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8화 〉 새로운 이름 #2
* * *
오랜만에 다시 온 스텔라의 집은 여전했다.
깔끔하고, 대마초 냄새가 약간 섞인 방향제 냄새가 나고...
매일 이 냄새를 맡고 살아서 알렉스가 마약을 하는 줄 모르는 건가?
우리 덜렁이는 몹시 둔해서 탈이다.
“얘기는 잘 끝났어? 대표님한테 문자 왔는데 푹 쉬래.”
내게 주스를 가져다준 스텔라의 말이었다.
“잘 수습했어.”
“응...”
맞은편에 앉은 스텔라가 애꿎은 컵만 만지작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
한창 예민한 상태일 게 분명하니만큼 괜한 장난은 치지 말자.
주스를 한 모금 들이켠 내가 물었다.
“아직도 혼란스러워?”
“당연하지... 내가 하루아침에 비스트 슬레이어가 됐는데...”
“내가 원망스럽지는 않아?”
“그래야할 이유라도 있어?”
“열심히 가수생활을 한 너를 변신...”
스텔라가 한손을 약간 뻗어 내 말을 끊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가 쑥스럽긴 한데... 변신해보니까 알겠더라. 난 비스트 슬레이어가 될 운명을 타고났다는 걸. 선배님들한테도 여쭤봤는데... 다 나랑 똑같은 기분을 느꼈대.”
혹시 다른 이상한 기분은 못 느꼈니?
로사리오라든가... 마기라든가...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날 바라본 스텔라가 말을 이었다.
“아이테르가 날 적합자로 선택한 거고... 오빠랑 본부 분들은 그 적합자가 나라서, 인성도 볼 겸 진지하게 접근했던 거고... 맞아?”
“대충 맞아.”
“미리 말해줬으면 내가 절대 믿지 않았겠지? 그래서 몰래... 날 속이면서까지 매니저로 위장한 거지?”
“비슷해.”
“박사님께서는 내가 가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최대한 편의를 봐준다고 하셨거든...? 이래도 돼? 나 혼자만 일 안 하고 노는 것처럼 보이는데...”
저 고운 마음씨를 보라.
빨리 검게 물들이고 싶어서 미치겠다.
“네 꿈은 가수잖아. 지구를 지키는 영웅이 아니라. 그러니까 괜히 책임감 같은 거 가질 필요 없어.”
“무슨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해? 오빠는 본부 사람이잖아...!”
발끈한 스텔라의 언성이 약간 높아졌다.
그녀의 가슴 속에 내재된 정의감, 영웅심이 내 말에 자연스레 반발하는 것이다.
고개를 약간 숙여 한 발 물러선 나는 순순히 사과하기로 했다.
“미안해. 가뜩이나 데뷔 초라 바쁜데, 더 일시키기 싫은 마음에 실언했어.”
“하아... 오빠 마음은 이해해. 이해하는데... 난... 이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한 번 해보고 싶어.”
“알았어. 하지만 최우선 순위는 가수 일이야. 그건 알아둬.”
스텔라의 눈빛이 약간 누그러졌다.
자신을 케어해준다고 생각하는 모양.
입술을 빨아들여 잘근잘근 깨물던 그녀가 물었다.
“응... 나 이제 뭐하면 돼?”
“스케줄 없을 때 동료들 만나서 친목을 다지는 게 먼저라고 봐. 그리고 세화랑 같이 훈련해.”
“아, 알았어... 나한테 알려줄 다른 정보 같은 건 없어?”
가장 중요한 정보가 있지.
너와 나의 관계를 크게 발전시키는 장치가 하나 있단다.
“디바이스 밑 부분에 버튼이 있을 거야. 거기에서 색이 다른 버튼을 눌러보면 충전량 표시가 나오거든? 한 번 눌러봐.”
“응.”
순순히 내 말에 따른 스텔라가 버튼을 누르자, 그녀의 눈앞에 홀로그램 숫자가 떡하니 나타났다.
신기했는지 숫자를 향해 손을 휘적거려본 스텔라가 날 바라보았다.
“90퍼센트래. 오빠도 보여?”
90퍼센트라. 꽤나 오래 변신했던 것치고는 상당히 많이 남았다.
로사리오 이년은 세화, 유리아의 아이테르는 조루처럼 만들어놨으면서... 차별대우가 심하다.
“당연히 보이지. 그건 아이테르의 현재 에너지량인데, 다 떨어지면 변신을 못해. 틈틈이 충전해두는 게 좋아.”
“그, 그래...? 어떻게 해? 충전기 같은 거 있어? 휴대폰처럼 충전하면 되나?”
온 우주를 통틀어 봐도 손에 꼽는 에너지인데, 휴대폰 방식으로 충전하면 너무 모양이 빠지잖아.
고개를 가로저은 내가 말했다.
