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2화 〉 키워서 잡아먹기
* * *
“오빠.”
“응?”
“알렉스랑 무슨 얘기했어?”
겉옷까지 새로 갈아입고, 얕은 화장까지 한 스텔라의 물음이었다.
빨간불이 보이자 브레이크를 밟은 나는 스텔라를 돌아보았다.
“알렉스가 말 안 해줘?”
“그냥 남자들끼리 몇 마디 나눴다고 하던데?”
“별다른 말은 없었고, 그냥 너 잘 부탁한다고 하고 끝냈어.”
“그래...?”
의외라는 얼굴인데, 진실을 알게 되면 저 표정이 어떻게 바뀔까 궁금하다.
그 전에 먼저 해결해야할 일이 있지.
“근데 알렉스 몸에서 너희 집에서 맡았던 냄새가 나더라.”
“냄새? 무슨... 아...! 그거? 그 이상한 냄새? 알렉스한테서 났다구?”
“응. 너는 못 맡았어?”
“못 맡았는데... 나가기 전에 향수 뿌려서 그런가? 냄새 심했어?”
“심한 건 아니었어. 그냥 거슬릴 정도?”
스텔라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뭐지...? 담배냄새는 아니잖아. 그치?”
“확실히 아냐.”
“알았어... 오늘 들어가서 빨래하기 전에 한 번 확인해볼게. 근데 오늘 뭐할 거야?”
“뭐하고 싶은데?”
“딱히 하고 싶은 건 없는데... 그냥 카페 같은데 가면 안 돼?”
나는 황당하다는 눈으로 스텔라를 돌아보았다.
“하고 싶은 것도 없는데 연습을 빼먹었다고? 가수하고 싶다는 애 맞냐?”
“왜 얘기가 그런 쪽으로 흘러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이 상태론 연습 못한다고... 오빠도 오늘만큼은 넘어가주겠다고 했으면서 왜 뭐라고 해? 짜증나...”
“짜증난다고?”
당장 혼을 낼 듯 엄한 표정을 짓자, 스텔라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는 혼자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서럽게 진짜... 씨이...”
“뭐? 씨? 방금 욕하려고 했어?”
“내가 언제애...!”
말끝의 톤이 쭈욱 올라가는 모습을 보니 진짜 서럽긴 한가보다.
놀리는 맛이 아델만큼 있다. 티격태격하는 것도 좋아서 반응을 더 보고 싶다.
허나 멘탈이 약해서 더 쪼아대면 완전히 삐칠 것 같다.
여기까지만 하자. 스텔라는 오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많이 고생했다.
스텔라를 빤히 바라본 나는, 그녀의 입술을 톡톡 두드려보았다.
요즘 건조한 날씨가 많다보니 각질이 약간 생겨져있다.
“너 림밤 안 바르지? 다 부르텄네. 가게 보이면 들어가서 하나 사자. 매일 발라야 된다. 알았지?”
“.....”
“대답.”
“.... 응...”
우리 덜렁이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그래서 빨리 악의를 넣고 싶어.
얇은 틈 하나만 생기면 되는데... 그게 쉽지가 않네.
그녀의 앞머리를 잘 정돈해준 나는,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
“불편해.”
“참아.”
“앞이 안 보여.”
“손잡고 걷고 있잖아.”
“산책을 왔으면 주변 경치도 보고 그래야지, 그냥 오빠가 이끌어주는 대로만 따라가? 모자 조금만 올릴래.”
불만을 토로한 스텔라가 캡모자를 위로 살짝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머리를 꾸욱 누르자 원하던 걸 이루지 못하고 발만 굴렀다.
“사람도 별로 없잖아...! 왜 자꾸 날 억압하려고 그래?”
이 사춘기 여고생 같은 말투는 뭐지?
“사람이 별로 없긴 왜 없어. 산책 온 사람들 천지인데. 날 어둑해질 때 벗게 해줄 테니까 참아.”
“어두운데 경치를 어떻게 보냐? 너 바보야?”
은근슬쩍 반말을 하면서 맞먹으려 드는 게 귀엽다.
속으로 끅끅댄 나는 입고 있던 코트를 좌우로 활짝 벌렸다.
그에 스텔라가 움찔하더니 턱을 높게 치켜세워 날 올려다본다.
“뭐야...?”
“정 벗고 싶으면 여기 들어와서 벗어.”
