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소녀물 야겜 속 최종보스가 되었다-373화 (373/471)

〈 373화 〉 구원투수 #2

* * *

툭.

벙커의 내벽을 두드려본 나는 속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시설이 꽤 나쁘지 않다.

강도가 무척 뛰어난 합금으로 내외부를 두르고, 지하 깊숙한 곳에 있어서 웬만한 마물들의 공격으론 뚫기가 힘들 듯했다.

하지만 저건 인간들 기준.

내 입장에선 움막보다 못한 곳이 이 벙커였다.

폴리머스를 제외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금속들은 A급 이상인 마물의 공격을 버티지 못한다.

얼마나 단단하든지 간에 말이다.

벙커 안은 아주 휑했다.

넓이에 비해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어림잡아도 천 명은 너끈히 수용할 것 같은데, 식량창고에서 근무하는 공무원 한 명을 빼면 다섯이 끝.

벙커가 많아도 너무 많아서 일어난 일이었다.

세금 한 번 거하게 쏟아 부은 결과인데,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국고를 털었으니 칭찬해줄만 하긴 하다.

“오빠...”

약간 어둑한 구석자리에서 벙커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나는, 스텔라의 호출에 고개를 돌렸다.

눈동자를 데굴 굴리고 있는 그녀.

벙커 안엔 외부를 볼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어서 불안한 듯했다.

등장한 세화를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다는 아쉬움도 있으리라.

그녀와 눈을 맞춘 나는, 내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머리에 씌워주었다.

이후 챙을 잡고 내리자 얼굴 태반이 가려졌다.

“괜찮아. 금방 끝날 거야.”

“응... 근데 모자는 왜...?”

턱을 들어 시야를 확보한 스텔라의 물음.

웃음이 새어나온다. 하지만 참자.

지금은 마물이 출현한 비상사태니까.

“누가 알아보면 안 되잖아.”

“여기 알아볼 사람이 누가 있다고... 사람도 없구만...”

틱틱대면서도 내가 씌워준 모자는 절대 벗지 않으려는 모습이 깜찍하다.

뺨이 약간 발그레해진 것 같은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차에서 가져온 담요를 여민 스텔라가 말했다.

“춥다... 그치?”

“그럼 차에 있자.”

“응.”

우리 덜렁이는 말도 잘 듣고... 너무 기특하다.

나는 은근슬쩍 스텔라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어깨를 살살 주물러주며 차로 향했다.

스텔라의 봉긋한 가슴 옆부분이 갈비뼈에 닿을 정도로 과감한 신체접촉.

차에서 손을 잡았을 땐 비상상황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오해를 살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스텔라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내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려고 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의존증으로 갈 수준까진 아니지만, 그만큼 날 의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스텔라를 차에 태우려던 나는,

[상황종료. 세계연합 대한민국 지부와 비스트 슬레이어 본부에서 괴물 처리반이 오고 있습니다. 잠시 후 벙커 문이 열리면 모두 나가주시길 바랍니다.]

벙커 안에서 안내방송이 들려오자 히죽 웃었다.

“끝났나보다.”

“1시간도 안 됐는데 벌써? 분명 우리가 여기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엄청 큰 괴물이 나타나려고 했었는데...”

“몸집이 크다고 해서 힘도 강한 건 아니지.”

“그렇긴 해... 그나저나 얼마 만에 나타난 거지? 엄청 오랜만 아니야?”

“거의 두 달 정도는 공백기가 있었던 걸로 알아.”

“이제 다시 지구를 넘보기 시작하는 건가?”

지구는 이미 내 수중 안이란다.

어깨를 으쓱인 내가 질문을 얼버무렸다.

“글쎄...”

“아... 뭔가 아쉽다.”

“뭐가?”

“레오나 보고 싶었는데...”

변신하지도 않은 한낱 인간의 눈으로 싸우는 장면을 볼 수나 있을까?

상황이 종료됐다고 하니 태평한 소리를 늘어놓는 스텔라였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질 것이다.

차로 올라 시동을 건 나는, 귀에 한손을 가져간 채로 무언가를 듣고 있던 공무원이 마이크에 입을 가져가자 귀를 쫑긋했다.

“차량으로 오신 분들은 문이 열리면 바로 나가시면 됩니다. 도보로 오신 분들께서는 지하철로로 수송기가 오고 있으니 잠시 대기하세요. 바깥 도로에 초록색 액체가 여기저기 있는데, 차량 타이어로 밟아도 상관없습니다. 무해한 액체니 걱정하지 마세요.”

