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2화 〉 데뷔 준비
* * *
“희주 언니, 안녕하세요.”
“안녕. 10분 뒤에 회의 있거든? 지금 들어가서 대기하고 있어.”
“네.”
스텔라를 뒤따라 소속사로 들어온 나는, 인포데스크 여직원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누나.”
천희주.
경력은 단 하나도 없는, 갓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선 초년생이었다.
최승환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딱 하나 좋은 게 있었다.
바로 눈이 쓸데없이 높은 것이다.
놈이 뽑은 천희주는 연예인만큼은 아니지만 예쁜 사람이었다.
쌍꺼풀이 없지만 눈이 무척 컸고, 입이 커서 웃는 모습이 괜찮았다.
나는 입사 동기라 할 수 있는 그녀와 빠르게 친해졌다.
물론 연기였다.
천희주는 오로지 스텔라의 감정을 건드리기 위한 소모품, 메이크업 샵의 이지안과 똑같은 존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니까.
“지혁이 왔어? 밥은?”
“먹었죠. 누나는요?”
“난 늦잠자서 못 먹었어.”
“샌드위치 먹을래요? 새거 하나 남았는데.”
“진짜? 먹을래.”
나는 베이컨 샌드위치를 희주에게 내밀면서 스텔라의 반응을 살폈다.
약간 질투심이 섞인 묘한...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할 의도였지만, 스텔라의 표정은 그냥 평소의 순둥한 모습이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뜻.
갈 길이 멀구나. 마음이 아프다.
샌드위치의 포장지를 뜯던 천희주가 묻는다.
“소속사 앞에 대기하고 있는 팬들 봤지?”
“봤죠. 엄청 많던데. 사진도 찍혔어요.”
“스텔라?”
“네.”
비단 스텔라뿐만이 아니라, 이를 갈며 내 사진을 찍어간 팬들도 많았다.
팬카페에 내 사진이 올라가면 욕 좀 먹으려나?
안 그래도 수명이 긴데, 더 오래 살겠구나 싶다.
내 질린 표정을 본 천희주가 킥킥거렸다.
“수백 년간 여러 아이돌, 가수, 배우들이 나타나면서 팬 문화가 굉장히 성숙해졌다고 봤는데... 겪어보지 않은 기자들이 대충 쓴 기사였나 보네?”
“그래도 면전에서 욕은 안 하니까 다행이죠.”
천희주와 살가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나는,
“오빠! 안 들어와?”
먼저 회의실에 들어가 있던 스텔라가 얼굴을 빼꼼 내밀며 날 부르자 어깨를 으쓱했다.
“갈게요.”
“응, 수고해.”
회의실로 간 나는 스텔라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스텔라가 자신이 찍었던 사진들을 내게 보여준다.
“오빠가 말한 대로 다 찍어놨는데, 지금 보낼까?”
말괄량이 같은 느낌을 풍기는 사진도 있었고, 요조숙녀처럼 조신한 사진도 있고...
나름 열심히 생각한 티가 나는 사진들이었다.
사진을 유심히 살펴본 내가 말했다.
“잘 찍혔네. 회의 끝나기 전에 대표님이랑 보영이 누나한테 검수 받고, 희주 누나한테 넘겨.”
“오빠가 올려주는 거 아니야?”
“난 SNS 안 해.”
“내 SNS는 관리해준다며? 나중에 내 SNS가 개설되면 거기 올린다고 어제 그랬었잖아.”
“다른 사람이 개설하면 올릴 거라고 말한 거지. 따로 직원 한 명 뽑거나, 희주 누나가 해줄 거야. 여자 SNS는 여자가 관리하는 게 훨씬 나아.”
“그래...? 난 오빠가 해줘도 괜찮은데.”
약간 서운해 하는 듯한 말투.
짜릿한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전신으로 퍼진다.
아직 멀긴 했지만 관계가 발전하고 있다는 증거가 보여서 좋다.
부드럽게 미소 지은 내가 그녀를 달랬다.
“곧 바빠지면 할 시간도 없어.”
“그렇긴 한데... 알았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우린, 최승환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자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반응에 만족감을 느꼈을까?
만면이 활짝 펴진 최승환이 우리가 인사를 하기도 전에 말했다.
“앉아있어. 괜히 귀찮게 인사하지 말고.”
같잖게 허세는...
상석에 앉은 최승환을 속으로 한껏 비웃어준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보영이 스텔라의 옆자리에 앉자 회의에 집중했다.
오늘은 뮤비 콘셉트 점검인가? 금방 끝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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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지 사제, 밀크 쉐이크는 언제 완성되지요?”
메릴과 함께 TV를 보고 있던 아델의 물음.
막 믹서기를 다 돌린 마르셀라가 대답했다.
“다 됐어요, 성녀님.”
“좋아요. 빨대는 큰 것으로 부탁해요.”
“네, 성녀님.”
컵 두 개에 쉐이크를 던 마르셀라는, 약간 흘러넘친 쉐이크를 깨끗한 행주로 닦아내고는 예쁜 컵받침에 컵을 옮겨놓았다.