마스크와 모자 사이에서 보이는 스텔라의 뽀얀 얼굴이 금세 복숭아마냥 분홍빛으로 변했다.
당장 안기고 싶은 듯 발을 떼고는 싶지만, 속옷이 또 젖어버릴까 두려워 멈칫하는 게 티가 난다.
피식한 나는 우물쭈물 거리고 있는 스텔라에게 다가가, 그녀의 몸을 코트로 덮어버렸다.
몸집이 아담해서 쏙 들어온다. 안기 무척 편하다.
“힉...!”
움츠러드는 스텔라의 몸. 그러나 이내 적응했는지 어미 캥거루의 주머니에 들어간 새끼마냥 코트 안에서 고개만 내밀고 밖을 바라보았다.
눈꼴 시렵다는 듯 쳐다보는 사람, 흐뭇하게 쳐다보는 가족단위의 사람 등...
다양한 인간군상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을까? 스텔라가 코트 아래로 머리를 쏙 내렸다.
코트 앞섶에 걸려 자연스럽게 벗겨지는 모자를 낚아챈 내가 말했다.
“이러면 괜찮지?”
“이, 이게 더 위험할 것 같은데... 아닌가...?”
네 말이 맞아. 모자를 쓴 것보다 누군가가 알아볼 확률이 더 높지.
근데 뭐 어때? 알아보는 놈들은 다 죽을 텐데.
“고개만 빼꼼 내밀면 돼. 이제 불만 없지?”
“.... 몰라.”
좋으면서 빼기는...
스텔라의 가녀린 몸을 거의 안다시피 한 나는, 그녀와 함께 공원을 천천히 거닐었다.
강변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우리.
고요한 한강을 지켜보던 스텔라가 돌연 이런 물음을 던져왔다.
“오빠는 내 매니저 계속할 거지?”
“아마도.”
“그렇게 애매하게 대답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잖아. 마물이 나타나는 텀이 짧아지면 다시 본부로 돌아가야 될지도 몰라. 박사님 혼자 일을 처리하기엔 한계가 있어.”
“내 매니저도 하면서 본부 일도 해.”
“나더러 일에 치여서 죽으란 소리야? 그리고 세화 일행도 케어해줘야...”
“오빠가 왜 케어해줘? 선배님들은 이미 다 적응하셨잖아.”
톤이 약간 공격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오늘따라 굉장히 이기적이기까지 하다.
슬슬 집착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는데, 아주 좋다.
“지금은 나름 평화롭다고 할 수 있으니까 매니저 일은 계속할 거야.”
“내가 이런 말까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실비아 선배님이 정보를 하나 말해주셨어.”
“무슨 정보?”
“본부가 슬슬 적자로 전환되고 있대. 그래서 말인데... 내가 엄청 유명해지고 정산을 받으면 큰돈이 들어올 텐데, 그때 본부에 내가 번 돈을 지원해주면 엄청난 도움이 될 거야. 그렇지 않아?”
그건 널 현혹시키기 위한 위장이란다.
본부의 재정은 문제가 없어. 오히려 넘쳐나는 수준이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오빠가 옆에서 날 챙겨줘야 빨리 유명해지고, 돈도 많이 벌지. 우리 같이 부자 되자.”
말하는 게 왜 이렇게 예쁘냐.
마음만 받을게. 마음만.
“네가 번 돈은 네가 써야지, 굳이 본부에 지원해줄 필요가 있나 싶은데. 박사님도 원하지 않으실 거야.”
“왜 원하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해? 소속감을 갖게 되는 게 나쁜 건가?”
“그건 아니지만, 비스트 슬레이어와 네 일상은 별개로 봐야 돼. 우린 널 비롯한 모두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받고 싶지 않아. 그리고 결정적으로, 네가 아무리 큰돈을 벌어봤자 본부 운영비에 보태쓰기엔 택도 없어. 운영비가 얼마인지 들어보면 입이 떡 벌어질 걸?”
“얼만데?”
“알 필요 없어. 실비아 씨는 혼내야겠네. 쓸데없는 말이나 하고...”
그 말에 스텔라가 코트 안에 들어간 손을 뒤로 뻗어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오빠 되게 웃긴다... 실비아 선배님은 본부를 걱정하시는 마음에 그러신 건데 왜 혼을 내? 그러지 마.”
“그럼 대신 널 혼내야겠다. 실비아 씨는 널 믿고 비밀 이야기를 한 것일 텐데 나한테 털어놨잖아.”
