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2화 〉 가까워지는 거리 #2
* * *
스텔라의 집 앞.
안전벨트를 풀지도 않은 그녀가 날 돌아보았다.
“오빠.”
“왜.”
“나 지금 돌아가면 할 거 없어. 또 푹 쉬라고 말하지 마. 하나도 안 졸리니까.”
“그럼 뭐하고 싶은데?”
“같이 영화 보자.”
“영화? 그럴 거면 여기 오기 전에 미리 말을 했어야지.”
스텔라가 혀를 끌끌 찼다.
“누가 영화관 가서 보재?”
“그럼 너희 집에서 봐? 알렉스 오늘 휴무라며. 괜히 불편해할 수도 있잖아.”
“그냥 영화만 보는 건데 불편할 이유가 있어?”
영화 보면서 여러 풋풋한 일을 할 건데, 알렉스가 보면 당연히 불편하지.
불편해하는 것만이 아니라 날 죽이려고 할 걸?
잠깐 무언가를 고민하는 척한 내가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몇 번 마주친 적도 없는 사람이 집에 있으면 불편할 거야. 차라리 우리 집에서 볼래?”
그 말에 스텔라가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덜컥 초대하니 불편하거나 겁을 먹은 게 아니라, 기대감으로 인한 행동이었다.
내 집엔 뭐가 있을지, 어떻게 사는지 알아보고 싶은 티가 팍팍 났다.
“갈래.”
곧장 튀어나오는 대답. 밀당을 하려는 기색도 없다.
어지간히 궁금했던 모양이다.
“알았어. 출발한다?”
“잠깐만...! 나 양치만 하고 가면 안 돼?”
왜? 양치해서 뭐하려고?
나랑 붙어있어야 되니까 음식 냄새 가리려고?
아니면 타액을 교환하는 음흉한 행위를 하려고?
후자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넌 그냥 순수한 의도로 말한 거겠지.
“우리 집에서 하면 되지. 차에 네 칫솔도 있는데 굳이 올라가서 해야 돼? 시간 아까워.”
“그런가...? 그래도...”
“출발할게.”
“아, 응...”
결국 자기주장을 내세우지도 못하고 굽히게 된 스텔라는, 자신의 얼굴이 약간 붉어진 것을 보이기 싫었는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
“오, 오빠 여기 살아...?”
스텔라의 집과는 비교조차 안 되는 오피스텔 최상층.
집 안에 들어온 스텔라의 놀란 반응에, 나는 머쓱한 척 머리를 긁었다.
“어서 와.”
“집 엄청 좋잖아...!”
지하주차장에서부터 슬슬 시동이 걸렸었는데, 반응이 꽤나 크다.
내가 이 건물의 주인이라는 걸 알면 또 한 번 뒤집어지겠지.
그러니까 여기선 거짓말로 넘어가자.
“박사님께서 구해주신 거야.”
“아... 진짜?”
납득한 스텔라가 말을 이었다.
“진짜 좋다... 깨끗하고... 냄새도 좋아.”
세화부터 시작해서 아델까지, 그리고 지금 스텔라마저도 같은 반응.
이 달콤한 블랙체리 향 방향제는 안 좋아하는 여자가 없다.
신발을 벗을 생각도 못한 채 천천히 거실을 둘러보던 스텔라가 날 올려다보았다.
왜 들어오라고 하지 않냐는 듯한 눈빛. 귀여워 죽겠다.
“얼른 들어와.”
그에 신발을 벗고 구석에 가지런히 놓은 스텔라가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는 살금살금 소파 근처에서 우물쭈물 서성였다.
“앉아있어. 물 갖다 줄게.”
“응.”
그제야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 스텔라.
하나하나 허락해줘야 마음을 편하게 먹으려나 싶다.
“오빠, 나 싱크대에서 손 씻어도 돼?”
“화장실에서 씻어. 수건은 거울 옆으로 밀면 새 거 있으니까 쓰고.”
“거기서 씻을래.”
썸을 타고 있는 사람의 집 화장실에 들어가는 건 꽤나 묘한 분위기를 불러일으킨다.
물론 예민한 사람들의 경우에만 이런 기분을 느끼는데, 문제는 스텔라가 그 예민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사실 문제라고 할 것도 없었다.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금세 사라지는 감정이니까.
다소 엄한 눈으로 스텔라를 쳐다본 나는,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그녀를 향해 간결하게 말했다.
“비누 없잖아. 화장실 가서 양치도 하고 와.”
“.... 응.”
여기까지는 무척 순조로웠다.
하지만 문제는 스텔라가 화장실에서 나오고 나서 터졌다.
“오빠, 이거 뭐야...?”
그녀가 손에 오리 장난감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목욕을 할 때 으레 넣어두는, 흔히 볼 수 있는 장난감이지만...
성인 한 명이 사는 집에 있는 건 엄청난 위화감을 불러일으킨다.
