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1화 〉 가까워지는 거리
* * *
[오빠. 뭐해?]
[답장해줘. 나 급해.]
[뭐하냐니까?]
거의 1분 간격으로 온 톡.
알림창에 뜬 내용만을 확인하며 느긋하게 기다린 나는, 마지막 톡이 오고 2분이 지나서야 답장을 보냈다.
[샤워하고 있었어. 뭐가 급한데?]
[노트북 하나 사고 싶은데 뭐가 좋은지 모르겠어. 30만원 미만으로 추천해줄 수 있어?]
노트북 사는 게 급한 거냐?
요즘은 누르자마자 드론으로 배달이 오는데.
그냥 나랑 대화하고 싶다고 말하지, 우리 덜렁이는 속내가 다 보여서 재미있다.
[박사님한테 하나 사달라고 할게.]
[안 받을래. 지금 보영이 언니한테 생활비 받는 것도 죄송해서 죽겠는데... 공짜로 비싼 물건을 받으면 미안할 거야.]
[본부는 비스트 슬레이어들에게 지원을 해주고 있어. 생활용품이나 가전제품 같은 건 그냥 말만 하면 돼. 본부 운영비가 빠듯하긴 하지만 노트북 정도는 남은 예산으로 충분해.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마.]
[빠듯하다고? 더 싫어. 안 받아.]
쓸데없는 고집이 강하구나.
스스로 자립하고 싶은 마음이 큰 모양이다.
[그래, 알았어.]
우우웅!
답장을 보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스텔라에게서 전화가 왔다.
옆에서 자고 있는 실비아를 흘끗 살펴본 나는, 조심스레 방에서 나와 휴대폰을 귀에 가져갔다.
“왜 갑자기?”
통화하고 싶어서. 왜? 내가 전화하면 안 돼?
서로의 마음을 확실하게 확인한 이후, 스텔라의 태도가 묘하게 달라졌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는 느낌.
거의 집착 수준으로 강한 건 아니지만, 그런 느낌을 묘하게 풍겼다.
“아냐. 괜찮아. 근데 이러면 노트북을 어떻게 추천해줘?”
오빠 그런 거 엄청 잘 알잖아. 박사님이 오빠더러 기계광이랬어.
“제품이 머리에 바로바로 떠오를 정도까진 아냐. 그리고 기계광이라고 하신 건 그런 뜻이 아니라...”
나도 알아. 농담 한 번 해봤어. 그럼 그냥 내일 나 데리러 올 때 해줘.
“급하다며?”
내일까진 알렉스 컴퓨터 쓰면 돼. 내가 말했었지? 알렉스가 알바해서 컴퓨터 샀다고.
대놓고 나와 통화하고 싶어서 전화했다 말하면 되지, 정말 솔직하지 못하다.
그 편이 귀엽긴 하지만 말이다.
“말했어. 알렉스는 집에 없나보네? 시간도 늦었는데...”
내일 휴무라 친구들이랑 놀다 온대. 오빠 밥 먹었어?
의도적으로 비스트 슬레이어와 디바이스에 관한 이야기를 피하고 있는 게 티가 난다.
아직 충전 시도를 하지 못한 상태임에도 이 정도인데, 내일부터 여러 음흉한 짓을 시작할 땐 어쩌려는지 걱정된다.
아니, 기대된다고 해야 옳았다.
“먹었다고 했잖아. 기억 안 나?”
그랬나...? 나 혼자라 심심한데 여기로 올래?
덜렁아, 그 말은 듣기에 따라 오해의 소지가 있잖니.
문장 자체가 야해. 그러니까 나 외에 다른 사람한텐 그런 말은 하지 마라.
할 사람도 없겠지만.
“지금 11시가 넘었는데?”
조금 그런가...?
“내일 아침에 일찍 갈게.”
어차피 스케줄이라 일찍 와야 되잖아.
“그럼 어떡하지?”
그냥... 제 시간에만 와.
“알았어.”