“아니. 충전방식은 따로 있는데, 이건 세화한테 듣는 게 좋겠어. 아니면 아델한테 물어봐도 되고.”
내 입으로 직접 말한다면 스텔라가 괜한 오해를 할 수가 있었다.
가령 자신과 그렇고 그런 일을 해보기 위해 접근한 건가? 라는.
물론 스텔라의 성정 상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겠으나 껄끄럽다고 생각하긴 할 터였다.
관계가 여기서 더 발전하면 그런 마음도 사라지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세화나 아델에게 설명을 듣도록 하는 편이 나았다.
“왜? 오빠는 잘 몰라?”
“잘 모르는 건 아니고... 내가 손톱 물어뜯지 말랬지?”
손톱을 이빨로 가져가려던 스텔라가 움찔하며 손을 내렸다.
그러더니 배시시 웃으며 사과한다.
“미안.”
최근 자주 저러는데 걱정이다.
덕분에 성공적으로 화제를 돌릴 수 있었지만 말이다.
남은 주스를 전부 마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스텔라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묻는다.
“벌써 가려고?”
“너 오늘 쉬게 둬야지.”
“맨날 쉬어, 쉬어... 나더러 잠만 자라는 거야? 왜 계속 똑같은 말만 해? 로봇이야?”
“네 매니저인데 건강 챙기라고 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야?”
할 말이 없어졌는지 입을 꾹 다무는 스텔라.
약간 서운한 표정이 감돌고 있는데, 내가 선을 긋는 것 같아서 실망한 모양이었다.
입을 삐죽 내민 그녀가 현관문 앞에서 날 가로막더니 말했다.
“나가서 밥 먹자. 패딩 입을 테니까 기다려.”
“본부에서 먹지 않았어? 아델이 이것저것 줬다고 했는데.”
“배고파졌어.”
말을 하는 스텔라의 얼굴엔 낭패감이 가득했다.
전혀 배고프지 않은데 날 붙들려고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는 증거였다.
차라리 커피라도 마시고 가라 하지...
덤벙대는 스텔라를 보며 코끝으로 가볍게 웃자, 그녀가 날 빤히 올려다보았다.
“왜 웃어...?”
“웃기니까 웃지.”
우린 그 상태로 잠깐, 찰나의 시간동안 서로를 마주보았다.
제대로 말리지 않아 푸석푸석해 보이는 머릿결 사이, 그 안에 보이는 스텔라의 하얀 뺨.
그게 점점 빨갛게 물들어지는 것이 눈에 보인다.
날 응시하던 스텔라가 눈을 끔벅거리면서, 그녀의 완만하게 휘어진 속눈썹이 위아래로 빠르게 움직인다.
분홍빛이 감도는 입술이 무척 탐스럽다.
예쁘다. 심지어 귀엽기까지 하다.
왜 스텔라의 팬층이 순식간에 두터워졌는지 새삼 느껴진다.
순간의 유혹을 참지 못한 나는, 나도 모르게 스텔라의 머리 사이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들어 머리를 정리해주는 척했다.
그리고 스텔라는,
“.....”
얌전히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평소처럼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강아지가 주인의 손에 털을 맡기듯 말이다.
다만 한 가지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트득... 트드득...
스텔라가 벽에다 손톱을 긁었던 것이다.
정신병이 있는 사람마냥, 손톱이 휘어질 정도로 긁는 건 아니었다.
굳이 예를 들자면 내성적인 소녀가 부끄러움을 표출할 때와 비슷했다.
새롭게 생긴 버릇이 빠르게 정착하여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은데...
물어뜯는 게 아니라면 굳이 제지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런 행동으로 스텔라의 감정을 살필 수 있으니까.
어쨌거나 현관문은 무척 조용했다.
디바이스가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델이나 실비아의 경우 이런 사소한 스킨십 하나만으로도 충전이 됐는데, 스텔라의 경우는 아니었다.
스텔라가 날 남자로 보지 않고 있다는 건 아니다.
그녀는 날 마음에 두고 있다. 이건 확실하다.
그런데도 충전이 안 된다는 것은, 스텔라가 이러한 스킨십을 성적인 행위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저 서로 마음이 있는 사람들끼리의 풋풋한 애정표현.
이 정도쯤으로 생각하고 있겠지.
다만 디바이스의 충전방식을 듣는다면, 이런 행위로도 얼마든지 충전할 수 있겠지.
아이테르는 적합자가 어떠한 마음을 먹었는지에 따라 충전이 되고 안 되고 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런 풋사과 같은 방식의 충전을 원하는 건 아니다.
난 스텔라와의 격한 행위로 디바이스를 가득 채우길 바란다.
그리고 조만간 그렇게 될 거다. 이제 머지않았다.
그녀의 한쪽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준 내가 말했다.
“나가서 밥 먹지는 말고, 여기서 간단하게 먹자. 토스트 같은 거. 어때?”