“아 왜애...! 오빠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오빠한테 솔직해지고 싶어서 큰맘 먹고 얘기한 건데...!”
앙탈을 부리는 모습을 보니 꼴린다.
스텔라의 정수리에 턱을 댄 내가 말했다.
“농담이야. 네가 했던 제안은 마음만 받을게. 착하다.”
“.... 그럼 내 매니저는...? 이, 이기적일지도 모르지만 난 오빠가 옆에 없으면 안 돼... 다른 사람이 운전대 잡는 거 엄청 싫어.”
“그건 모르는 일이지. 나보다 일 잘하는 사람은 많아.”
“누가 일 잘하는...!”
자신의 언성이 높아진 것을 깨달은 스텔라가 황급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누가 그런 부분에 대해서 말하는 줄 알아...?”
“진정해. 미안해.”
“.... 나도 화내서 미안해. 근데 이것만큼은 양보 못...”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문 스텔라가 자신의 골반을 슬쩍 움직였다.
엉덩이 부근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감촉을 이제야 눈치챈 모양이었다.
어때? 널 생각하는 내 마음이 겉으로 드러난 거란다.
서로의 몸이 밀착하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에, 쉴 새 없이 입을 놀릴 것 같던 스텔라가 조용해졌다.
“.....”
옷자락을 잡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한다.
지금 디바이스에선 약한 소음이 새어나오고 있겠지?
나는 스텔라의 등짝에 내 가슴을 완전히 밀착시켰다.
다리도 마찬가지. 무릎을 스텔라의 오금에 원래 한 몸인 양 딱 붙였다.
“여, 여기... 밖... 인데...”
“아무도 못 봐. 코트 안에 들어와 있잖아.”
“창피한데...”
싫으면 싫다고 명백하게 거절했을 텐데 그냥 말끝만 흐리고 있다는 건, 너도 은근히 바라고 있다고 봐도 되겠지?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나한테 만져지는 게 기대되고 그렇잖아.
창피해하지 않아도 돼. 나한테만큼은 네 모든 욕구와 치부를 드러내도 상관없어.
전부 포용해줄 수 있으니까.
“후우... 후...”
곧 뜨거운 숨결을 내뿜기 시작하는 스텔라의 이마에 짧은 키스를 해준 나는, 그녀의 변태 끼를 키워주기 위해 열심히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
음침한 빛이 감도는 비밀기지 안.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는 박사에게 다가가자, 그녀가 나를 반겼다.
“왔어? 스텔라는?”
“집에 보내놨어. 마르셀라는 어디 가고 누나 혼자 있어?”
“마르셀라는 그 꼬맹이 키워준답시고 밖에 나갔지. 네가 시킨 일이잖아.”
알렉스를 말함이었다.
고개를 주억거린 내가 말했다.
“내일 마르셀라랑 상의해서 마물 한 마리 내보내자.”
“스텔라 훈련용으로?”
“응. 실전경험은 미리미리 키워두는 게 좋지.”
“알았어.”
“근데 뭐하고 있길래 기지로 부른 거야?”
“너도 한 번 봐봐.”
박사가 모니터를 가리켰다.
무지개색으로 된 가느다란 실들이 이중나선구조 형태로 변화했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존재를 알리고 있는 게 보인다.
복제한 아이테르였다.
잠자코 그것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내가 중얼거렸다.
“기존 아이테르와 거의 흡사해 보이는데...”
“맞아. 생김새부터 형태까지 모두 비슷해. 하지만 한 가지가 결여되어있어. 마치...”
“감정이 없는 것 같다고?”
“정확해. 그냥 일정 패턴만 반복하는 기계처럼 보여. 복제의 한계인 듯해. 분석부터 시작해서 임상실험까지 수백, 수천 번을 해봤지만 전혀 이렇다 할 성과가 없어.”
어지간한 일은 묵묵히 다 해내는 박사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니.
신도 수를 늘림으로서 신에게 닿을 수는 있어도, 고유의 힘은 탐낼 수 없는 영역인 건가?
로사리오가 새로운 전사는 안 내보내주나? 한 번 잡아서 해부해보고 싶은데.
과감하게 폐기를 해버려도 상관은 없지만 너무 아깝다.
초창기부터 시작한 연구니까.
마르셀라의 실망감도 이만저만이 아닐 테고...
어떻게든 써먹을 구석이 없을까? 고민이 깊어지는 밤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