 된다는 소리인가보다.
그래도 S급 마물인데... 무서운데...
싸우기도 전에 전의가 사라지려고 하던 스텔라는, 자신의 뺨을 짝! 소리가 나게 쳤다.
자신이 비스트 슬레이어임을 자각한 것이다.
무섭다고 빼기만 해선 안 된다. 제 몫을 다하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저 마물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상황은 자신에게도 잘 된 일이었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고된 훈련을 해왔던 성과를 쏟아 부을 때다.
‘좋아...’
결심을 끝마친 스텔라가 채찍을 잡은 손잡이를 부서져라 쥐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적기수가 검 손잡이를 가슴께로 가져가더니, 상체를 꾸벅 숙였다.
저건 아무래도 결투를 하기 전의 예의 같았다.
아니면 요구를 들어줘서 고맙다고 하는 것이거나.
마물 주제에 꽤 고급진 문화를 갖고 있구나.
그리 생각한 스텔라가 침을 꼴깍 삼키며 적기수를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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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아아아앙!
날붙이끼리 맞부딪치는 소리가 노르웨이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울렸다.
등이 땀으로 범벅이 된 스텔라는 미동도 없는 적기사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결투가 시작된 지 20분 째인데, 공격이 통하지 않으니 답답했던 것이다.
아무리 채찍을 휘둘러도 똑같았다.
적기사가 걸친 갑옷에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이래서야 틈을 만들기엔 불가능했다.
세화가 난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열이 받는다. S급 마물이 강한 건 알지만 모든 공격이 무용지물로 돌아갈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더 성질이 뻗치는 게 뭔지 아는가?
자신은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며 공격하는데, 저 오만한 기사는 공중에 가만히 서있다는 것이다.
그건 놈이 탄 말도 마찬가지. 시큰둥하게 투레질이나 하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기는 했다.
박사가 조금만 있으면 유리아가 오니 버티라고 했기 때문이다.
유리아가 대체 뭘 하고 있었는지, 실비아와 아델은 왜 오지 않는지 궁금하긴 한데, 어쨌든 사람들에겐 피해가 가지 않으니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했다.
유효타조차 먹이지 못한 저 마물을 이대로 보낸다는 게 싫었다.
최소한 진심으로 덤비게 해야 만족스러울 텐데 말이다.
그뿐이랴? 홀로 고고히 서있는 기사를, 동료들과 함께 뭇매를 때려야하는 것이 편치 않기도 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건 안다.
저 녀석은 지구에 해악을 끼치는 마물,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한 S급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물리쳐야하는 존재다.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데 어떡해...’
저 녀석의 기사도를 인정하고, 거기에 동화라도 된 모양이다.
속 편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아 몰라...!’
고개를 털어냄으로서 잡념을 날려버린 스텔라가 적기수와 거리를 두고 공격을 감행했다.
무차별로 채찍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적기수의 어깨의 움직임을 예측해보거나 하며 나름 열심히 분석하려고 했다.
그때,
카앙!
검을 약간 휘두르는 것으로 채찍을 튕겨낸 적기수, 놈의 투구에서부터 남성의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
뭐라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마물들의 언어를 알 수 없었던 스텔라로선 답답하기만 했다.
“아 대체 뭐라는 거냐고...!”
#*!*@^$!@.
“몰라! 모른다고!”
버럭 짜증을 낸 스텔라.
적기수의 붉은 안광이 그런 그녀의 백색 눈을 주시했다.
괜히 움찔한 스텔라가 최대한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며 눈싸움을 받아들이려 할 때,
쯧.
적기수가 혀를 찼다.
‘어?’
알 수 없는 언어를 지껄였던 기사였지만, 감탄사는 언어가 아니라서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저 자식은 분명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마치 귀찮은 파리에 짜증이 난 것처럼!
심지어는 다음 상대를 원한다는 듯, 자신의 뒤에 있는 세화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내, 내가 우스운 거야...?’
확실하다. 저 나쁜 기사놈은 자신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적을 눈앞에 두고 한눈을 팔 리가 없었다.
“이게...!”
저렇게 불경한 짓을 하다니... 기사도가 있다는 건 취소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스텔라는,
“안 돼! 스텔라!”