우린 분침이 하나 내려갈 정도까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랬음에도 어색한 기운은 전혀 없었다.
풋풋했다. 스텔라 또한 나와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우리 관계는 더 발전했다.
직접적인 고백은 하지 않았지만, 나도, 스텔라도 우리의 거리를 알고 있다.
나 이제 잘래. 졸려. 오빠도 얼른 자. 내일 힘들 텐데...
“알았어. 잘 자.”
오빠.
“응?”
보고 싶어.
이것 보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긴 해도 자신의 감정을 서슴없이 드러내잖은가.
입꼬리가 절로 짜악 찢어진다.
전화는 어느새 끊겨있었다.
부끄러움을 참지 못한 스텔라가 먼저 끊어버린 것이다.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
그리 생각한 나는 옆에서 자고 있는 실비아가 발로 찬 이불을 덮어주었다.
스텔라는 슬슬 아이테르 충전에 대한 강박을 가질 때가 됐다.
아델과 내 사이에서 전전긍긍했던 실비아만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이를 잘 이용해서 스텔라가 성적인 행위에 충족감을 얻도록 해주어야겠다.
**
덜컥.
조수석 문을 연 스텔라가 쑥스러운 몸짓으로 의자에 앉는다.
화장기가 남아있는 게 보이는데, 열심히 메이크업을 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지운 모양이었다.
시간만 더 있었다면 풀 메이크업 상태로 탔겠지.
“잘 잤어...?”
쑥스러운 듯 물어오는 스텔라.
방긋 웃은 나는 물티슈를 꺼내 스텔라의 귀 밑에 남아있는 BB크림을 닦아내주었다.
그에 어깨를 움찔 떤 그녀가 말을 돌렸다.
“오, 오늘 스케줄 뭐였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오빠 내 매니저야. 내가 물어보면 잘 대답해줘야지...!”
“갑질하려는 거야?”
“가, 갑질이라니... 그게 아니라...”
부끄러우니까 홧김에 나온 말인 거, 다 알고 있단다.
피식한 내가 말했다.
“소속사만 잠깐 들르면 돼. 그리고 밥 먹어야 되니까 뒤에 타.”
“.... 나중에 먹을래.”
“얼른.”
“싫어.”
스텔라는 내가 이런 식으로, 마치 우애 깊은 친동생을 챙기듯 자신을 보살펴주는 것을 좋아한다.
항상 주기만 하던 입장에서 받는 입장이 되니 즐기는 것이다.
저 배시시 웃는 얼굴로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을 보면 확실했다.
“잠도 줄여가면서 만들었는데 안 먹는다고 할 거야?”
“누가 안 먹는대? 나중에 먹겠다고 했잖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먹으면 속 더부룩해져. 기름기 있는 음식 먹으면 더 그래.”
화장까지 다 해놓고 일어나자마자라니.
그냥 나랑 같이 대화하면서 가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그러냐.
헛웃음을 켠 내가 말했다.
“지금까진 잘 먹어놓고 왜 투정이야? 그럼 내일부턴 과일 가져온다?”
“그것도 싫어. 오빠가 해주는 밥 맛있어. 얼른 출발해. 늦겠다.”
나는 평소와는 다르게 자동운행모드로 돌려놓고 목적지를 설정했다.
천천히 움직이는, 선팅이 아주 잘 되어있는 차.
자유로워진 손으로 기지개를 편 나는, 스텔라를 쳐다보며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안전벨트를 매라는 뜻. 그에 스텔라가 차창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머리를 기댄다.
안간힘을 쓰며 못 본 척을 하고 있는데, 속이 훤히 드러나서 어이가 없다.
저건 내가 매어주라는 행동이었다.
콧방귀를 낀 나는 스텔라의 뒷목으로 손을 뻗었다.
돌발적으로 일어난 일. 깜짝 놀란 스텔라가 온몸을 흠칫 떤다.
찬바람에 식은 그녀의 뒷목. 근육이 놀라 뻣뻣해져있다.