큰돈을 들여 벙커를 만들어놨는데 관리자는 한 명뿐이라니... 고생한다.

옆을 바라보니 스텔라가 담요를 덮고 있는 손으로 안전벨트를 매려 하고 있었다.

그런 스텔라의 앞으로 손을 뻗어 벨트를 버클에 끼워주자, 그녀가 배시시 웃는다.

새하얀 이가 돋보이는 시원한 미소.

마주 웃어준 내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선 이러면 안 돼. 칠칠맞다고 욕해.”

“내가 대표님이나 보영이 언니 앞에서 이러는 거 봤어?”

이는 달리 말하면 내가 무척 편하다는 뜻이었다.

“못 봤지.”

“거봐. 근데 오빠. 아까 괴물 나타나기 전에 엄청 침착하던데...”

“왜? 이상해?”

“아니. 믿음직스럽다구. 회의엔 안 늦겠지?”

“빠듯하긴 한데... 솔직하게 말하면 넘어가줄 거야. 그리고 가까운 곳에서 나타난 괴물이라, 회의 때 분명히 이야기가 나올 거야. 괜히 신나서 떠들지 말고 조용히 넘어가. 알았지?”

“응.”

철컹­!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앞에 있던 거대한 합금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밖으로 열렸다.

마물 포탈이 나오느라 어둑해졌던 하늘은 다시금 푸르러진 상태.

곧장 차를 몰고 나가던 나는 주변에 산재한, 점성이 꽤나 있는 기분 나쁜 초록색 액체들을 보았다.

스텔라 또한 그것들을 발견하고는 인상을 구겼다.

“저게 뭐야...? 김 나는데...”

“마물의 피겠지.”

“마물? 괴물이 아니라?”

대중들에게 괴물이라 불리긴 하는데, 공식명칭은 마물이라고!

세계연합 개새끼들아, 너희들도 잘 알고 있잖아.

그러니까 괴물이라 부르지 말라고 홍보 좀 해!

“그래, 괴물의 피.”

“징그럽다... 레오나가 괴물이랑 싸우면서 피 묻었으면 어떡하지? 기분 나쁠 텐데...”

이상한 걱정은 그만두고 위에 좀 봐봐.

휴양지의 바다처럼 반짝반짝한 하늘색 기운이 공중에 가만히 떠 있잖아.

조수석 창문에 손을 대고 밀착한 채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스텔라는, 내 바람대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어?”

의아한 감탄사를 터뜨리는 그녀.

멀찍이 떠있는 세화를 본 듯싶다.

그녀는 곧 한쪽 팔만 뒤로 뻗어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내 팔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오빠...! 오빠!”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니 나에게도 보여주고 싶은가보다.

“왜?”

“지금 하늘에...”

스텔라가 상기된 목소리로 말을 하는 순간이었다.

화아아악­!

일렁이던 하늘색 기운이 공중으로 물결처럼 확 퍼져나가더니, 가운데에서 하늘색 실 같은 것이 내려와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는 차량을 따라왔다.

마치 자아를 가진 듯한 그것은 조수석 부근에서 멈추었고, 스텔라를 훑다시피 했다.

호기심이 많은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이는 세화와의 상의를 통해 미리 정해둔 효과였다.

실상은 그 어떤 의미도 없지만, 스텔라의 변신을 위한 사전 떡밥.

그리고 운명의 실타래가 이어졌다는 느낌을 받도록 하는 연출이었다.

“아...!”

저 반응을 보니 제대로 먹혀들었구나 싶다.

스텔라는 곧 조수석 문을 열고 실을 만지려고 했다.

하지만 실은 그녀의 손이 닿을 때쯤 사라졌다.

세화가 타이밍에 맞춰 기운을 거두어들였기에 일어난 일.

“.....”

운전석에선 스텔라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분명히 아쉬워하고 있으리라.

속도를 줄인 내가 물었다.

“하늘에 뭐?”

그러자 퍼뜩 정신을 차린 스텔라가 위를 보았다.

무척 고요하고 청명한 하늘.

레오나가 사라졌음을 직감했을까?

그녀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더니, 담요를 목까지 끌어왔다.

복잡한 얼굴로 무언가를 깊게 고민하던 그녀가 중얼거렸다.