뒤에서 들려오는 세화의 다급한 외침도 무시하고, 공중을 뻥뻥 차며 적기수에게 달려들었다.
“하아압!”
온 힘을 다해서 채찍을 휘두르는 그녀.
호기로운 도전이었지만, 적기수의 태도를 바꾸지는 못했다.
시종일관 여유를 부리던 적기수는, 타이밍에 맞춰 검을 내려쳐 정확하게 스텔라가 잡은 채찍 손잡이를 노렸다.
카앙!
“꺄아악!”
고통스런 비명과 함께 무기를 떨어뜨린 스텔라의 팔이 벌벌 떨렸다.
다친 건 아니었지만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움직이질 못하겠다.
찌릿한 감각이 손등을 타고 어깨까지 올라온다.
손목에 금이 간 듯했다.
부상을 당한 그녀를 묵묵히 내려다보던 적기수는,
@#&!*&@.
무어라고 한 마디를 던지더니, 고삐를 잡고 기수를 돌렸다.
그리고는 포탈을 열고 돌아가 버렸다.
‘왜...’
왜 가버린 걸까? 자신을 죽여야 정상 아닌가?
아까부터 지금까지 저 녀석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본능만을 앞세운 마물이면서... 자비라도 베풀겠다 이건가?
믿어지지 않고, 짜증도 난다.
“하아...”
스텔라의 눈이 침울해졌다.
적기수가 던진 마지막 말을 생각해서였다.
알아먹을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한심하다’라고 했을 것이다.
그만큼 자신의 모습은 추했다.
**
푸쉬익!
의료기기에서 나온 스텔라가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내게 안기는 일이었다.
스텔라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준 내가 말했다.
“큰 부상은 없어서 다행이야.”
“.....”
내 허리를 꽉 부여잡는 그녀.
자존심이 상하겠지. 그렇게나 무기력하게 참패했으니.
그렇게 말없이 스텔라를 위로하고 있는데, 의무실 문이 열리더니 박사가 들어왔다.
그러자 스텔라가 황급히 포옹을 풀더니 박사의 앞에 섰다.
고개는 푹 수그린 채였다.
“그런 간단한 도발에도 넘어가고... 실망이 커.”
박사의 엄한 목소리.
움찔한 스텔라가 사과했다.
“.... 죄송합니다...”
“네게 추가적인 공격을 하지 않고 돌아갔기에 망정이지, 그 녀석이 나쁜 마음이라도 먹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천만다행인 줄 알아.”
“네...”
무척 가라앉은 분위기였지만, 내 입장에서 이번 사건은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스텔라가 너무 못 싸워서 웃긴 게 아니라, 적기수의 연기력이 제법 훌륭해서였다.
자숙하고 있다더니 연기 연습이라도 한 모양.
돌아간 적기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어쨌든 전체적으로 훌륭했다.
스텔라의 자존심이 무참히 짓밟힌 건 안쓰럽지만, 사람은 고난을 겪으면서 성장하는 법이지.
3기사들에게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말해둬야겠다.
“지혁이는 스텔라 데려다주고 곧바로 돌아와.”
“알겠습니다.”
박사와 한 차례 눈을 마주친 나는, 스텔라를 데리고 연구실을 나섰다.
차에 타고 안전벨트를 맬 때까지 한 마디도 않던 스텔라.
창문에 거의 머리를 박다시피 하던 그녀가 돌연 이러한 질문을 던져왔다.
“오빠... 그 마물은 왜 그냥 돌아간 걸까...? 애초에 결투는 왜 신청한 거고?”
그렇게 명령을 받았거든.
“글쎄.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나 한심하지...?”
“전혀. 지금 이런 말을 하기엔 조금 그렇지만, 오히려 기뻤어. 네가 비스트 슬레이어에 완전히 적응한 것 같아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는데 적응은 무슨... 아 진짜... 자존심 상해...”
그리 말한 스텔라가 창문에 머리를 콩콩 박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연달아 일어나서 혼란스러운 것뿐이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서 이번 결투를 복기해볼 시간이 되면, 이불을 마구 차면서 도전정신을 불태울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그녀의 멘탈은 약해 보이지만, 속은 단단하기 그지없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