유리아, 혹은 아델이 메릴을 씻길 때 가져다 썼던 모양인데... 살짝 곤란해졌다.
빠르게 머리를 굴린 내가 핑계를 댔다.
“아델이 동생 씻길 때 썼나봐.”
“뭐...?”
“친동생은 아니고... 다른 행성에서 만난 인연이야. 나이는 세 살인데 귀여워.”
“다, 다른 행성...? 어디? 아니지... 지금 그게 중요한 주제가 아닌데...? 아델라인 선배님이 왜 오빠 집 화장실에서 동생을 씻겨?”
“요 며칠 전에 단수된다고 했었거든. 관리실에서 물 쓸 일이 있으면 모아두라고 공지해놨는데, 아델이 깜박하고 못 모았대.”
“아... 맞다... 여기 옆집에 산다고 하셨지...”
납득은 하고 넘어간 스텔라였지만, 눈빛엔 명백한 질투의 감정이 담겨있었다.
저걸 좀 키워주면서, 약간 선망을 느끼게끔 해주자.
“자기 집은 청소하기 싫다고 자주 놀러 와선 술도 먹더라.”
“.... 혼자서?”
“대부분은 실비아 씨랑 같이 오는데, 가끔 다 같이 모임도 가져. 바로 옆집에 다 사니까.”
“그래...?”
“너도 이사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스텔라의 얼굴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것을 보니, 제대로 통한 것 같다.
아직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서서히 타락해가면서 알렉스를 원망하게 될 테지.
물이 담긴 컵을 내민 내가 말했다.
“무슨 영화 볼래?”
“이, 일단 앉아봐.”
분위기가 꽤나 심각해 보인다.
컵을 소파 테이블에 내려놓은 나는, 스텔라의 옆에 조심스레 앉았다.
“왜?”
“오빠는 자각이 있긴 한 거야?”
“뭐가?”
“다른 선배님들이 오빠 집에서 모임을 갖는다는 거나, 아델라인 선배님께서 동생을 씻길 때 왔다는 거나... 어떻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해?”
미간을 좁힌 채 빠르게 머리를 굴린 나는, 스텔라가 왜 저러는지 이해했다.
우리 관계가 한 단계 발전했음을 서로가 알고 있는데, 다른 여자가 집에 왔다는 얘길 꺼내니까 화가 난 거다.
앞뒤의 중요한 부분을 다 빼놓고 다짜고짜 저런 말을 하니 맥락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그냥 남자친구로서의 자각이 있긴 한 거냐고 대놓고 물어보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나는, 진중한 투로 스텔라에게 설명했다.
“이해했어. 근데 이건 예전 일이야. 요새는 집에 혼자 있어.”
“그래...?”
“응. 그리고 내가 이 얘길 서슴없이 말한 건, 너한테 솔직하고 싶기 때문이야. 가만히 있다가 네가 먼저 이 사실을 알았어봐. 지금보다 더한 오해를 할 걸? 그렇지 않아?”
“.... 그렇기는 해.”
수긍하는 스텔라의 입가엔 희끄무레하게나마 미소가 맺혀있었다.
솔직하고 싶다는 말을 한 직후에서부터 저랬는데, 화가 다 풀린 것 같다.
나한테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뀔 거대할 사기를 당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순진하기는.
날 캐내려고 했던 일이 무척 창피했을까?
아니면 벌써부터 바가지를 긁으려 했던 게 미안했을까?
새빨개진 뺨에 손부채질을 하던 그녀는, 소파 구석에 있는 푹신푹신한 쿠션을 자신의 품으로 가져오더니 얼굴을 묻었다.
고양이마냥 쿠션을 긁어 찢어내려고 하는 건 덤.
나는 스텔라와 바짝 붙어,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고 깍지를 꼈다.
그러자 스텔라가 격하게 몸을 떨더니, 고개를 홱 들어 날 쳐다보았다.
“.....”
입은 헤 벌리고, 다리는 파리하게 떠는 채였다.
어디 아픈 사람 같아서 안쓰럽게 느껴진다.
나는 힘이 하나도 없어진 스텔라의 몸을 눕혀 내 무릎에 머리를 대도록 했다.
이후 그녀의 배에 깍지 낀 손을 올려놓고, 다른 손으로는 스텔라의 머리를 위로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케헥...!”
다소 과감한 행동에 목이 메었는지, 스텔라가 귀여운 기침을 터뜨렸다.
갓 양치를 한 입에서부터 치약 향이 솔솔 올라온다.
씨익 웃은 내가 물었다.
“방향제 냄새 좋지?”
“.....”
“나중에 남은 거 줄게. 집에 갖다 놔.”
“.....”
“알았지?”
눈을 동그랗게 뜬 스텔라는 대답은 하지 못하고 고개만을 주억거렸다.
내가 쓰는 방향제의 향은 굉장히 강하다.