부드러운 잔머리를 위로 들추고 목을 살살 주물러주자, 스텔라의 표정이 나른하게 변해간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부드러운 명령조로 말했다.
“벨트 매.”
“.... 아, 알았어...”
이번엔 순순히 내 말에 따른 스텔라가 조심조심 벨트로 손을 가져간다.
슬쩍 디바이스를 살펴보니 빛은 물론 소리조차 나지 않고 있다.
이런 걸 성적인 행위로 생각하지 않고 있는 건가? 꽤나 아쉽다.
말없이 마사지를 해주길 한참, 스텔라의 고개가 완전히 뒤로 젖혀졌다.
두 다리를 딱 붙이던 자세는 무릎을 붙이고 발끝이 벌어진 자세로 바뀌었다.
꽤나 야한 포즈. 그녀의 다리 위로 가디건을 덮어준 내가 나긋한 투로 물었다.
“좋아?”
“응... 좋아... 더해줘...”
대사도 야릇하다.
우리 덜렁이는 은근히 색기가 있다는 말이지.
아니면 내 머리에 색마가 끼었거나.
스텔라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자신의 손톱을 툭툭 뜯어내려 하고 있었다.
감정이 요동치고 있다는 방증.
나는 스텔라를 나무라지 않고 어깨선과 이어지는 경추 부근까지 손을 내려 그 부위를 꾹꾹 눌렀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웅...
스텔라의 디바이스에서 아주아주 자그마한 소리가 들렸다.
눈을 빛낸 나는 스텔라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소리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그저 눈을 감은 채 입을 살짝 벌리고만 있다.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좋아.’
이대로 수위를 늘려 가면 된다.
처음엔 약하게, 그러다 그 약한 수위에 아쉬워할 쯤 되면 강도를 높여서.
마치 마약 중독자들이 처음엔 대마초로 시작하다가 종국엔 중독성이 높은 마약을 찾듯, 그렇게 늪으로 끌어내리는 거다.
**
“진짜 어쩔 뻔했냐. 통과 직전이어서 망정이었지... 만약 괴물이 나타난 장소에 있던 도중 습격당했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너네 죽을 수도 있었어. 알아?”
걱정이 잔뜩 담긴 최승환의 말에, 스텔라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네... 그렇죠...”
“경상으로 그쳤다니까 다행이다. 둘 다 괜찮아 보이네. 근데 차는? 카센터에 있어?”
스텔라의 안색이 약간 어두워졌다.
사람 걱정을 하다가 곧바로 자동차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니, 최승환에게 아주 약간 실망한 듯했다.
그녀의 옆에 앉아있던 내가 대답했다.
“예. 넣어놨는데 몇 달 걸릴 거래요.”
“많이 망가졌냐?”
“엔진 쪽 장치가 다 박살나서요. 요새 부품 구하기가 힘들다고 하네요. 견적은 저희 소속사로 청구해달라고 했습니다.”
“뭔... 보험회사에 연락하면 되지 왜 다이렉트로 소속사에 청구를 해?”
“자차에 괴물로 인한 파손보험이 없더라고요.”
그 말에 최승환이 황당하다는 듯 혀를 찼다.
“돈만 빼갈려는 수작질인데 그딴 걸 누가 쳐 넣냐고... 천재지변으로 처리해주면 덧나나? 이 양아치 같은...”
보험사에 욕지거리를 쏟아내려던 최승환이 스텔라의 눈치를 보더니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여기까진 뭐 타고 왔는데?”
“보영이 누나 차요.”
“그러냐? 갈 때 희주한테 열쇠 하나 받아가. 밴 새로 뽑았으니까.”
“중고요?”
“중고는 무슨... 새 차야 임마.”
쪼잔해 보여도 해야 할 땐 하는구나.
아니면 보영한테 한소리 들었나?
옆을 흘끗 보니 스텔라가 무척 좋아하고 있었다.
누가 사용했던 자동차가 아닌 새로운 차라서 저러는 것이다.