그에 스텔라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우웅!
그와 동시에 울리는 스텔라의 휴대폰.
화면을 확인해본 그녀가 부끄럼이 가득한 투로 대답했다.
“난... 좋아. 잠깐만... 아델라인 선배님한테 톡 와서...”
“뭐라고 왔는데?”
“시간 날 때 연락 달라고 하시는데... 이모티콘도 엄청 잘 쓰신다. 봐봐.”
내게 모든 걸 오픈하겠다는 듯 휴대폰을 보여주는 스텔라였다.
아델이 보낸 톡을 대충 읽어본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은 항상 저래.”
“진짜 귀여우시지 않아? 나랑 잘 맞을 것 같아.”
떠보는 건지, 진심으로 공감해달라고 묻는 건지 헷갈린다.
이럴 땐 말을 돌리는 게 아주 잘 먹힌다.
“저번엔 세화가 비스트 슬레이어 중에서 가장 좋다더니, 금세 바뀐 느낌이네?”
“수, 순위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기로 했어. 나도 이젠 그거잖아.”
제 입으로 비스트 슬레이어라고 말하기가 창피한 듯싶다.
아니면 쑥스럽거나.
실소를 지은 채로 가만히 있자, 스텔라가 내 옆을 쓱 지나갔다.
토스트기를 준비하던 그녀가 별 것 아닌 투로 물었다.
“근데 오빠. 아델라인 선배님이랑은 동갑인데 왜 서로 존대해? 선배님이 오빠를 대하시는 걸 보면 사이도 좋은 것 같은데...”
“그게 이상해?”
“이세화 선배님한텐 반말하면서 아델라인 선배님한테는 존댓말을 하는 게 이상하긴 해. 일관성이 전혀 없잖아.”
질투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신경이 쓰이긴 쓰이나보다.
스텔라가 빵을 꺼내는 것을 도와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별 이유는 없어. 처음 만났을 때 존댓말을 했고, 그게 버릇처럼 굳어진 것뿐이야.”
“그래...? 서로 존중해주는 것 같아서 보기 좋더라.”
“너한테도 해줘?”
“절대 하지 마. 낯설 것 같아.”
내가 존대를 하는 모습을 상상이라도 했는지, 스텔라가 팔을 부르르 떨었다.
피식한 나는 냉장고를 가리켰다.
“잼 먼저 꺼내.”
“응. 우유도 마실 거지? 아델라인 선배님이 주신 딸기우유로 마실까? 아니다. 선배님이 나만 마시라고 하셨으니까... 오빠는 흰 우유로 해.”
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는구만.
아델이 기뻐하겠어. 자신을 무척 잘 따르는 후배가 생겨서.
잼을 꺼낸 스텔라는 주머니에서 머리끈을 꺼냈다.
그리고는 말없이 내게 내밀더니 등을 돌렸다.
묶어달라는 뜻.
하나하나 다 챙겨줬던 아델만큼은 아니지만, 스텔라도 은근히 이런 애 같은 구석이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한데 모은 나는,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어주면서 뒷덜미를 바라보았다.
군데군데 삐져나온 잔머리가 제법 섹시하다.
나는 검지손톱으로 스텔라의 뒷목을 약하게 찔렀다.
그러자 그녀의 어깨가 움찔하더니 살짝 올라갔다.
반발하는 기색은 전혀 없다. 순종적인 이 어린 양을 덮치고 싶어서 미치겠다.
욕구를 간신히 가라앉힌 내가 무덤덤한 투로 말했다.
“피어싱 빼자.”
“오빠가 빼줘.”
“어떻게 빼는지 잘 몰라.”
“그냥 뒷부분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리면 돼. 링은 내가 잡고 있을게.”
그냥 혼자 빼는 게 훨씬 수월할 텐데도 번거로운 일을 자처해서 한다.
날 향한 스텔라의 마음이 그대로... 아니, 더 커졌다는 방증.
내게 속았다는 부분에 대한 실망감이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았나보다.
다행이었다. 이제부턴 진도를 빠르게 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스텔라의 피어싱 볼을 돌리던 내가 말했다.
“네가 비스트 슬레이어로 활동할 땐, 로제라는 가명을 쓸 거야.”
“로제? 독일어네?”
“별로야?”
“엄청 마음에 들긴 하지만... 장미는 보통 빨간데...”
“화이트 로즈, 바이세 로제라고 하면 허접하고 유치해보이잖아.”
그 말에 스텔라가 픽 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맞는 말이네. 그냥 로제로 할래.”
그래, 넌 이제부터 비스트 슬레이어 로제... 아니, 이블 발키리 로제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거야.
사랑, 순결 등을 상징하는 백장미에서,
죽음, 증오를 상징하는 흑장미가 되는 날까지, 더 나아가 되고 나서도 잘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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