집 냄새에 적응하여 둔해진 코가 다시금 리셋 될 정도로.
이 블랙체리 향의 냄새는 오늘 스텔라가 겪은 강렬한 기억에 뒤섞일 것이다.
여기서 만약 알렉스가 대마초를 빨고 들어온다?
평소엔 눈치채지 못했을 냄새를, 스텔라는 맡게 될 터였다.
쉽게 말해, 방향제는 오늘의 일을 생각하라는 기념비적인 물건인 동시에, 알렉스의 평을 깎아내리는 장치라는 거다.
“영화는 뭐 볼래?”
“.....”
“대답을 해야 장르를 고르지.”
“아, 아무거나... 오빠가 보고 싶은 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우물우물 대답하는 그녀.
실소를 터뜨린 나는 아주 달콤한 로맨스영화를 찾아 틀었다.
@@
덜컥.
문을 연 스텔라가 인사도 없이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지혁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방향제 가져가야지.”
멍한 상태였던 스텔라는, 그 다정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 맞다...”
“모과차도 마시고.”
“모과차... 응... 마셔야지...”
떨리는 손으로 병을 받아든 스텔라는 모과차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지혁을 흘끗거렸는데, 그는 자신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으려는 듯 전방만 주시하고 있었다.
날 봐줘, 나랑 눈을 마주쳐줘.
헤어지기 전까지 얼굴을 보고 싶어.
라고 속으로 되뇌길 한참, 모과차가 바닥을 드러냈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스텔라가 말했다.
“다 마셨는데...”
그제야 고개를 돌린 지혁이 방긋 웃는다.
“잘했어.”
그저 간단한 칭찬일 뿐인데 왜 이리도 심장이 뛰는지.
방금 했던 생각과는 달리, 스텔라는 지혁의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그가 내민 방향제를 받아들였다.
“가, 갈게... 내일 봐...”
“잘 가.”
재빨리 내린 스텔라는 공동현관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마음이 급해서 그런지 숫자를 잘못 누른 그녀.
세 번째가 되어서야 겨우 비밀번호를 입력한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이후 현관문을 바라보니, 지혁이 조수석 창문을 내린 채로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로봇 같은 딱딱한 움직임으로 마주 손을 흔들어준 그녀는, 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타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목을 이리저리 꺾었다.
“아으...”
잔뜩 긴장한 채로 지혁의 무릎에 머리를 계속 대고 있어서 목이 너무 뻐근했다.
하지만 무척 좋았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를 만큼.
마치 지혁의 집에서 봤던 영화의 여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집중을 하지 못해 내용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말이다.
그리고 뭔가 약간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냥 손만 잡고 머리 마사지만 약간 받다가 끝난 것이.
요즘 연인들은 불같은 사랑을 먼저 한다고 그러던데... 지혁은 약간 슬로우 스타터인가?
‘내가 지금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슬로우 스타터인 건 자신이었다.
지혁과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면서 불같은 사랑이라니 어이가 없다.
몇 번이나 헛웃음을 켠 스텔라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알렉스를 찾아보았다.
없다. 휴일이라고 친구들과 놀러 나간 모양이다.
그러려니 한 스텔라가 방향제의 뚜껑을 따고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다 미관상 별로인 것 같아 TV 옆으로 옮겨두었다.
확 퍼지는 블랙체리의 달달한 향기.
순식간에 거실을 뒤덮을 것 같다.
알렉스가 싫어할지도 모르겠는데... 자신의 방에만 둘까?
아니, 박사의 특별한 공정을 거친 방향제라 건강에도 좋다고 했으니... 그냥 거실에 두자.
향기로운 냄새를 음미하며 눈을 감고 있길 얼마 후,
우웅!
가방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지혁이 문자를 보낸 걸까? 잽싸게 백을 뒤적거린 스텔라는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혀로 입술을 핥으며 아쉬워했다.
[지혁이한테 들었어. 나흘동안 쉰다며? 내일은 아델이랑 훈련할래? 내가 가르쳐주고 싶은데 급한 일이 있어서. 미안해.]
지혁이 아닌 세화의 문자였기 때문이다.
‘오빠도 진짜 너무하네...’
그새를 못 참고 세화한테 휴일을 일러바치다니.
그래도 자신이 빨리 경험을 쌓도록 하기 위한 행동이 분명할 테니까 이번만큼은 넘어가주자.
[아니에요, 선배님! 일 잘 보세요!]
곧장 답장을 보낸 스텔라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아델과의 훈련이라... 마침 잘됐다.
훈련 초창기엔 엄한 세화보다는 편한 아델이 훨씬 좋을 것 같아서였다.
성격이 워낙 선해서 질문을 하는데도 부담이 없고, 꼼꼼하게 설명을 해줄 테지.
이참에 아델은 어떤 식으로 디바이스를 충전하는지 물어봐야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