딱 보니 새로운 보금자리에 뭘 집어넣을지 고민하고 있겠구나.
스텔라의 헤벌쭉해진 얼굴을 보고 황당한 표정을 짓는 최승환.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내게 말했다.
“운전하는데 지장 없었지?”
“예.”
“그럼 내일부터 다시 스케줄 들어가자. 괜찮지?”
“의사선생님께서 후유증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며칠 쉬라고 하셨는데... 바로 스케줄 들어가면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요 며칠은 내가 운전하면서 스텔라 데리고 다니지 뭐. 할 것도 없는데 잘됐네.”
그 말에 스텔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진짜 매니저를 보여주겠다며 꺼드럭거리는 최승환을 흘겨본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 대표님. 의사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지혁이 오빠한테 한 게 아니라... 저한테 한 거예요.”
“응?”
“저더러 며칠 쉬라고 하셨어요... 지혁이 오빠가 아니라...”
“그, 그러냐...? 미리 말이라도 하지...”
왜겠니. 지금 지어낸 거짓말이니까 그런 거지.
자신의 새 보금자리에 자신과 내가 아닌 타인이 들어오는 게 싫어서 말을 지어내고 있는 거다.
스텔라가 최승환 몰래 내 다리를 약하게 꼬집는다.
도와달라는 뜻. 작게 헛기침을 한 내가 말했다.
“병원에서 전화 드렸을 때 말했었습니다.”
“그랬어...? 난 왜 기억이 안 나지...?”
“그때 바쁘셨나보네요.”
“딱히 바쁘진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요새 자꾸 깜박깜박하긴 해. 그럼 뭐... 한 사나흘 푹 쉬면 되나?”
스텔라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일주일 정도는 쉬라고 하셨는데...”
“일주일?”
최승환이 약간 곤란해 했다.
그러자 스텔라가 선심 쓰겠다는 듯 어깨를 폈다.
“그, 근데 저도 빨리 일하고 싶으니까, 한 나흘만 쉬면 될 것 같아요!”
“나흘 정도면 충분히 쉴만하지. 괜찮겠어?”
승환아, 웃음기 좀 지워 이 새꺄.
함박미소를 짓고 저런 말을 하면 스텔라가 무슨 생각을 하겠니?
“전 괜찮아요.”
“이제 프로 연예인 느낌이 좀 나네. 내가 최대한 바쁘지 않게끔 조절 잘 해볼게. 우리 열심히 하자. 오케이?”
“네, 대표님!”
이어서 몇 마디 시덥잖은 주제가 오고 갔고, 회의는 그렇게 끝이 났다.
스텔라와 함께 사무실을 나온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스텔라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왜 굳이 그런 거짓말을 한 거야?”
“.... 쉬, 쉬고 싶으니까. 요새 너무 달려왔어.”
“언제는 바쁜 게 더 좋다면서.”
“그, 그건 내가 비스트 슬레이어가 되기 전이니까... 난 이제 훈련도 해야 되잖아. 적당한 휴식도 필요해.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해. 여기 소속사야. 대표님이나 희주 언니가 들을 수도 있어.”
제가 늘어놓듯 다 말해놓고... 쯔쯔...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탕비실 문이 열리더니 천희주가 나왔다.
우리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하던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목을 가린 스텔라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시계 샀어? 엄청 예쁘네?”
“아... 이거... 치, 친척한테 선물 받은 거예요.”
“브랜드 어디 거야?”
“시계는 잘 몰라서... 근데 언니, 데뷔곡 반응 궁금한데 댓글 봐도 돼요?”
“안 돼. 넌 댓글 보지 말라고 했잖아. 순진해서 악플 같은 거 보면 상처받을지도 몰라.”
능숙하게 말을 돌리는 솜씨가 제법이다.
그나저나 본의 아니게 나흘의 휴가가 더 생겼는데... 잘됐다.
이때 관계를 확 앞당겨놔야지.
알렉스도 더욱 깊은 심연으로 끌어당길 겸.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