이후 쟁반에 담아 아델에게 대령했다.
“음음...! 먹음직스럽게 생겼군요. 잘하셨어요.”
“감사합니다. 그럼 맛있게 드시고, 모자라면 말씀해주세요.”
“그러지요. 참, 밖으로 나가셔서 메릴이 가지고 놀 장난감을 몇 개 사오도록 하셔요.”
“아, 네. 지금 바로...”
마르셀라가 포탈을 열고 장난감 가게 근처로 이동하려고 했다.
“기다려.”
하지만 방에서 나온 세화의 부드러운 명령이 들리자마자 곧바로 포탈을 닫았다.
마르셀라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한 세화가 아델에게 말했다.
“아델, 마르셀라는 지금 지혁이가 시킨 일을 해야 돼. 장난감은 내가 사다줄게. 괜찮지?”
동그란 눈을 끔벅거린 아델이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잠깐 이리 와볼래?”
“왜애...?”
“얼른.”
혹여 잔소리를 할까 불안하기라도 했던 탓일까?
아델의 엉덩이는 바닥에 딱 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하지만 이내 마지못해 일어나, 조심스럽게 세화를 향해 다가갔다.
그런 아델의 뺨을 어루만진 세화가 물었다.
“너도 할 일이 있지 않아?”
“무슨 일...?”
“타이라트교의 신도들을 늘려야지. 그래야 지혁이가 신기를 갖게 되잖아.”
“그건 유세라 신도와 송혜윤 신도가 열심히 해주고 있는데에... 아 왜 또 잔소리해...”
투덜거린 아델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아델의 잘 정돈된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긴 세화는, 그녀의 널따란 이마에 진한 키스를 해주고는 말했다.
“미안해. 재촉하려던 건 아니었어. 나중에 포교활동이 끝나면 새 신도들을 보러 갈 테니까, 꼭 불러줘. 알았지?”
“응...”
“장난감은 뭘로 사올까? 그냥 변신로봇... 뭐 이런 거면 돼?”
“세화야...! 메릴은 여자아이잖아... 남자아이들이나 하는 그런 건 별로야.”
“그래? 그럼 인형이면 되나? 막 분홍색 느낌 나는 거?”
“너, 너는 인형도 못생긴 것으로 고를 것 같아. 불안해서 안 되겠네에... 그냥 나랑 같이 가... 옷 입고 나올 테니까 기다려. 이 바보야...”
조심스레 세화에게 까불어본 아델이 자신의 방으로 도망치듯 쌩 달려갔다.
세화 특유의 기품으로 조련당한 아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마르셀라는, 세화의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알렉산더 헤일리한테 가는 거지?”
“아, 네...! 그... 정확히는 알렉산더 헤일리의 친구들이에요.”
“그렇구나. 범죄조직은 다 흡수했어?”
“네, 규모가 약간 작은 곳인데, 마약과 성매매를 주로 알선하는 조직이에요. 음지에서 유명하지는 않지만, 경찰과 커넥션도 있어서 탄탄한 곳이죠. 일단은 제가 죽인 조직원 중 한 명으로 변장해서, 돈을 쉽게 벌 수 있다는 말로 접근하려고 해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린 세화가 말했다.
“알았어.”
“오늘 일과 보고는 저녁에 드릴게요.”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어. 난 항상 널 믿어. 그리고 혹시라도 내가 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부담 갖지 말고 말해. 알았지?”
마음에 안 든다고 마물들을 두들겨 패던 예전의 세화와 지금의 세화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컸다.
자신을 생체의자로 삼았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녀의 변화가 기꺼워서 미칠 지경이다.
감격한 마르셀라가 울먹이는 투로 대답했다.
“네, 넷...!”
**
조수석에 앉아 열심히 휴대폰을 하던 스텔라.
그녀가 날 돌아보며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오빠, 오빠도 비스트 슬레이어 좋아해?”
갑자기 비스트 슬레이어가 나온다고? 여기서?
대체 뭘 보고 있었는데?
“좋아하지.”
좋아하다 뿐이랴? 사랑한다.
“피규어도 모아?”
피규어가 아니라 실제 비스트 슬레이어... 아니, 이블 발키리들을 모았어.
지금 집에서 편히 쉬고 있을 걸?
“안 모아.”
“그래? 그럼 비스트 슬레이어 중에서 누굴 제일 좋아해?”
“글쎄...? 그런 건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너는?”
“난 레오나가 최애야.”
세화를 제일 좋아한다고? 이거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서운해 하겠는데.
“레오나? 이유가 있어?”
“가장 먼저 나타난 비스트 슬레이어라서 좋아해. 마물들이랑 싸운 전적도 화려하고...”
비스트 슬레이어에 푹 빠진 건가?
하기사 스텔라가 갖고 있는 정의감은 타락하기 전의 아내들과 비슷할 테니...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그녀들에게 동경심을 갖는 것도 이해가 간다.
“유리아랑 캐롤라인, 셀린은?”
“유리아는 레오나 다음으로 좋아. 캐롤라인이랑 셀린은 괴물들이랑 별로 안 싸웠잖아.”