“뭐지...?”

뭐긴, 세화가 널 운명의 동료로 점찍은 거지.

혼란스러워하던 그녀가 날 돌아보며 대답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

“예, 형님. 시간에 딱 맞춰서 왔고, 스텔라도 괜찮습니다. 차도 무사하고요.”

­다행이네. 뉴스 보면 S급이라는데... 레오나가 빨리 달려가 줘서 피해가 건물 몇 채 외엔 없다고 하네? 괴물 면상은 봤어?

“아뇨. 나타나기 전에 벙커로 들어와서요. 레오나가 출동하는 건 봤어요.”

­그래? 어땠냐?

“그냥 하늘색 빛무리가 괴물의 입을 향해 쏘아진 게 전부에요.”

­그거 화젯거리로 써도 될 것 같지 않아?

최승환과 통화를 하던 내가 잠시 침묵했다.

“.... 예?”

­인지도를 더욱 키울 수 있는 기회잖냐. 안 그래도 스텔라가 비스트 슬레이어들을 좋아하는데, 레오나를 실제로 봤으니까 지금쯤 흥분하지 않았을까? 예능이나 뉴스에 써먹어도 좋을 것 같은데... 어때?

사업수완이 전혀 없구만.

마물들이 조롱거리가 되고 비스트 슬레이어가 연예인보다 더욱 큰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지금이긴 하지만, 이런 건 먼저 말하면 안 된다.

스텔라를 상품처럼 취급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는 개인적으로 반대입니다. 괴물이 나타난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없어졌던 경각심이 다시 깨어나서 대중들 모두 민감해할 게 뻔해요. 그런 와중에 비스트 슬레이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이미지가 깎일 거라고 봅니다.”

차라리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한테 힘내라고 비공식적인 기부 몇 푼 해주고, 은근슬쩍 정보를 흘려서 매스컴을 타게 하면 훨씬 좋은데...

욕심에 눈이 멀었구나 돼지새꺄.

­일 리 있는 말이네. 알았다. 우리 지혁이... 감 살아있는데?

또 우리 지혁이... 뒤진다 진짜.

“감사합니다.”

­네 말대로 일단은 없었던 일로 하자. 수고하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라.

“예.”

전화를 끊은 나는 박사가 보내준 레오나의 동영상 클립을 켜놓고 스텔라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기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스텔라가 들어와 힘없이 소파에 앉았다.

그녀가 들고 있는 서류뭉치를 가져온 내가 담요를 내밀며 물었다.

“회의는 잘 끝났어?”

“응. 컨셉 회의하고, 기본 대본 받았어.”

“괴물 얘기는 안 나왔고?”

“나왔는데 잠깐이었어. 피디님이랑 스탭들이 나한테 봤냐고 물어보셨는데... 자느라 못 봤다고 둘러댔어. 거짓말하느라 식은땀 났잖아.”

“잘했어.”

스텔라의 얼굴이 환해졌다.

칭찬을 들으니 기쁜 듯한 모습이었다.

담요를 히잡마냥 머리에 두른 스텔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스케줄은 여기가 끝이지?”

“일단은.”

“그럼 빨리 돌아가자. 나 오늘 진짜 피곤해. 근데 뭐 보고 있었어?”

“레오나 전투 영상. 10초 정도 유출됐는데 확인해보고 있었어.”

“지, 진짜...? 나도 볼래...!”

황급히 한손을 뻗어 내 휴대폰을 빼앗으려는 스텔라.

그러면서도 담요가 떨어지지 않게 꼭 붙들고 있는 모습이 웃기다.

혀를 찬 나는 마지못한 척 스텔라의 손에 휴대폰을 쥐어주었다.

그녀는 곧 눈을 초롱초롱하게 뜬 채로 휴대폰 화면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와아아...!”

이따금 하이 톤의 탄성까지 터뜨리며, 고작 10초짜리 영상을 몇 번이나 되돌려보는 그녀.

일부러 멋진 장면을 선별했는데 제대로 먹힌 듯싶다.

여기서 아까 있었던 세화와의 교감까지 합하면, 스텔라는 오늘 집에 들어가서 온갖 망상을 하며 밤잠을 설치겠지.

이제 슬슬 마지막 디바이스를 주인에게 줄 때가 된 듯싶다.

타이밍은 지방에서의 행사, 혹은 촬영이 끝나고 돌아올 때가 딱 좋을 것 같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