“그래서 싫어?”
“아니, 전부 좋아해. 굳이 순서를 나누자면 그렇다는 거야. 실제로 한 번 봤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불가능하겠지?”
아니, 충분히 가능해.
네가 데뷔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운명적으로 만나게 될 거란다.
물론 비스트 슬레이어인 척 연기를 하는 이블 발키리들이겠지만.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모과차나 마셔. 내일부터 뮤직비디오 촬영이라 몸 상하면 안 되니까 이불 두꺼운 거 덮고 따뜻하게 자. 알았어?”
“알았어. 헐... 오빠. 이거 봐봐. 비스트 슬레이어 팬 사이트 회원수가 10억 명이래. 내 팬 카페가 10만 명이니까... 만 배네?”
10억 명? 전 세계인의 10퍼센트쯤 되는구나.
근데 얼마 없네? 지금까지 살아있는 게 누구 덕분인데... 은혜도 모르는 것들.
나중에 반 정도 죽여서 50퍼센트로 만들어주지.
“나 운전 중이잖아. 그리고 휴대폰 좀 그만 봐라. 내 말 제대로 듣긴 한 거야?”
“들었는데?”
“뭐라고 했는데?”
“내일 촬영이라 몸 상하면 안 되니까, 이불 두껍게 덮고 자라고.”
“그 전에.”
“그 전에? 아... 맞다. 모과차...”
혀를 쏙 내뺀 스텔라가 컵 홀더에서 모과차를 들었다.
이후 반대쪽 손으로 글러브박스를 열고, 딸기 맛 사탕을 꺼냈다.
차를 전부 마신 스텔라의 생색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운전에 집중한 나는, 그녀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뒷좌석으로 가서 기타를 꺼냈다.
그리고는 내게서 등을 보인 채 양팔을 뒤로 내민 스텔라의 어깨에 가방끈을 메어주었다.
이제는 시중에 적응을 해버린 그녀가 몸을 돌리며 손을 흔든다.
“항상 고마워, 오빠. 조심히 들어가.”
“얼른 쉬어. 늦었다.”
“응. 내일 봐!”
활기차게 작별인사를 한 그녀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긴다.
한 번만 뒤돌아봐주면 안 되냐? 하루의 마무리로 네 얼굴 좀 보고 싶은데.
속으로 그리 투덜거린 나는 다시 차에 타려고 했다.
그때,
“형, 지혁이 형!”
옆 빌라 주차장 기둥에서 알렉스가 튀어나오더니, 내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눈을 가늘게 뜬 내가 물었다.
“너 알렉스야?”
“네, 저에요.”
“왜 거기 숨어있어?”
“아니... 방금 오는데 형 차 보이길래... 누나는 들어갔죠?”
“들어갔어.”
알렉스가 아직 채 꺼지지 않은 빌라의 센서등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가타부타 이런 말을 한다.
“저 돈 좀 꿔줘요.”
이럴 줄 알았다.
방금 튀어나온 것도 우연이 아니라, 스텔라한테 도착시간을 물어보고 의도적으로 시간에 맞춰 숨어있었던 거다.
뒷주머니에 손을 넣은 내가 곤란한 듯 말했다.
“돈? 저번에 빌린 것부터 갚아야지.”
“아, 형... 진짜 나중에 꼭 갚을게요. 조만간 알바 구할 거예요.”
알바라... 혹시 오늘 변장한 마르셀라한테 혹할만한 얘기를 들은 건가?
잠깐 고민을 한 나는, 마지못한 척 지갑을 꺼냈다.
기대감으로 번들거리는 알렉스의 눈.
이번엔 통 크게, 원하는 만큼 주마.
“얼마나 필요한데?”
“음... 한 10만원? 아니, 15만원요.”
“15만원이나?”
“왜요? 그 정도는 없어요? 그럼 저 앞 편의점에 ATM기 있으니까 같이 가요.”
이 새끼가 지금 언제 적 옷 장사를 하고 있는 거야?
헛웃음을 켠 나는 5만원 권 지폐를 세 장 꺼냈다.
그리고는 알렉스에게 주려다가 손을 확 뺐다.
“너 혹시 도박하는 거 아니지?”
“학생인데 뭔 도박이에요... 절대 안 해요.”
“아껴 써라. 너희 누나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알았다니까요.”
돈을 낚아채듯 받아든 알렉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방금 껄렁한 태도와는 전혀 다른 살가운 태도를 취한 녀석이 말한다.
“감사합니다, 형님. 저 들어가 볼게요.”
“그래.”
돈은 없어지면 있었던 양에 비례하여 아쉬움이 커지는, 아주 요망한 물건이다.
그러니까 알렉스야, 다 떨어졌을 때 불법적인 일도 저지르고 그래라.
너한테 큰 기회가 왔단다.
누나한테 도리도 지킬 수 있고, 매일매일 신나게, 돈 걱정 하지 않으면서 놀 수 있어.
확실하게 잡아라. 잡지 않으면 강제로 잡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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